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미래에서 온 비약 (1)
아크튜러스 저택에서는 드비안느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엔 고급스러운 비단 보자기가 들려 있었다.
그 안엔 귀한 약초가 들어 있었다.
시몬이 떠나기 전 부탁했던 약초를 겨우 시간에 맞춰 구한 것.
전령에 따르면 시몬은 오늘 오후 저택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드비안느?”
아크튜러스 가문의 첫째 부인 헤라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드비안느를 불러 세웠다. 복도를 지나가던 그녀는 총총걸음으로 다가갔다.
“예. 마님. 무슨 일이시온지요.”
“별일이 있는 건 아닌데…… 요즘 왜 그렇게 자주 자리를 비우지? 수준 낮은 하녀들과 말 상대라도 하라는 거니? 로이드 가문의 충심은 잘 알고 있지만, 요즘은 좀 보기가 그렇더군.”
“어머, 죄송해요. 마님.”
드비안느는 고개를 조아리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가능하면 시몬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이 약초가 무엇에 쓰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최근, 시몬이 미온 부인에게 올릴 약을 바꾸라고 명령한 적이 있다.
만약 이 보자기에 들어 있는 게 둘째 부인 미온을 위한 약초라는 것이라 오해한다면 불같이 화를 낼 거다.
“그게요. 라니에리 경이 쓸 약초들이 좀 있었어요. 그래서 본가에서 구해 오느라 조금 자리를 비웠는데, 죄송해요.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라니 경이?”
“예.”
결국 드비안느는 저택에서 제일 만만한 라니에리의 이름을 팔아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다분히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방금 헤라의 말이 힌트였다.
그녀는 라니에리를 애칭으로 부를 정도로 총애하고 있었으니까.
솔직히 말해 아크튜러스 저택에 있는 여성들 중, 라니에리를 싫어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라니에리만큼 지적이고, 교양 넘치며 우아한 남성은 보기 드무니까.
“저런, 딱하기도 하지. 어디 아프기라도 한 것이니?”
드비안느는 잠시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상냥한 어조로 말할 수 있는 분이었던가?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요즘 시몬 공자님을 보좌하느라 체력이 많이 떨어진 것 같다고 해서 보약재를 좀 챙겼습니다. 아시잖아요? 보기보다 허약한 거.”
게다가 실제로 최근에 알데바란 영지에도 다녀오고 했으니, 여리여리한 라니에리가 보약을 찾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긴. 시몬이 요즘 좀 많이 달라지긴 했지.”
“그래도 모두가 공자님을 칭송하고 있어요. 영지에 평화를 가져다주셨다고요.”
“쯧.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것을.”
헤라의 눈살이 찡그려졌다.
첫째 아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반드시 해야 하는 황녀와의 결혼도 물리겠다고 하고, 심지어는 후계자가 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당연히 친모인 헤라는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케나드도 그녀가 낳은 자식이긴 했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시몬이었다.
케나드는 훌륭한 기사는 될 수 있으나 훌륭한 영주는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문은 반드시 장남이 이어야 하는 법.’
그런 보수적인 생각이 머릿속에 확고히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그때 뜻하지 않은 사람이 나타났다.
시몬이었다.
“어? 공자님?”
“뭘 그리 놀라고 그래?”
“너무 일찍 오신 거 아녜요? 오후쯤 오신다고 들었는데.”
“좀 서둘렀다. 마침 나와 계셨군요. 어머니. 잘 다녀왔습니다.”
“생각보다 일찍 왔구나.”
“해야 할 일들이 좀 밀려 있어서 말이지요.”
“요즘 상단에 출입한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드디어 아버지 일을 좀 돕겠다는 생각이 든 거니?”
헤라도 나름 장남의 동선을 파악하고 있었다. 최근엔 마이너 마을의 별장 관리인이 따로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공자님께서 뭔가 하고 계신 것 같다고.
시몬은 점잖게 웃었다.
“아닙니다. 개인적인 일이 좀 있었습니다. 조만간 다시 저택을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헤라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들을 응시했다. 하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며 손을 휘저었다.
“정말 그놈의 열병이 뭔지 원망스럽구나.”
“열병 탓이 아닙니다, 어머니. 저는 우리 가문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요. 괜찮은 인재가 있어서 등용하러 가는 겁니다.”
“괜찮은 인재?”
“아버님께서도 좋아하실 겁니다.”
그제야 헤라는 노여움을 좀 풀었다.
다시 정신을 차린 건가 싶기도 했지만, 아직은 방심할 수 없었다.
시몬은 드비안느의 손에 들린 보자기를 응시했다.
“그거 내가 부탁한 약초인가?”
“예. 도련님. 라.니.에.리. 경의 건강을 위한 좋은 약재랍니다?”
“아아.”
두 사람은 굳이 표현하자면 소꿉친구였다.
서로의 눈만 바라봐도 어떤 상황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름에 방점까지 찍었으니 모르면 바보일 거다.
때마침 라니에리도 복도로 들어왔다. 헤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라니 경. 요즘 몸이 안 좋다던데?”
“제가요? 전혀…….”
드비안느가 보내는 필사적인 신호를 뒤늦게 확인한 라니에리가 헛기침을 하며 점잖을 떨었다.
“전혀, 완전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요즘 좀 무리했나 봅니다. 조금 현기증이 있군요.”
“저런, 식사는 제때 하고 다녀야지.”
“심려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마님의 평온한 일상을 방해한 것 같아 송구스럽기 그지없군요.”
“그 정도는 아니네.”
“저보다는 공자님이 걱정입니다. 요즘 워낙 중요한 일들을 맡고 계셔서 말이지요.”
다행히 헤라는 그것이 비꼬는 말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시몬을 잘 부탁하네.”
“염려 마십시오. 마님.”
그제야 헤라가 자리를 떴다. 드비안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와, 대박. 하마터면 잘릴 뻔했네요. 일도, 모가지도. 정말 아슬아슬했다.”
“대체 무슨 거짓말을 한 거야?”
드비안느는 신경질적으로 보자기를 시몬에게 건넸다.
“이게 뭐냐고 물으실까 봐요! 괜히 도련님이 부탁했다고 하면 오해하실까 봐 어쩔 수 없이 다른 이야기를 한 거라구요?”
“뭐라고 했는데?”
“라니에리가 몸이 안 좋아서 보약을 지어 주는 거라고 했죠.”
“하하하. 잘했다.”
시몬은 매우 만족스럽게 웃었다. 만약 드비안느가 머리를 굴리지 않았더라면 미온 부인이 난처해졌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라니에리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추궁하고 싶은 건 많지만 다음을 기약하지.”
“뭐?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추궁을 한다고? 어이없네, 진짜.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마님의 측근 시녀라면 빈틈이 없어야 하는 법. 틈이 너무 많아 넌. 분명 자리를 비웠다고 꾸중을 들었겠지.”
“……그게 남길 마지막 유언이세요?”
“싸우지들 마라.”
약초를 대강 살펴본 시몬이 두 사람을 말렸다 드비안느는 어쩔 수 없이 걷은 소매를 다시 내렸다.
“아주 품질이 좋구나. 구하느라 수고했다.”
“운 좋은 줄 알아. 라니. 아무튼 공자님. 감사해요. 대금 청구는 어디로 하면 되나요?”
“내가 직접 네 가문으로 보내마. 수수료도 듬뿍 얹어서 말이지.”
“듬뿍 얹을 수수료가 있으신 건 맞죠?”
문득 며칠 전 있었던 돈주머니 착각 사건이 떠올랐다. 가슴이 후벼팔 듯 아팠다.
“걱정하지 마라.”
“그럼 전 이만 마님 모시러 갑니다?”
“그래.”
드비안느가 사라졌고, 시몬은 라니에리와 함께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테이블에 약초를 꺼내 놓는 것이었다.
“처음 보는 것들이 많군요.”
턱을 괸 라니에리가 약초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학구열이 다시금 샘솟는 표정으로.
“귀한 것들이지. 잘 봐 둬. 이 약초를 특별한 방법으로 배합하면 아주 좋은 비약을 만들 수 있거든.”
“제가 봐도 되는 겁니까?”
라니에리는 걱정했다. 비약 조제법이 아크튜러스 가문의 비전일 수도 있는 거니까.
“봐 두면 좋지. 그래야 내가 널 부려 먹잖아.”
“……네.”
“어차피 약초만 구한다고 되는 게 아니야. 만드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 백날 섞어 봐야 소용이 없지.”
“언제 만드실 겁니까?”
“바로 만들 거고, 완성은 오늘 밤.”
오늘은 보름달이 뜨는 날이다. 보름달의 환한 달빛도 비약을 만드는 재료 중 하나였다.
“그럼 적어도 내일 이후에 출발하시겠군요.”
“며칠 더 있을 수도 있다. 케나드에게 검술도 좀 가르쳐 줘야 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비약을 만드는 것.
그리고 케나드에게 그것을 먹이고 서클을 늘려 아크튜러스 검식의 ‘살검’ 단계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다.
로빈의 등용은 그 이후에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찾을 자신이 있었고, 또 드뇌브 후작과 한 약속에는 기한이 있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런데 참관은 다음에 하면 안 될까요?”
“어디 가려고?”
“마님께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따뜻한 말씀을 해 주셨는데 응당 즐겁게 해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괜히 가서 드비안느하고 싸우지 말고.”
“저희는 공과 사 구분은 철저히 합니다. 걱정하지 마시길.”
“안 그래 보이는데.”
시몬은 좀 걱정이 됐지만, 이내 긍정했다.
“그럼 나가는 길에 전해. 아무도 내 방에 들이지 말라고.”
“알겠습니다.”
꾸벅 인사한 라니에리가 자리를 떴다.
테이블 앞에 선 시몬은 팔을 걷었다. 그리고 약초를 하나씩 다듬기 시작했다.
‘비약 만드는 건 오랜만이군.’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이후로는 만져 본 적이 없었다. 그때는 약초학과 연금술도 많이 발전해 굳이 본인이 만들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새로운 물약과 비약 조제법이 전혀 나와 있지 않은 상황.
전생의 시몬은 아크튜러스 가문의 가주였기 때문에 고급 비약의 조제법을 다수 알고 있었다. 가문의 비전이라고 할 만한 것도 알고 있었다.
‘모두 한꺼번에 푸는 것보단 천천히, 필요할 때 풀자. 괜히 나서서 관심을 받게 되면 곤란하니까.’
시몬은 오러를 최대치로 끌어올려 약초를 계속 다듬었다.
때로는 손질칼에 오러를 불어넣기도 했다.
‘중요한 건, 결을 흩트리지 않으면서 최대한의 약효를 보존하는 것이지.’
그러기 위해서는 고농도의 오러가 필요하다.
그냥 칼로 잘라 냈다간 쇠 기운에 약효가 변질될 가능성이 굉장히 크다.
세 명분의 약초를 가지런히 모은 시몬은, 미리 준비해 둔 절구를 이용해 약초를 빻기 시작했다.
당연히 약초를 빻는 절구도 오러가 깃들어 새파란 빛을 내고 있었다.
‘곱게 가루를 내고, 잘 섞어 하나로 뭉친다.’
잠시 후 총 세 개의 단약이 만들어졌다. 독했던 향이 점차 향기롭게 변하고 있었다.
시몬은 나무 케이스에 단약을 넣고 뚜껑을 닫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달빛에 숙성시키기만 하면 된다. 내일 바로 복용시킬 수 있겠군.’
만족스럽게 웃은 시몬은 단약을 한쪽에 잘 보관해 두었다. 이제 밤이 되어 보름달 빛에 꺼내 놓으면 완성이다.
때마침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시몬은 문을 열고 무슨 일인지 확인했다.
“오오! 시몬 공자님!”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없겠습니까!”
평소 자신을 따르던 가신들이 열 명 정도 모여 있었다. 시몬은 별것 하지도 않았는데도 피곤함을 느꼈다.
“공자님! 킬스톤으로 가지 않으신다는 게 사실입니까?”
“군단 사령관께서 가지 않으시면 누가 간단 말입니까!”
“오크를 막을 수 있는 건 가주님과 공자님뿐입니다!”
아무래도 킬스톤 지역에 케나드를 파견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퍼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