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뜻밖의 행운 (1)
긍정적인 답을 내놓자 존슨과 루아가 화색을 보였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초대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정말 감사합니다! 으하하하. 이런 말 하긴 좀 뭐하지만, 제 아내의 요리는 마을에서도 알아줄 정도로 아주 맛있지요! 분명 마음에 드실 겁니다.”
서민 요리는 먹어 본 적 없다.
하지만 전생에서는 여러 번 먹어 본 적이 있다. 그래서 거부감은 전혀 없었다.
“그거 기대되는데요? 이러다 식당까지 내자고 말씀드리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이쿠. 그 정도는 아닌데…… 아이고. 이거 먼 길 오신 손님을 너무 잡아 뒀군요. 루아야. 그렇게 가만히 있지만 말고 어서 두 분 집으로 좀 모셔 드리거라! 가서 푹 쉬시죠. 나으리들.”
“예. 아버지!”
시몬이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들었다.
“아직 마을에서 해야 할 일이 좀 남았습니다. 계약서 처리도 해야 하고요. 댁 위치를 알려 주시면 이따 들르지요.”
“아, 그러십니까? 루아야. 나가서 좀 알려 드리거라.”
“네에.”
루아가 밖으로 따라 나와 손가락으로 마을 한쪽 언덕을 가리켰다.
“저기 언덕 보이시죠? 그 밑에 있는 파란색 지붕 집이 저희 집이랍니다.”
전생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때 그 집이 맞았다.
“음, 알겠습니다. 그럼 이따 뵙지요.”
“저녁 식사 전에 오시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사이먼 님을 위해 작은 선물을 준비했답니다.”
“작은 선물이요?”
루아는 뭐라고 대답하진 않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시몬이 씨익 웃었다.
“가능한 빨리 가겠습니다. 기대되는군요. 어떤 선물일지.”
“너무 기대는 마시고요. 다녀오세요!”
루아는 품에 곰 인형을 껴안은 채 손을 흔들었다. 마음에 든 모양이다.
시몬도 손을 흔들며 이렇게 생각했다.
‘저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군.’
언젠가는 꼭 그렇게 되리라.
빵집에서 멀어지자 라니에리가 물었다.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설마 진짜 상단 지부에 가실 생각은 아닐 것 같고.”
“상단 일은 네가 알아서 처리해. 별장으로 가자.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러시죠.”
어차피 아크튜러스 상단 소속으로 되어 있어서 별장으로 통행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크튜러스 별장은 마을 인근에 자리하고 있었다.
뒤쪽으로는 천연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한쪽에는 배를 댈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고, 조각배 몇 척이 세워져 있었다.
단풍이 지는 가을에 배를 띄우면 근사한 뱃놀이를 즐길 수 있는 곳.
잠깐이라도 서서 풍광을 만끽할 만했으나, 시몬은 별장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처음 보는 분들인데, 누구시오?”
“나다.”
시몬은 가발을 비롯한 각종 변장 도구를 떼어 냈다. 그러자 별장 관리인이 깜짝 놀랐다.
다행히 그는 시몬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도, 도련님!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시몬은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쉿, 소리를 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건 비밀이다. 가능하면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도록.”
“아, 알겠습니다.”
“잠시 집무실 좀 사용하마.”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위치만 말해.”
“저쪽 끝방입니다. 도련님.”
복도를 가로지르는 발걸음이 경쾌했다. 라니에리가 그냥 보고 지나칠 수가 없을 정도로.
“무도회에 오셨습니까? 발걸음이 마치 아르센 교향곡을 따라 스텝을 밟는 것 같군요.”
“무도회보다도 더 짜릿하지.”
“좋으시겠습니다. 하긴,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지요.”
“그러게 말이다.”
그러다 스텝이 뚝 멈췄다. 고개를 홱 돌린 시몬의 얼굴엔 기쁜 기색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라니에리는 모시는 주인이 조울증이 있는 게 아닌가 걱정되었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막상 며칠 묵는다고 했는데 뭘 해야 할까?”
“그냥 가서 밥 먹고 푹 쉬다 오면 되는 거 아닙니까? 어차피 공자님은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으실 거고.”
“아니. 이 좋은 기회를 원초적인 욕망으로 날릴 수는 없지…….”
주인은 다른 답을 원했다. 턱을 괸 라니에리가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답을 내놨다.
“그렇다면 오늘 밤이 승부처입니다.”
“승부처라.”
“감미로운 선율과 달콤한 와인, 그리고 애틋한 속삭임이 더해진다면 아무리 견고한 마음의 장벽도 봄바람을 맞은 얼음처럼 허물어지는 법이죠.”
“……여기가 살롱이냐? 악단하고 와인을 어떻게 동원해?”
“하긴, 얼마 전 큰돈을 잃으셨지요?”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시몬은 괜히 물어봤다며 투덜거렸다. 라니에리는 씨익 웃었다.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제가 보기엔 공자님이 너무 조심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내가 뭘 조심해?”
“공자님은 뭐든 잘하시지 않습니까? 학문이면 학문, 검술이면 검술, 외모면 외모. 모든 것이 완벽하지요.”
“오랜만에 맞는 말을 하는군.”
“그렇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할 수 있다는 마음이 실제로 할 수 있게 만드는 거라고 할까요.”
“그래서?”
“이번에도 루아 양의 마음을 훔칠 수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내가 도둑이야? 사람의 마음을 훔치게?”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반드시 해내겠다고 마음먹은 건 꼭 해냈었으니까.
‘전생의 기억 때문에 오히려 더 조심하게 되는 건 사실이지.’
어떻게든 잘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평소보다도 더욱 조심하게 루아를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좋아. 이번 기회에 좀 더 가까워지는 거다. 도시에 만들 분점 이야기도 더 해 보고 말이지.’
두 사람은 집무실로 들어왔다.
드뇌브 후작이 쓰는 공간이기 때문에 책상은 물론 각종 집기들이 모두 고급스러웠다.
푹신한 의자에 앉은 시몬은 쿠션의 질감을 느끼며 다리를 꼬았다.
“라니에리. 아까 도착하기 전에 한 말 기억하지? 혜성처럼 나타난 신예.”
“예. 제 호위를 구하신다고 하셨죠.”
“‘서부의 신궁’이라는 호칭 들어 본 적 있어?”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라니에리는 머리만 좋은 게 아니라 소문에도 밝은 사람이었다. 그가 듣지 못한 호칭이라면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우리 영지 서부 산골 마을에 인재가 숨어 있다. 활을 아주 잘 쏘는 녀석인데, 가서 데리고 와.”
“녀석이라면, 나이가 어립니까?”
“우리보단 어리지. 하지만 한 사람 몫을 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나이지.”
기억을 얼추 맞춰 보면 올해로 열여섯 살 정도 되었을 터다.
“마을 이름을 알려 주십시오.”
“이름 없는 마을이다. 사냥꾼들의 움막이라고 생각하면 돼. 상황에 따라서 옮겨 다닌다고 들었지. 네 정보망을 총 가동해 서부를 샅샅이 뒤져라. 이름은 로빈.”
“사냥꾼들의 움막. 로빈…… 음, 알겠습니다.”
“정중히 모셔야 하는 것 잊지 말고.”
“예.”
라니에리가 품에서 피리를 꺼내 휙 불었다. 잠시 후 날아온 전서구가 그의 어깨에 착지했다.
라니에리는 간단히 메모한 종이를 작게 말아 전서구의 발에 달린 통에 넣었다. 그리고 모이를 꺼내 먹여 준 다음, 창밖으로 날렸다.
전서구가 사라지자 시몬이 물었다.
“언제쯤이면 소식을 받아 볼 수 있을까?”
“서부에 있는 제 정보원에게 바로 연락을 넣었으니, 공자님께서 저택으로 돌아가실 때쯤엔 신병을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정보가 사실이라면 말이죠.”
“사실이야. 먼 훗날 나와 대륙 정복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는 녀석이니까.”
“솔직히 사냥꾼 마을에서 활을 못 쓰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직접 보면 다르다니까 그러네.”
“기대하지요.”
시몬의 기억 속엔 아직도 생생했다.
푸른 오러를 잔뜩 머금은 화살을 날려 수십 명의 병사들을 쓸어버리는 그 웅장한 장면을.
‘로빈 말고도 다른 인재들도 좀 영입해 볼까?’
알데바란의 진을 포섭하긴 했으나 그녀가 얼마나 활약해 줄지는 아직 미지수다.
‘게다가 지금은 무기를 쓰거나 머리 쓰는 사람들밖엔 없으니까.’
편한 전원생활을 즐기기 위해서는 기술자들도 필요하다.
‘자산도 늘려야지. 물약과 비약을 로이드 가문에 부탁한다고 해도 그걸 잘 팔 사람이 필요하지. 그러려면 상재가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아크튜러스 상단을 통해 약품을 판다면 좀 더 편하겠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다.
‘가문의 부를 축적한 죄로 후계자형에 처하게 되겠지.’
시몬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인상이 남은 몇몇 인물들의 정보가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주무십니까?”
“아니. 행복한 전원생활을 위한 구상 중이다.”
“저도 좀 쉬겠습니다. 부지런히 달려왔더니 몸이 쑤시는군요.”
“그 정도로 쑤시면 어떻게 해? 단련 좀 하라니까 진짜.”
“오는 내내 승차감이 안 좋다고 노래를 부르신 건 공자님 쪽이었습니다만.”
“딱 두 시간만 눈 좀 붙이자고.”
“예.”
“아니다. 한 시간.”
루아가 뭔가를 준비했다고 한다. 두 시간까지 기다릴 자신은 없었다.
* * *
해가 질 무렵, 시몬과 라니에리가 루아의 집을 찾았다.
“어서 오세요!”
루아가 문을 열고 해맑게 웃었다.
“식사 전이시죠? 마침 저녁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어서 들어오세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내부는 아늑했다. 빵집답게 이런저런 빵들이 널려 있었고, 한쪽에는 제빵 도구들이 쌓여 있었다.
“너무 지저분하죠? 죄송해요.”
“아닙니다. 고소한 냄새가 나서 오히려 좋군요. 열정이 느껴집니다. 역시 명장의 집답습니다.”
루아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자기가 아크튜러스의 공식적인 후계자를 2층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을.
“여기가 두 분이 묶으실 방이에요. 깔끔하게 치운다고는 했는데…….”
“매우 훌륭하군요. 마을 여관보다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다행이에요.”
루아가 예쁜 미소를 지었다.
겉치레로 한 말은 아니었다. 평민의 집을 이렇게 깔끔하게 단장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아, 잠시만요!”
아래층으로 후다닥 내려간 루아가 잠시 후 무언가를 들고 나타났다.
쟁반 위에 작은 빵이 몇 개 놓여 있었다.
파는 것과는 달리 모양이 볼품없었다. 하지만 시몬의 눈은 어느 때보다도 반짝였다.
“전에 부탁하신 거 있잖아요. 한번 만들어 봤는데 어떨지 모르겠네요…….”
루아가 부끄러워하며 쟁반을 살짝 내밀었다.
‘이거였군.’
시몬은 빵을 집었다.
모양은 형편없었으나 한입에 넣기 좋은 빵이었다. 촉감도 나쁘지 않았다.
‘그때와 똑같다.’
전생에서도 루아가 빵을 만들어 준 적이 있었다. 그때와 모양도, 맛도 똑같았다.
너무나 맛있었다.
그리고 행복했다.
“저, 사이먼 님?”
시몬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도 없이 굳어 있자, 루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혹시 입맛에 맞지 않으셨어요?”
“아뇨. 아닙니다. 하하하. 너무 맛있어서요.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이 정도 솜씨일 줄이야.”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토록 먹고 싶었으나 먹지 못했던 빵이 아니었던가.
시몬이 남은 빵을 집었다. 그중의 하나를 라니에리에게도 주었다.
“역시 존슨 씨의 따님이십니다. 이 정도라면 가게를 물려받으셔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그 정도는 아녜요. 사실, 어머니가 많이 도와주신 거라서…….”
“멋진 제빵사가 될 겁니다. 제 눈은 틀린 적이 없거든요.”
“감사해요.”
진심으로 기뻐하는 루아의 모습을 보니 시몬은 더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혹시 도시에서 빵집을 해 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