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역공 (2)
얼얼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뺨을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그런 느낌.
당연한 일이다. 눈앞에 있는 늑대 같은 남자는 아크튜러스의 장남이 아닌가.
‘내가 미친 짓을 했구나!’
하지만 후회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름 모를 독에 중독되었다.
‘그것도 베텔게우스 가문의 비전이라면 희망이 없어.’
일반적인 독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다르다는 것은 그만큼 해독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몬이 허락하지 않으면 평생 이렇게 노예가 되어 살 수밖에 없는 것.
진은 또다시 좌절감을 맛봤다.
앞으로 친 아크튜러스 정책을 펼쳐야만 하는 입장에서 수많은 비판과 비난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왜 대답이 없지? 독 먹은 사람 어디 갔나?”
시몬이 재촉했다.
“……시간을 주세요.”
“무슨 시간? 괜히 잔머리 쓸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보기보다 나 성질 더럽거든. 참을성도 별로 없고. 열병을 앓고 나니까 사람이 이렇게 변하더라고.”
“일단, 공자님께서 원하시는…….”
“공자?”
“주인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듣고 싶어요. 알데바란 가문에 원하는 것이 있으실까요?”
팔짱을 낀 시몬은 피식 웃으며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내밀어 진을 응시했다.
“세상 참 편하게 사네. 주인이 바라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 가신들의 도리 아닌가?”
“…….”
그렇다고 체념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온몸이 썩어 죽는 건 피해야 했다.
“알데바란 일부 지역에 군사 주둔권을 가져가시는 건 어떠실까요?”
“군사 주둔권이라.”
말 그대로 알데바란 영지 중 일부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는 권한을 말한다.
적대시하던 가문의 병력이 아무런 제지 없이 영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영구 주둔하게 되면 정말 골치 아프니까.
그래서 시몬이 되물었다.
“될까? 아무리 네가 옆에서 부추긴다고 해도 타이온 후작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은데. 기사단 선에서 막힐 수도 있고.”
“좋은 생각이 하나 있어요.”
“읊어 봐.”
“그 전에 한 가지 사실을 알려 드려야 할 것 같네요. 남부 지역 오크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요.”
시몬은 마치 처음 듣는 사람처럼 라니에리와 시선을 교환했다. 라니에리도 적당히 시몬의 연기를 도왔다.
“오크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면, 뭐 전쟁이라도 일으키려고 한다는 거야?”
“맞아요. 최근에 오크족 영웅이 나타났어요. 그가 흩어진 부족들을 규합하고 있죠. 아주 빠른 속도로. 저는 아주 높은 확률로 오크들이 국경을 넘을 거라고 판단하고 있어요.”
말해선 안 되는 이야기였다. 이 정보 자체가 아크튜러스 가문에게 도움이 될 테니까.
게다가 오크들이 침입할 확률이 높다는 건 타이온 후작에게도 말하지 않은 사실이다.
“근데 이거 어쩌나. 오크 건에 대해선 나도 알고 있는 일인데.”
“알고 계셨다고요?”
“그래. 유능한 부하를 둔 덕분이지.”
라니에리가 영광이라며 고개를 조아렸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포도를 한 알 입에 넣은 시몬이 자리를 진 옆으로 옮겼다.
“오크족 영웅의 이름은 뮬라타. 곧 모든 부족을 규합하고 오크 왕국을 건설할 대단한 친구지.”
시몬은 자신의 정보가 한발 앞섰다는 것을 입증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라니에리에게 의문을 안겼다. 오크족 영웅의 이름까지는 말한 적이 없으니까.
‘이번에도 나를 놀라게 하시는군. 어떻게 알고 계신 거지?’
하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어차피 ‘회귀했으니까’라는 뻔한 대답이 들려올 것을 알기 때문에.
“자, 배신자 친구. 그래서 오크를 빌미로 국경을 개방한다 뭐 이런 시나리오를 쓰려는 건가?”
“일단은 그래요. 함께 오크를 막는다는 그림이면 평화 조약이라는 대명제에도 아주 잘 어울리니까요.”
“라니에리. 네 생각은?”
턱을 괸 라니에리가 곧 답을 내놨다.
“현실적인 조건이라고 봅니다. 공동의 평화를 강조한다면 실현 가능성이 있습니다. 게다가 애초에 공자님은 알데바란 영지엔 별로 관심이 없으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남들이 잘살고 있는 땅 뺏어서 뭐 하냐? 갖다 바치는 거라면 몰라도 전쟁은 좀 아니지.”
진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시몬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알데바란을 접수할 자신감을 보였다.
“좋아. 그럼 평화 조약을 내세워 우리 가문의 군대를 알데바란 남부에 주둔시키는 방향으로 생각해 봐야겠군.”
“말씀하신 대로 준비하겠습니다. 주인님.”
“근데 오크 이야기는 우리도 알고 있는 거라서 그냥 넘어가기는 좀 섭섭하고. 뭐 다른 이야기 없냐?”
진은 목이 타는 듯했다.
반면 옆에 앉은 시몬은 아까 먹다 남은 와인을 잔에 따라 천천히 음미했다. 보란 듯이.
“이를테면 알퐁스 백작가에 대한 이야기라든지.”
의미심장한 한마디에 진의 눈이 반짝였다.
사실, 그녀도 최근 의심하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 알고 계신 걸까요? 최근 저도 알퐁스 가문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접경에서의 소란이 그놈들이 주도하고 있다고 보고 있지.”
진은, 어쩌면 기회가 생길지 모른다는 강렬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진심이실까요?”
“내가 너랑 농담 따 먹기 할 위치는 아니잖아?”
시몬은 새 잔을 진의 앞에다 놓고 와인을 쪼르륵 따랐다.
진에게 한잔 권하며 말했다.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순 없지만, 나는 이번 일로 알퐁스 놈들이 어부지리를 취하려고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 우리 두 가문이 싸우면 서로 큰 피해를 보니까. 그래서 전쟁을 반대한 것이고.”
“과연…… 냉철하신 판단이군요.”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서 알퐁스 놈들을 조종하는 배후가 누구인지도 밝힐 생각이야.”
“배후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걸까요?”
“당연하지. 바람 한번 훅 불면 날아갈 놈들이 무슨 배짱으로 그런 계략을 쓰겠어? 다 비빌 언덕이 있으니까 그러는 거겠지.”
진의 눈빛이 총명하게 빛났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이것은 기회다.
‘듣던 것보다 더 대단한 남자야. 어쩌면……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지독한 패배감이 옅어졌다. 세레스 가문은 전통적으로 기회주의적인 가문이었다.
“그럼, 저도 조사해 보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돌연 시몬의 목소리가 확 바뀌었다. 진지하고 무겁게.
“앞서 말했지만 나는 세레스 가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너희 가문의 역량을 총동원해서라도 이번 일의 배후를 밝히도록. 궁금하지 않아? 배후에 누가 도사리고 있을지.”
“그보다 주인님. 해 보고 싶은 일이 하나 생겼는데요.”
“뭔데?”
“중독에서 하루라도 빨리 풀려나게 하겠습니다.”
“나에게 인정을 받겠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시몬은 흡족하게 웃었다. 거짓 충성은 바라지도 않았다. 원하는 것만 가져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뭐 알아서 하시고. 근데 저 아이 말이다.”
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하녀가 흠칫 놀랐다. 시몬이 그녀를 가리켰다.
“어떻게 해야 돼? 이 모든 사실을 알았으니 없애야 하나?”
라니에리가 조언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까요. 후환을 남기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자 벌떡 일어난 하녀가 찻물이 담긴 찻잔을 라니에리에게 내밀었다.
빨리 독을 타 달라는 강렬한 눈빛을 보내면서.
“마시겠습니다! 제발 저에게도 기회를!”
라니에리는 별말 없이 유리병을 꺼내 마지막 남은 독약을 잔에 탔다. 그리고 하녀는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내용물을 비웠다.
시몬은 재밌다며 손뼉을 쳤다.
“하하하! 아주 충성스러운 부하를 뒀군. 좋아! 마음에 든다. 해약은 보름에 한 번씩, 두 사람 몫을 보내 주지. 라니에리. 문제없지?”
“비용적인 것을 제외한다면 없습니다.”
“전혀 없다는군.”
라니에리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식으로 어물쩍 넘어간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고맙습니다. 주인님.”
“괜히 시간 번다고 충성스러운 부하의 해약까지 탐내진 마라. 주기적으로 목숨 잘 붙어 있나 확인할 거니까 딴생각하지 말라는 소리야.”
“예.”
이로써 세레스 가문의 가주 진은 시몬에게 완전히 코가 꿰이게 되었다.
가문을 잇지 않기로 결심하긴 했으나 시몬의 입장에서 나쁠 건 없었다.
‘나중에 마이너 마을에 정착하면 공물이나 좀 바치라고 해야겠군. 일손이 달리면 밭이나 좀 갈게 시키면 되고.’
어느덧 평온을 찾은 시몬은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루아와 앞으로 함께할 행복한 순간을 상상해 보았다.
‘회귀라는 것도 한 번쯤은 할 만하네.’
* * *
다음 날, 옷을 잘 차려입은 시몬은 알데바란의 주인인 타이온을 접견했다.
이들의 만남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알데바란의 잔뼈 굵은 가신들도 참석하지 못했다. 타이온 후작은 진만, 그리고 시몬은 라니에리만 데리고 나왔다.
겉으로 보기엔 2 대 2. 동수를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엔 1 대 3이었다. 진은 이미 타이온 후작을 배신하고 시몬에게 붙었으니까.
“대륙의 영웅을 이렇게 직접 뵙게 되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인사드립니다. 시몬 아크튜러스입니다.”
시몬이 완벽한 예법으로 인사하자 타이온은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콧대 높은 아크튜러스의 장남이 이렇게 먼저 굽히고 나올 줄이야.
‘왜 이렇게 저자세를 취하지? 어쩌면 이 회담은 우리 쪽으로 유리하게 끝날 수도 있겠군.’
들뜬 마음을 잠시 누그러뜨린 타이온 후작은 너그러운 미소로 응수했다.
“나야말로 미래의 영웅을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게 되어 영광이네. 잘 부탁하네. 시몬.”
“감사합니다.”
“오는 데 불편함은 없었나?”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접경에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지요. 괜찮으시다면 그들을 포상해 주십시오.”
“그대의 청이니 내 응당 받아들여야겠지. 바로 포상을 내리겠네.”
“저 또한 상을 받은 느낌입니다. 감사합니다.”
“하하하하. 부친께서는 잘 지내고 계신가?”
“많이 걱정하고 계십니다.”
조금 모호한 말에 타이온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엇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까?
“접경에서의 충돌이 무의미한 희생으로 번질까 걱정하고 계십니다. 또한, 각하의 건강을 염려하셨습니다. 이제 날이 점점 더워지니까 말입니다. 영웅도 세월을 피해 갈 수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오…… 그게 사실인가?”
“제가 어찌 각하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라니에리는 속으로 감탄했다.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이 있다니. 그것도 가문과 가문이 만나는 회담 자리에서.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시몬의 능숙한 언변은 타이온의 경계심을 너무나도 쉽게 무너뜨리고 있었으니까.
“저희 아버지께서 언젠가 각하를 만나 차 한잔 나눠 마시는 날을 고대하고 계실 거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그거 좋은 일이로군.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네!”
“한번 추진해 보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회담의 결과가 좋아야 했다. 타이온 후작은 사담을 잠시 미뤄 두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진 경에게 대강 이야기는 들었네. 흐음, 평화 협정을 위해 여기까지 왔다지?”
“먼저 각하께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접경의 일은 우리 가문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다소간의 오해가 있으니 양해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허허…….”
마음 같아서는 시몬의 두 손을 잡고 다독여 주고 싶었다. 전혀 오해하지 않았다고.
한편으로는 굳이 조심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히려 이것저것 더 많이 뜯어낼 수 있겠지. 하하하하!’
타이온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어젯밤 시몬과 진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짐작도 하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