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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공자는 쉬고 싶다-22화 (22/120)

22화: 역공 (3)

‘생각보다 쉬운데?’

그래도 제국의 후작가라 제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시몬이 보기에도 타이온 후작은 비무장 상태가 되었다.

‘딱 구워삶아 먹기 좋은 상태가 됐군.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지. 라니에리에게 잔소리를 들을 순 없으니까.’

시몬은 연기에 집중했다.

“아실지 모르겠으나 저는 출발 전, 기사단에 명령을 내렸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세를 수세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호오, 그런 일이 있었던가?”

“예. 각하.”

놀란 표정으로 진을 바라보는 타이온. 하지만 믿고 있는 책사는 이미 시몬의 사람이 된 후였다.

진이 고개를 조아리며 보고했다.

“공자께서 이 자리에서 거짓을 말씀하실 분은 아닙니다.”

“하긴, 그렇지.”

“그리고 접경에서 올라오는 보고서에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습니다. 조용하다고 하더군요.”

“으음.”

잠시 생각에 잠긴 타이온은 이내 두 팔을 벌리며 환하게 웃었다.

“자자, 우리 너무 딱딱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회담이라는 거창한 말은 잠시 미뤄 두고 편하게 이야기하는 게 어떤가?”

“배려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새내기입니다. 각하의 가르침이 절실히 필요한 입장입니다만.”

“그게 무슨 소린가!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시게. 그건 드뇌브 각하를 욕보이는 것이라네.”

“명심하겠습니다.”

사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아크튜러스 후작가의 장남이 왜 이렇게 저자세를 보이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을 기회가.

물론, 영민하지 못했던 타이온 후작은 그 기회를 잡지 못했다.

오히려 좋은 말을 해 줬다며 스스로 뿌듯해했다.

“나도 마찬가질세.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돼. 그러기엔 이 근방에 이리 떼들이 너무 많지 않나?”

“맞습니다. 당장 북쪽을 보더라도 알퐁스 백작가가 기회를 엿보고 있지요.”

“역시 자네도 그쪽을 의식하고 있었군.”

진이 회담 전 귀띔한 내용이었다. 뻔뻔하게도 그것을 마치 자기의 지혜처럼 뽐내기 시작했다.

“지금 상황에서 전쟁을 하게 된다면 알퐁스 백작가만 배를 불리게 될 걸세. 또한 제국의 주축인 우리가 서로 싸우는 건 황제 폐하께 면목이 없는 일이지.”

“구구절절 옳으신 말씀뿐입니다.”

“혹시, 각하께서 언질하신 게 있나?”

조심스러운 질문. 이 회담의 가장 핵심이기도 했다. 아크튜러스 가주의 의향을 파악하는 것.

“전혀 없으셨습니다. 조건 없이 병력을 서로 철수시킨다면 그 이상의 바람은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만…….”

“그런가?”

“다만, 오면서 좋지 않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떤 소식을?”

“오크.”

타이온은 깜짝 놀랐다.

‘오크 놈들의 소식이 전해진 건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크튜러스 영지와 오크족의 영역은 서로 겹치지 않는다. 오직 알데바란 영지에만 맞닿아 있다.

그 말은, 아크튜러스 가문이 알데바란 후작가를 방패 삼아 오크족의 침공에서 피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약점을 잡힌 것이다.

“그 소식은 어떻게 들었는가?”

“저희 가문도 나름의 정보망이 있습니다. 남부의 소식은 빨리 오는 편이지요. 최근 그쪽에 큰일도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으으음…….”

“심려가 크실 거라 생각합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 당장 군사를 남부로 파견해야 하니까.”

시몬이 고개를 들었다.

아크튜러스의 적법한 후계자의 강렬한 눈빛. 타이온은 마치 드뇌브 후작을 눈앞에 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아크튜러스에는 용맹한 전사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알데바란 영지에 주둔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뭐, 뭐라고?”

“남부로 가서 함께 오크를 막겠습니다. 오크족에서 비범한 자가 나왔습니다. 종족을 규합해 밀고 올라올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허어!”

만약 시몬이 고압적으로 나왔다면 테이블을 사정없이 내리쳤을 것이다.

하지만 잘 참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무리 평화를 논한다 한들, 어제까지 검을 겨눈 가문의 병사들을 집 안으로 들인단 말인가?”

“남부로 가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오크족을 상대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외에 부당한 제안이 있습니까?”

“…….”

타이온이 황급히 진을 돌아보았다.

태연한 그녀의 표정을 보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반대할 줄 알았는데, 아무런 말이 없었다.

“진 경. 시몬 공자가 조금 대담한 요구를 하고 있는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나?”

“오히려 고마운 일 아닐까요?”

“뭣…….”

“아크튜러스의 정예라면 오크족의 준동을 쉽게 막을 수 있을 겁니다. 이는 천금을 준다 한들 얻을 수 없는 도움입니다. 각하.”

“…….”

타이온은 혼란스러워졌다. 귀가 얇은 탓에 진의 말이 진심처럼 들렸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도움을 준다고 하지 않나?’

거기에 시몬이 쐐기를 박았다.

“우리는 단순히 알데바란 가문과 평화를 위해 돕는 것이 아닙니다. 병력을 파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 영지를 지키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진이 시몬에게 눈짓했다. 자신이 나서겠다는 신호였다. 시몬은 그런 능동적인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우리 영지가 무너지면, 그다음은 아크튜러스가 타깃이 될 거예요. 아마 그런 의미에서 하신 말씀 같습니다만.”

“정확히 보셨습니다. 과연 동부의 현자다운 말씀이군요.”

“으으음…….”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외교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놈들은 야성적인 존재. 대화가 통하지 않을 확률이 높겠죠. 그래서 병력을 배치해야 안전할 겁니다.”

확신을 갖지 못한 타이온이 다시금 진에게 물었다.

“괜찮을 거라고 보나? 내 생각에 기사단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은데.”

“여기 계신 시몬 공자님께서도 아크튜러스 기사단의 저항에 맞섰다고 들었습니다. 심지어 모든 기사 앞에서 평화를 주장하셨죠. 결국 중요한 건 각하의 의지입니다. 평화냐 전쟁이냐는 각하의 의지에 달린 일입니다.”

“그런가…….”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꼈다.

아크튜러스 가문과 오크족의 준동. 이 두 가지 사실이 너무나도 무겁고 무서웠다.

“잠시 정리를 좀 하지. 아크튜러스 가문에서 협정을 위해 내거는 조건은 남부 지역의 병력 주둔권. 맞나?”

“예. 일부 병력은 철수하고 나머지 병력은 각하께서 허가하신 지역을 경유해 남부 전선으로 내려가게 될 것입니다.”

“그 지역을 정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당연히 각하십니다.”

시몬이 고삐를 느슨하게 풀자, 타이온은 숨통이 좀 트이는 것을 느꼈다.

‘그저 통과하는 것이라면 생각보다 나쁘진 않군. 게다가 연합군을 꾸리는 건 분명 좋은 전력이 될 거다.’

하지만 타이온은 바로 결정을 내리진 않았다.

“좀 생각할 시간을 주겠나?”

“물론입니다. 각하. 그러나 일이 있어 오래 머물진 못할 듯싶습니다. 일주일 내로 결론을 내주시면 좋겠습니다만.”

“좋네. 바로 가신 회의를 열겠네. 진 경. 준비해 주게.”

“명을 받듭니다.”

진은 곧장 명령을 집행했다.

* * *

거처로 돌아온 시몬은 바로 침대에 누웠다. 라니에리는 빈 잔에 와인을 따랐다.

“어떨 거 같아?”

와인잔을 찰랑 흔든 라니에리가 그것을 시몬에게 겨냥했다.

“타이온 후작은 결국 병력의 주둔을 허가할 겁니다. 생각보다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닙니다. 기사단은 끝까지 버티겠지만 말이지요.”

“낙관적이네.”

“공자님께서 너무 조건을 풀어 주셨습니다.”

“왜?”

“경유지 정도는 우리가 정하는 게 좋았습니다. 그래야 이쪽의 요충지를 쉽게 공략할 수 있었을 텐데요.”

그 말에 시몬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공략이라니.”

“공자님께서 알데바란 영지에 관심이 없으시다고 해도 가주께서는 생각이 다를 수 있으니까요. 이런 기회를 놓치면 곤란합니다.”

“미쳤어?”

손가락으로 안경을 쓸어 올린 라니에리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럼 대체 그 조건은 왜 거신 겁니까?”

“케나드 때문에.”

아무리 현명한 라니에리라고 해도, 둘째 공자 때문에 군사 주둔권을 조건으로 걸었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했다.

“설명이 필요한 표정이군.”

“그것 외엔 마땅한 안주가 없군요.”

“케나드가 가주가 되려면 그럴듯한 이벤트가 필요하다. 남부 오크족을 정벌하는 건 쉽게 올릴 수 있는 전공이 아니지. 게다가 녀석의 잠재력을 터트릴 수 있는 좋은 기회야.”

“잠재력이라 하심은.”

“수련만 해서는 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말이지.”

케나드는 실전형 기사였다. 외부에서 강한 자극이 주어지면 배 이상으로 성장하는 케이스였다.

그래서 시몬은 오크를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크야말로 인간과의 전쟁에서는 얻을 수 없는 매우 가치 있는 경험을 얻게 될 테니까.

“지금 내가 후계자 자리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케나드가 성장하는 거다. 그리고 나 이상의 명성을 쌓는 거지.”

“후우, 그 정도로 후계자 자리가 싫으십니까?”

“정확히는 후계자가 아니고 가주 자리가 싫은 거야. 포기해야 하는 게 너무 많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하는 때도 많고 말이지. 무엇보다도…….”

“한번 해 본 거라 또 하고 싶지 않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거지요?”

“잘 아는 사람이 왜 물어?”

“모두가 원하는 자리를 너무나도 쉽게 포기하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라니에리의 답답한 심정도 이해가 간다. 열병을 앓기 전까진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을 테니까.

“너무 가까이 있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는 법이지.”

“어울리지 않게 철학적이시군요.”

“앞으로 종종 듣게 될 거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난다면 가주께서 공자님을 전선으로 보내실 텐데요? 설마 일부러 패하실 리는 없고.”

“뺄 수 있는 방법이 있지.”

“무엇입니까?”

“내가 괜히 황도로 가서 황녀님을 달래겠다고 한 게 아냐. 전쟁이 일어날 것 같으면 바로 황도로 튀면 되는 거다.”

“소환령이 내려올 겁니다.”

“그땐 열병이 도졌다고 하면 돼.”

“도련님이야말로 세상 편하게 사시는군요.”

한숨을 내쉰 라니에리가 와인을 들이켰다. 한편으로는 열병이 원망스러웠다.

너무 많이 마셔서일까. 취기가 확 올라왔다.

“오기 전 케나드 도련님께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원래 위험한 일은 장남이 해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차남이 본가를 지킨다. 그것이 명예로운 아크튜러스 가문의 전통이다.”

“넌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아서 탈이야.”

“언젠 그래서 좋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취했냐?”

“설마요.”

“적당히 마셔라. 괜히 얼굴 벌게져서 돌아다니다 보름이한테 잡아먹히지 말고.”

“보름이는 또 누굽니까?”

“진 경.”

라니에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의미죠?”

“보름마다 해약을 먹어야 하니 보름이다. 애칭이라고 생각하라고.”

“…….”

오늘은 술이 좀 잘 들어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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