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빅 딜(big deal) (3)
“형님. 중요한 일로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넌 아침부터 뭘 그리 부지런하게 수련하냐?”
“아침이요?”
그제야 시몬은 자신의 시간관념이 동생과는 한참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지런한 동생의 입장에서는 오후나 다름이 없겠지.
“아니, 뭐.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니 됐고. 갑작스러운 이야기지만 너에게 전수해 줄 것이 하나 있다.”
“말씀하십시오.”
‘전수’라는 말은 평소에 쓸 일이 별로 없는 말이다.
특히나 기사들의 경우는 매우 의미심장한 단어다. 검법의 묘리를 전해 준다는 것과 다를 게 없으니까.
시몬을 바라보는 케나드는 마치 전장을 앞둔 기사처럼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너는 지금 격검의 단계에 있겠지?”
“맞습니다.”
“서클은?”
“두 개 있습니다.”
동생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칭찬받고 싶어하는 눈빛이 마치 강아지처럼 귀여웠다.
시몬은 씨익 웃어 주었다.
“벌써 두 개를 만들다니 대견스럽구나. 나는 이제 고작 세 개일 뿐인데.”
“혀, 형님! 그런 의미로 드린 말씀이 아니라…….”
“괜찮아. 자랑해도 돼. 네 나이에 서클 두 개를 박은 사람 흔치 않을 테니까. 노력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해라.”
그제야 케나드가 표정을 풀었다. 하늘 같은 형님 앞에서 말실수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결론부터 말하마. 나는 너를 살검의 단계까지 끌어올려 줄 생각이다. 물론 오러 서클도 하나 더 늘리고 말이지.”
“……살검 단계라니요?”
“믿기지 않지?”
“살검 단계는 보통의 노력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라고 알고 있습니다. 아크튜러스 검법의 묘리는 무궁무진하니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요즘 벽을 느끼고 있습니다.”
시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술이든 뭐든 수련하면서 벽에 부딪히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때는 노력도 소용이 없다. 기연을 만나거나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그 벽을 깬다면 살검의 단계에 도달할 수 있겠군.”
“쉽지 않을 겁니다.”
“아니, 쉬울 거다.”
시몬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내가 살검의 단계에 도달했거든.”
“저, 정말이십니까?”
케나드가 깜짝 놀랐다.
조금의 경쟁심도 없었다. 질투도 없었다. 순수한 존경의 눈빛으로 시몬을 바라볼 뿐이다.
“네 말대로 아크튜러스 검법의 묘리는 무궁무진하지. 하지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한다면, 벽을 넘을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한다면 그 이후부터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그 비결을 저에게 전수해 주신다는 겁니까?”
“정확히는 한 달 안에 너를 살검의 단계까지 끌어올릴 생각이다.”
케나드는 쉽게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뜻밖의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저는, 괜찮습니다. 형님.”
이건 시몬조차 생각하지 못한 전개였다.
“왜? 좋아할 줄 알았는데.”
“형님이 어렵게 방법을 찾으셨잖습니까. 그 노력과 시간…… 짐작도 되지 않습니다. 형님의 것을 빼앗고 싶지 않습니다. 기사들은 형님께서 살검의 단계에 올랐다는 걸 모르고 있습니다. 널리 알리십시오.”
솔직히 시몬은 마음이 찡했다.
감동해서가 아니었다.
‘전생의 나는 정말 탐욕스러웠구나.’
이렇게 자신을 생각해 주는 친동생을 오해해 먼 북부로 유배 보내듯 떠나게 했었으니까.
시몬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케나드의 어깨를 꽉 쥐었다.
마음이 전해질까 싶어서.
“고마운 말이구나. 케나드. 하지만 마음만 받겠다.”
“형님!”
이런 진지한 상황에서는 농담조차 어렵다. 가문을 잇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네가 전수받아야 한다는 말을 꺼낼 순 없었다.
오히려 시몬은 이것을 기회로 이용했다.
“케나드 아크튜러스. 너는 나의 친동생이기 전에 아크튜러스 가문의 일원이며 명예로운 기사다.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정녕 모르느냐?”
“형님…….”
“설령 네가 나를 뛰어넘어도 상관없다. 네가 내 목에 칼을 들이밀어도 상관없다. 그것이 우리 가문을 위해서라면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
“…….”
케나드는 감격에 차올라 절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고개까지 크게 조아렸다.
“형님의 큰 뜻을 이해하지 못한 저를 벌해 주십시오!”
“케나드.”
동생을 부축해 일으켰다. 어느새 케나드의 두 눈엔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시몬은 소매로 동생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우리는 형제다. 서로를 벌하는 입장이 아니야. 서로 도와서 큰일을 해야지. 그래야 아버지께서 기뻐하시지 않겠느냐?”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너에게 살검의 묘리를 전수해 주마.”
굳게 고개를 끄덕인 케나드. 심리적 장벽을 허물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묘기를 부릴 차례였다.
“일단 여기 누워 보거라.”
시몬은 자신의 침대에 누울 것을 권했다. 하지만 케나드가 움찔했다.
“형님. 제 꼴이 지금 말이 아닙니다. 형님의 침대가 더럽혀질 것입니다. 일단 씻고 평복으로…….”
“그럴 시간 없다. 어서 누워. 뒷일은 생각하지 말고.”
“예.”
케나드가 갑옷을 입은 채로 침대에 누웠다. 푹신한 느낌은 조금도 없었다. 그만큼 긴장했기 때문이다.
“우선 너의 서클과 혈맥을 살펴볼 것이다. 조금 아플 수 있으니 각오하도록.”
“저는 죽을 각오도 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진짜 죽으면 안 되지. 아프면 이야기해.”
“……예.”
시몬은 케나드의 맥을 짚었다.
우우웅!
시몬의 강맹한 오러가 케나드의 몸으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조금의 저항도 없다고?’
시몬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 타인의 오러가 혈맥으로 진입하게 되면 방어 기제가 발동한다. 이질적인 오러를 밖으로 밀어내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그런데 동생의 오러는 전혀 그런 기미가 없군. 마치 점령군을 맞이하는 것처럼 차분해.’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
‘이 자식. 진짜 천재였구나.’
어쩌면 자신보다 검술에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 자연스레 그런 생각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불수의인 방어 기제를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오러 조종술이 뛰어나다는 이야기였으니까.
‘내가 천재를 험한 데로 보냈군. 걱정하지 마라. 이번 생은 다를 것이다. 너를 대륙 최고의 소드 마스터로 만들어 주지.’
지이잉!
케나드의 혈맥을 탐색하는 시몬의 오러가 좀 더 강력해졌다.
“크윽.”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것보다 몇 배는 큰 고통이 심장을 옥죄어 왔다. 하지만 케나드는 불굴의 정신력으로 그것을 견뎌 냈다.
그 와중에 시몬은 케나드의 심장에 있는 서클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것 봐라.’
시몬은 다시금 놀랐다. 오늘 하루만 몇 번을 놀라는지 세기도 어려울 정도로.
‘벌써 세 번째 서클이 자리잡히려 하고 있잖아?’
분명 좋은 징조였다.
이 정도의 베이스라면 따로 손을 쓰지 않더라도, 비약을 만들어 먹이는 것으로도 서클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혈맥의 연결점도 상당히 좋다. 막힘 없이 깨끗하군. 마치 넓은 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상쾌한 기분이 들 정도다.’
시몬은 천천히 오러를 회수했다. 이질적인 오러가 사라지자 케나드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동생아.”
“예. 형님.”
“너 서클 두 개 언제 됐어?”
“한 달 정도 됐습니다. 정확히는 형님이 열병으로 쓰러지시기 직전이었어요.”
“음.”
이 정도의 성장 포텐셜이라면 한 달이 아니라 일주일 만에도 살검의 경지에 오르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섰다.
‘아니야. 침착해라. 시몬. 그랬다가는 오히려 내가 주목받게 되어 가문을 이어야 하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게 될 거라고!’
흥분을 가라앉힌 시몬이 차분히 웃었다.
“역시 한 달이면 충분하겠구나. 네 몸은 하늘이 내린 몸이다. 뭐든 금방 받아들일 거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저는 아직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나는 굳이 도움이 되지 않는 일에 거짓말을 하는 취미는 없다. 잘 알지 않느냐?”
그리고 두어 걸음 물러난 시몬이 손짓했다.
“검을 꺼내라.”
“……예!”
스릉!
매끈한 장검이 검신에서 빠져나왔다. 격한 훈련으로 인해 얼굴과 갑옷은 더러워져 있었으나, 검만은 깨끗했다. 매일 부지런히 손질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아크튜러스의 격검 단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베기, 내려치기, 찌르기. 공격의 기본이 되는 동작이기도 하지.”
이번에는 시몬도 검을 꺼냈다. ‘환영의 검’이 서클과 공명하며 위압감을 뿜어냈다.
“격검의 초식으로 나를 공격해라.”
“옛!”
케나드가 오러를 일으켰다.
쿠우우우……
범상치 않은 울림이 일었다. 그것은 케나드가 시몬을 상대하기 위해 오러를 전력으로 끌어올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형님이야말로 내 공격을 오롯이 막아 내 줄 분이시다!’
강함이 아니라 믿음.
그것에 기댄 채 케나드는 전방으로 돌진했고, 거리가 급격히 좁아졌다. 이윽고 검을 횡으로 베어 냈다.
목표는 시몬의 목덜미.
따앙!
“……!”
너무나도 쉽게 막혔다. 시몬은 움직이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검을 한번 비스듬히 들었을 뿐이다.
“실망스럽구나. 앞에서 네게 한 말들이 무색해지는 공격이로군. 이런 공격은 하급 기사 누구에게도 통하지 않는다.”
“이번엔 다를 것입니다!”
케나드는 다시금 초식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베어 내기와 내리치기를 섞은 연속 공격을 준비했다.
쉭!
쐐액!
검과 검이 부딪치는 파열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살갗을 베어 내는 소리도 아니었다. 그저 쇳덩이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였다.
두 공격 모두 사뿐히 피한 시몬이 실망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엔 다를 거라는 말은 허풍이었군.”
“어, 어떻게…….”
“어떻게 피했냐고? 이유는 간단하지. 네 공격이 너무 느려 터졌기 때문이다.”
과장된 면이 있는 발언이긴 했다. 시몬은 이미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경험을 갖추고 있었으니까.
오러는 물리적인 것이라 축적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보법이나 자세, 호흡 같은 체술의 영역은 완전히 마스터하고 있는 상태다.
“지금의 아크튜러스 검법은 너무나 지루하다.”
“……인정할 수 없습니다!”
“한스 경과 똑같은 말을 하는군. 끝까지 들어라. 내가 네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아느냐?”
“경지의 차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선을 그어 버리면 격차를 좁힐 수 없다. 따라잡을 수 있는, 좁힐 수 있는 요인을 찾아야지. 가령, 속도라든가.”
“속도요?”
시몬이 검세를 취했다.
더 이상 보완할 게 없다고 평가받는 아크튜러스의 정통 검식이 아니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구석이 있었다.
검의 무게 중심이 좀 더 앞으로, 즉 저돌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그런 검세였다.
“이것이 새로운 아크튜러스 격검의 초식이 될 것이다.”
시몬의 공격이 임박하자, 케나드는 다시금 검세를 취했다.
신구의 대결.
시몬의 검은 동생의 심장을 향해 베어졌다. 그리고 케나드는 동일한 초식으로 그것을 막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촤아악!
“크헉!”
검의 움직임은 비슷했으나 케나드의 검이 조금 느렸다.
케나드가 입고 있던 갑옷의 껍질이 베어져 나가며 파편이 튀었다.
새로운 검법의 완벽한 승리였다.
“부족한 건 속도만이 아냐. 지금의 검법엔 상대의 모든 것을 파괴하겠다는 패도적인 정신이 없지. 속도와 패도. 이 두 가지를 연마한다면 격검의 경지 따윈 애들 장난이 될 거다.”
“형님…….”
“일단 이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훈련해라. 2주일 뒤에 다시 확인하지. 참, 웬만하면 기사들 앞에서 훈련하지 마. 괜히 말 나올 테니까.”
“이대로라면…… 형님의 가르침이 새로운 가문의 비기가 되는 것입니까?”
“그렇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주인공은 케나드 네가 될 거야.
시몬은 딱 그 말만 빼놓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