35화: 미래에서 온 비약 (3)
방에서 막 나오자 이올린과 마주쳤다.
미온의 말대로 동생은 새로 선물해 준 곰 인형을 품에 꼭 안고 있었다.
“오라버니?”
“어서 오려무나. 이올린.”
이올린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금까지 시몬이 미온의 처소에 제 발로 온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올린 입장에서는 놀라면서도 반갑고, 한편으로는 불안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어리지만 알 것은 다 아는 나이다.
자신은 서녀이고 눈앞에 있는 오라버니는 적자라는 것을.
“왜 그런 표정을 지어?”
“아, 아니에요. 오라버니께서 여기에 오시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서요.”
“앞으로는 자주 올 생각이다.”
시몬의 상냥한 말에, 이올린을 괴롭히던 일말의 불안감이 싹, 하고 가셨다.
이올린이 환하게 웃었다.
“정말이에요?”
“언제 내가 거짓말을 하더냐?”
“아니에요. 그게, 너무 기뻐서…….”
“기뻐할 일은 따로 있을 것 같구나.”
“예에?”
시몬이 문 쪽을 가리키며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오늘은 어머니와 같이 정원에 나가 보는 건 어때? 이제 어머니는 더 이상 아프지 않으실 거다.”
“그게 정말이에요?”
“믿을 수 없다면 직접 가서 확인해 봐.”
눈을 수차례 깜빡인 이올린이 재빨리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 귀여운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몬은, 피식 웃고는 저택 밖으로 나갔다.
시몬이 걸음을 옮긴 곳은 기사단 훈련소였다.
저택 근처엔 연무장이 제법 많다. 무를 숭상하는 가문답게 곳곳에서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던 기사들이 시몬을 알아보고 재빨리 다가와 인사했다.
“공자님.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제2기사단의 험멜이었던가?”
“오오, 기억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험멜은 선임 기사로 제법 전공을 쌓은 사람이었으니까.
“접경에서 나름 작전을 잘 수행했다고 들었다. 돌아오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훈련이라니. 한스 경도 가만 보면 엄한 구석이 있다니까?”
“훈련을 실전처럼. 이게 우리 기사단의 구호이기도 하지요.”
“좋은 자세다.”
“그보다 공자님. 덕분에 전쟁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기사로서 이런 말씀 드리기 민망하지만,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다른 기사들도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문득 전에 라니에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영지민들이 모두 자신을 칭송하고 있다고.
“그래도 너희들이라도 고마움을 느끼고 있어서 다행이군. 한스 경이나 파월 경 같은 지휘관들은 조금 불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력을 낭비하지 않았기에 오크와의 전투를 준비할 수 있는 게 아닙니까?”
그것이 시몬이 짠 그림 중 하나이기도 했다.
공공의 적이 생기면 서로 힘을 합치기 마련이다. 오크는 아주 좋은 교본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나이 든 기사들은 알데바란을 징벌하지 못했다는 불만을 품고 있으면서도 오크와의 전투를 대비하는 것에 땀을 쏟고 있는 중이다.
“너희들은 오크가 두렵지 않나 보군.”
“솔직히 두렵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온전한 몸으로 싸울 수 있다는 게 영광스러운 일이죠. 전장에서 멋지게 싸우다 죽겠습니다! 그게 기사들의 로망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로망이 아니라 노망이지.
죽으면 모든 게 끝이다.
가문의 명예가 전부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지켜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선 의문이 남는다.
그렇다고 회귀 운운하며 죽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상황.
“경들의 희생은 헛되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기왕이면 살아 돌아왔으면 좋겠군. 같이 술 한잔할 수 있게 말이지.”
“아! 너무 좋습니다. 그러고 보니 공자님과 술을 마신 것도 꽤 오래전 일이군요.”
“전지훈련 때였던가?”
“맞습니다.”
시몬은 기사들의 어깨를 다독이며 독려했다.
“약속하지. 그대들이 무사히 돌아온다면 내 술 한잔 대접하기로.”
“한쪽 팔이 없어져도 상관없겠죠? 싸우다 보면 간혹 팔이 날아가는 경우가 있어서.”
“으하하하하!”
기사들은 유쾌했다. 이런 기분, 나쁘지 않았다.
“양팔 다 없어져도 좋다. 그땐 내가 직접 술을 먹여 줄 테니까.”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공자님!”
“고생했다.”
시몬은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 케나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외딴 수련장에서 홀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번에도 기척을 죽이고 동생이 훈련하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과연 깨달음을 얻었을까?’
검로나 보법 등 ‘살검’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직접적인 비법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저 훈련에 임하는 자세 같은, ‘속도’와 ‘패도’라는 큰 틀에서의 지도만 이루어졌다.
과연 동생이 그것을 어떻게 소화해 냈는지가 궁금했다.
‘호오.’
동시에 시몬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휘이익!
케나드가 휘두른 검의 궤적이 예전보다 훨씬 더 날카롭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왼손에는 커다란 방패를, 그리고 오른손엔 롱소드를 쥐고 있었다. 그리고 온몸엔 플레이트 메일을 걸치고 있다.
보기에도 빠른 움직임이 벅찬 상황.
그럼에도 케나드가 내지르는 검엔 속도가 붙어 있었다.
‘오러 없이도 이 정도라면, 역시 살검의 묘리를 어느 정도 이해한 것 같군.’
이윽고 케나드가 방패를 곧추세웠다.
방패로 몸을 가리는 듯한 자세였지만, 은근히 무게 중심을 낮게 깔았다. 방어 자세가 아니었다. 앞으로 돌진할 준비를 끝낸 것.
이윽고 그의 다리가 움직였다.
타탓!
속도에 속도가 더해지고.
콰아앙!
케나드의 돌진이 앞에 세워진 허수아비를 강타했다. 매우 강한 충격에 허수아비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평범한 차징이군. 고작 그걸로 패도를 칭할 수 있겠느냐?’
보통의 방패 차징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약한 상대는 날려 버리고, 강한 상대에겐 충격을 줘 자세를 흐트러트리는 것이니까.
그런데 방패를 밀어내듯 흘려 낸 케나드가 검을 내질렀다.
슈슉!
날아가던 허수아비가 반으로 쪼개졌다.
“하아앗!”
기합과 함께 오러가 터져 나왔다. 워낙 빠른 전환이라 처음부터 오러를 쓰고 있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서걱!
다시금 휘둘러진 검이 반으로 쪼개진 허수아비를 다시금 반으로 나눠 버렸다.
만약 눈앞에 있던 것이 허수아비가 아니라 사람이었다면 몸통이 분리되고 사지가 잘려 나갔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정말 찰나의 순간 이뤄졌다.
‘너는 정말 천재다. 케나드.’
씨익 웃은 시몬은 손뼉을 치며 기도를 드러냈다. 그러자 케나드가 깜짝 놀라며 검을 거뒀다.
“형님! 언제 오셨습니까?”
“지금 막.”
“……보셨습니까?”
시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너무 무성의하게 가르친 게 아닌가 싶었는데, 그걸 잘 소화해 낸 것 같구나.”
“이게 모두 형님 덕입니다.”
“내 덕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똑같은 비법을 알려 준다고 해도 막상 해낼 수 있는 사람은 기사단에 한 명도 없을 것 같다만.”
냉정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시몬에게서 나올 수 없는 칭찬이었다.
케나드는 순간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볼은 왜 꼬집냐?”
“형님께 이런 과분한 칭찬을 들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시 꼬집어 봤는데…….”
“아프지?”
“예.”
“네 노력의 결과를 폄하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구나.”
“형님.”
몸을 돌린 시몬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따라오라는 말이었다.
두 형제가 저택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뱃놀이 좋아하냐?”
“예? 갑자기 뱃놀이요?”
“조만간 가족 여행을 한번 추진할 계획이다. 물론 킬스톤에서 대승을 거둬야 가능하겠다만.”
“마이너 마을의 별장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래. 조금 갑작스러운 소식이지만, 둘째어머니의 병이 완전히 나았거든.”
“그게 정말입니까?”
케나드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케나드는 이올린을 끔찍이 아꼈다. 당연히 미온 부인도 친어머니처럼 공경히 대했다.
아무도 고치지 못했던 병이 다 나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운 좋게 좋은 약을 구했는데, 으음.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군. 그럼 저길 봐라.”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미온 부인과 이올린이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누가 봐도 얼굴에 생기가 돌고 있었다.
케나드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우와! 정말이군요! 저렇게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은 처음입니다. 하녀들이 부축하지 않네요. 걸음에도 힘이 들어가 있고…….”
“그러니까 다 같이 놀러 가자고. 별장 옆에 있던 호수가 참 좋아 보이던데.”
“예! 저야 좋습니다!”
“거기 빵도 아주 맛있었지. 존슨이라는 명장이 그 마을에 있더구나. 이번에 같이 사업을 하기로 했는데 솜씨가 아주 좋아.”
“오, 그렇습니까?”
“그래. 아주 즐거운 나들이가 될 것이다.”
사실 가장 좋아할 사람은 드뇌브 후작이다.
정실인 헤라보다 훨씬 아끼는 사람이 바로 미온이었으니까.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기대되는군.’
물론 시몬은 자신이 비약을 만들었다는 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드비안느와 로이드 가문을 끌어들여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계획이었다.
‘당분간은 비약으로 만족해야겠지. 이보다 더 좋은 성능을 내는 영약을 만들려면 위험한 곳으로 가야 하니까.’
시몬이 만든 비약은 안전한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상위 약으로 분류되는 ‘영약’급의 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던전이나 마계 등 위험한 곳에서 약초를 채집해야 했다.
‘아직은 무리지. 별로 거기까지 갈 생각도 없고.’
주요 던전의 위치와 이종족의 교류 통로는 모두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었지만 당장은 활용할 필요가 없었다.
‘그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라야지.’
만약 그 지식을 써야 한다면, 가문이 위기에 처하거나 누군가를 도와야 하는 위급한 상황일 것이다.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는 시몬의 입장에서는 피하고 싶은 일.
‘당분간은 케나드에게 올인한다.’
곧 두 형제가 시몬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시몬은 테이블에 올려 둔 작은 나무 상자를 케나드에게 건넸다.
역시나 그 상자에도 은은한 빛을 발하는 비약이 들어 있었다.
“형님. 혹시 이 약이…….”
“그래. 너를 아크튜러스 가문의 가주로 만들어 줄…….”
“예?”
“흠흠, 아니다. 네 서클을 하나 더 늘려 줄 아주 귀한 약이지.”
케나드가 눈을 빛냈다.
탐욕스러운 눈빛이 아니었다. 강함에 대한 순수한 열망. 기사로서 응당 추구해야 할 강함이 만들어 내는 동경과도 같은 것이었다.
시몬은 마치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표정으로 케나드를 응시했다.
“네 심장엔 서클이 들어갈 자리가 만들어진 상태다. 본래라면 서클 하나가 늘어날 정도로 강한 효과를 얻긴 어렵겠지만, 이미 자리가 잡혀 있으니 서클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다.”
“그냥 먹기만 하면 됩니까?”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 내가 혈맥을 짚어 줄 것이다.”
케나드는 편히 침대에 누웠다.
“약은 한 번에 삼키고, 온몸의 긴장을 풀어라. 이질적인 기운이라고 해서 밀어내지 말고 손을 뻗어 포근하게 품어 주거라.”
“알겠습니다. 형님.”
결의에 찬 표정을 한 케나드가 단약을 한입에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