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뜻밖의 행운 (2)
“빵집이요?”
루아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조금의 호기심도 분명히 있었다.
“예. 아버님의 빵집 분점을 도시에도 내는 거지요. 정확히 말하면 아크튜러스 영지의 수도에 말입니다.”
“수도에……!”
수도는 일전에 루아가 지점을 물색했던 알피나 마을과는 차원이 다르다. 인구도 수십 만에 육박하고, 규모 자체도 대도시 수준이었다.
그곳에서 가게를 낸다는 것은 모든 소상공인의 꿈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것을 실현해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제안했다.
루아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그때 옆에 있던 라니에리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엄청난 이야기를 해 버렸나?’
시몬 입장에서 빵집을 내주는 건 밥을 먹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으나, 루아의 입장에서는 다를 것이다.
그걸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이야기가 너무 갑작스러웠나요? 미안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기뻤어요.”
“기왕 말 나온 김에 한번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 루아 양의 재능도 재능이지만, 수도에 아버님의 빵집이 있다면 납품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 드린 말씀입니다.”
“맞아요. 영주님께 빵을 드려야 하니까요. 으응, 빵집…… 생각하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네요.”
시몬은 그녀의 꿈을 알고 있다.
언젠가 부모에게 독립해 자신만의 빵집을 갖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까지.
‘사람들이 빵을 먹고 맛있다고 해 줄 때가 가장 기분 좋다고 했었지.’
전생에서는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저 그런 사람과 결혼하여 제빵과는 다른 일을 했던 것으로 들었다.
‘이번 생은 꼭 그 꿈을 이루게 해 주마.’
두 손을 공손히 모은 루아가 꾸벅 인사했다.
“좋은 말씀 해 주셔서 감사해요. 당장은 무리겠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멋진 제빵사가 되도록 할게요.”
“늘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하지만 수도에 분점을 내는 건 진심이었습니다. 이건 나중에 따로 아버님께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사이먼 님은 정말 친절하시네요.”
시몬은 멋쩍게 웃었다. 그녀의 칭찬만큼 감미롭게 들리는 말이 또 있을까.
“사이먼 님처럼 상냥하고 자상한 분은 정말 처음이에요. 지금까지 많은 손님을 대했지만요. 거기에 검술까지 익히셨으니…….”
인기 많으실 것 같다는 뉘앙스.
만나는 사람 없습니다, 라는 말을 할 뻔했으나 다행히 뒤에서 라니에리가 손가락을 찔러 급발진을 막았다.
“과한 칭찬입니다. 저는 그냥 평범한 상인일 뿐이죠.”
“뭔가 평범하진 않은 것 같아요. 말로는 표현을 잘 못 하겠는데, 처음 뵈었을 때도…….”
바로 그때
쿵쿵쿵!
다소 거친 소음이 들렸다. 누군가가 문을 거칠게 두드린 것이다.
“응? 누구지?”
루아가 재빨리 아래로 내려갔다. 뭔가 낌새가 좋지 않아서 시몬도 그 뒤를 따랐다.
곧 문이 열리고 건장한 남자 세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죽 갑옷을 걸치고 허리엔 장검과 도끼 같은 날붙이를 착용하고 있었다. 딱 봐도 모험가였다.
‘좋은 놈들은 아닌 것 같군.’
전생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을 대해 본 시몬은 직감했다. 이곳을 찾아온 저 사내들이 심상치 않다고. 표정에는 탐욕이 가득 차 있었다.
역시나 루아는 그들을 보곤 깜짝 놀랐다.
“제이크 씨?”
“하하하핫! 빵집에 없길래 혹시나 해서 와 봤는데 역시 여기에 있었군.”
“저희 집은 어떻게…….”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까 알려 주던데? 역시 시골 인심은 다르다니까? 흐하하하!”
제이크라 불린 남자가 씨익 웃었다. 음식물이 낀 누런 이가 드러났다.
“이거 서운하네. 루아 양. 왜 내 마음을 받아 주지 않는 건가? 설마 날 피하는 거야?”
“저기,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해도…….”
“나처럼 돈 잘 버는 모험가는 또 없다구? 날 만나려고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줄을 서 있는지 모르는 게야?”
대충 보니 견적이 나왔다.
뒤돌아본 시몬이 라니에리에게 조용히 물었다.
“설마 네 작품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합니다.”
“하아.”
라니에리가 특별히 연출한 이벤트가 아니라면, 존슨의 빵집 단골인데 그곳에서 일하고 있던 루아를 보고 반한 모양이다.
‘계속 만나자고 했는데 거절당한 건가.’
당연한 일이다.
시골 소녀치고는 상당히 아름다운 편에 속했으니까. 오히려 따라다니는 사람이 없다면 이상한 거겠지.
뒤늦게 제이크가 시몬과 라니에리를 발견했다.
“으응? 그런데 뒤에 계신 분들은 뉘시오? 처음 보는 면상들인데.”
면상이라는 말에 라니에리가 나서려 했지만, 시몬은 차분히 손을 들어 뒤로 물렸다.
“나서지 마. 이건 내가 해결한다.”
당당히 걸어 나간 시몬이 거한 앞에 섰다. 시몬도 키가 큰 편이었으나 거한의 키가 머리 하나 정도는 더 컸다.
하지만 오히려 상대를 압도하는 것은 시몬 쪽이었다.
“면상이라니. 말버릇이 그게 뭐냐?”
“말버릇? 크하하하! 이놈. 여리여리하게 생긴 놈이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누구냐니까?”
“아크튜러스 상단의 사이먼이다.”
아크튜러스의 이름이 나오자 남자 셋이 동시에 흠칫 놀랐다. 아무리 시골이라고 해도 이곳은 아크튜러스 가문의 영지였으니까.
게다가 영지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 바로 아크튜러스 상단이었다.
하지만 제이크는 두려움을 꾹 눌렀다.
‘그래 봐야 수전노일 뿐이지!’
기세 좋게 나선 상황에서 꼬리를 내릴 수는 없다고 판단했기에.
결국 그 판단은 최악의 한 수가 되었다.
“아크튜러스 상단? 그 잘나신 상단 분들이 왜 여긴 기웃거리나? 뻥 치는 거 아냐?”
“비즈니스.”
“……말이 짧네?”
“물러가라. 괜히 피를 보고 싶진 않으니까.”
“피? 크하하하하!”
제이크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럴수록 루아는 두려움에 떨었다. 말려야 했는데 도저히 나설 수가 없게 되었다.
“상단 놈이면 다야? 왜 사적인 일에 간섭하는 거지? 너희들이 치안경비대라도 되나?”
“개인적인 일이 아니니까.”
“지랄은!”
제이크는 마치 위협하듯 가까이 다가와 얼굴을 들이밀었다. 악취가 코를 찌를 정도였다.
하지만 시몬은 조금도 미동 없이 그와 맞섰다.
“귀 열고 잘 들어. 아크튜러스 상단은 존슨 씨의 빵집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다시 말해 네가 부리는 행패에서 이들을 보호해야 할 필요가 법적으로 충분히 있다는 말이지.”
“투자라니! 그런 이야긴 못 들었는데?”
“못 들었어?”
시몬은 피식 비웃었다.
“빵집 여인에겐 관심이 있고 정작 빵에는 관심이 없었군. 존슨 씨의 분점 이야기는 주민들도 다 아는 사실일 텐데 너만 몰랐던 거냐? 추하다. 어서 물러가라.”
“웃기는 소리!”
툭!
제이크가 시몬의 어깨를 툭 쳤다. 명백한 시비였다.
보통이라면 두어 걸음은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시몬은 미동도 안 했다.
‘이상한데? 너무 살살 밀었나?’
제이크는 다시 힘을 실어 시몬의 어깨를 강하게 밀었다.
툭!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뭐지? 이 새끼. 보기보다 무거운 건가? 바닥에 본드라도 붙인 게야?”
“역시 말로는 안 되겠군.”
시몬은 그들을 지나쳐 집을 나섰다. 그러곤 돌아서 손짓했다.
“따라와라.”
“따라와? 푸하하하! 미친 새끼를 다 보겠군. 오냐! 얼마든지 따라가마! 대륙 끝까지라도!”
제이크와 두 똘마니가 뒤뜰로 나왔다. 조용한 곳이었고 보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루아는 멀리서 발을 동동 굴리기만 했다.
“어떡하죠? 아버지를 모셔 올까요? 아니면 경비대를…….”
“안심하십시오. 루아 양. 저희 주인님은 보기보다 굉장히 강하십니다.”
“하지만 제이크 씨 일행도 이 근방에서 소문난 모험가예요. 던전도 공략한 경험이 있구요. 게다가 세 명이잖아요? 다치기라도 하시면…….”
마음 같아서는 다 설명해 주고 싶었다.
실은 저분이 아크튜러스 가문의 장남이고, 아크튜러스 정규군의 사령관이며 소드 비기너급 오러 유저라고.
“세 명인 건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기도해 주시지요.”
“신이시여. 우리 사이먼 님이 다치지 않도록 보호해 주세요.”
“대상이 잘못되었군요.”
“예?”
“기도해야 하는 건 저 세 놈들입니다. 부디 큰 고통 없이 영면하기를.”
그때까지 루아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해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퍽!
콰직!
“으갸갸갸갸!”
당연히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것은 시몬이 아니라 제이크였다.
이빨 몇 개가 날아갔고, 코뼈가 주저앉았다.
엄청난 고통에 제이크는 얼굴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자신만만하게 맨손 결투를 신청했는데 보기 좋게 나가떨어진 것이다.
“그래도 생각은 있는 놈이구나. 검을 꺼내게 하진 않았군.”
시몬은 손을 탁탁 털었다.
그러곤 루아가 보지 못하도록 등을 진 다음, 쓰러진 제이크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이봐. 제이크.”
“히, 히, 히익!”
“한 판 더 해? 원한다면 진검으로 상대해 주지. 대신 이빨이 아니라 목을 걸어야 할 거다.”
“아, 아닙니다! 제가 졌습니다!”
시몬은 오러를 끌어올리지도 않았다. 그저 초급 아크튜러스 체술로 놈을 제압했다.
그럼에도 제이크는 격의 차이를 분명히 느꼈다.
이 사람은 건들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아까 한 말 기억하지? 대륙 끝까지 따라간다고.”
“그, 그건…….”
“약속 지켜라.”
지키지 않으면 남은 이빨이 모조리 부러질 것 같았다. 제이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몬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운 좋은 줄 알아. 루아 양이 보지 않았더라면 모가지를 확 비틀어 버렸을 거라고.”
“흐헉…….”
“짜식. 귀엽네.”
시몬은 씨익 웃으며 제이크의 뺨을 툭툭 쳤다.
일부러 오러를 조금 섞었다.
덕분에 제이크는 차가운 쇳덩이가 뺨을 때리는 것 같은 독특한 경험을 해야 했다.
“약속 지키라는 건 너무 좀 자비가 없나? 좋아. 선택의 기회를 주지. 대륙 끝까지 나를 따라다닐래, 아니면 두 번 다시 루아 양에게 질척대지 않을래?”
“두 번 다시 루아 양을 괴롭히지 않겠습니다!”
“진심이지?”
“예, 옙!”
“또 내 눈에 보이거나 하면 그때는 틀니를 껴야 할 거다.”
그제야 시몬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루아에게 돌아왔다.
정확히는, 돌아오기도 전에 루아가 달려 나갔다.
“괜찮으세요?”
시몬은 대답하지 못했다.
루아의 따뜻한 손이 자신의 두 손을 감싸고 있어서. 이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사이먼 님?”
“아, 괜찮습니다. 이런 시비는 종종 있는 일이라서요.”
“다행이에요. 다치지 않으셔서.”
“괜히 못 볼 꼴을 보인 것 같습니다.”
그사이 제이크 일당은 뒤뜰에서 도망쳤다. 그들은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할 것이다. 시몬의 말을 듣거나, 영원히 이 마을에 들르지 않거나.
“아니에요. 고마워요. 안 그래도 저 사람들 때문에 좀 걱정했었거든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생각해 보니 사이먼 님 뵐 때마다 매번 고맙다는 말밖에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정 고마우시면.”
시몬은 잠시 뜸을 들였다. 루아의 투명한 두 눈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고마운 일이 생길 때마다 빵이나 하나씩 구워 주십시오.”
“빵이요?”
“예.”
“아, 그래요!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 드릴 수 있어요. 그런데 정말 그걸로 괜찮으신 거예요?”
“그럼요. 충분하죠.”
“상냥하셔라…… 앗!”
그제야 루아는 시몬의 손을 계속 잡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화들짝 손을 뗐다.
“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하하하. 아닙니다. 이만 들어가시죠.”
“네에!”
시몬과 루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 둘의 모습을 진지하게 지켜본 라니에리가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빵이나 하나씩 구워 달라라…… 소박하면서도 울림이 있어.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응용할 만한 좋은 멘트로군.”
이상한 결론을 내린 라니에리도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