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공자는 쉬고 싶다-20화 (20/120)

20화: 역공 (1)

좋은 음식과 좋은 차를 거절하는 귀족은 없다.

특히 대륙의 귀족들은 차에 집착한다. 향이 좋은 차를 으뜸으로 삼았고, 그것을 남에게 대접하는 것으로 세력을 과시하곤 했다.

전장에서 살다시피 한 시몬도 딱히 차를 멀리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인사를 하러 오는 거라면 아까 가신들하고 함께 왔어야 정상이겠지.’

이렇게 늦은 시각, 알데바란 가문의 핏줄도 아닌 사람이 귀빈을 방문했다는 것 자체가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실까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혹시 차향이 좀 별로였을까요?”

차는 이미 주전자에 담겨 나왔다. 살짝 연기가 나고 있었다.

“설마요.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대접해 주시는 차라면 몇 잔이든 마실 수 있습니다.”

“황녀님께서 들으시면 서운해하시겠는데요?”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해 주십시오.”

“어머나.”

시몬은 은은히 웃으며 호감을 보였다. 진도 눈웃음으로 그 미소에 화답했다.

“가신들 사이에서 공자님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답니다. 너무나도 겸손하고 인자하신 분이라고 말이에요.”

“감사한 일이군요.”

“제가 보기에도 멋진 분인 것 같아요. 진즉 알데바란 영지로 초대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하지만 그걸 결정하는 것은 후작 각하겠지요. 게다가 우리 가문과는 예전부터 얽힌 일이 많지 않습니까?”

“과거는 미래를 보여 주는 거울과도 같은 것이지요. 하지만 거울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발전이 없는 법 아니겠어요?”

“과연.”

대단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과오는 잊고 새 출발을 하자는 말을 이렇게도 쉽게 할 줄이야.

“식기 전에 한번 맛보시겠어요?”

“좋습니다.”

하녀가 트레이에서 찻잔을 들어 시몬과 라니에리 앞에 각각 놓았다. 맞은편에 앉은 진의 자리에도 하나 놓았다.

하녀의 역할은 그것으로 끝.

주전자는 진이 직접 들었다. 바닥이 펑퍼짐한데 위로 올라올수록 좁아지는 구조였다.

찻물이 나오는 입구는 위로 길게 휘어져 있어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했다.

“특이한 주전자군요.”

“이것도 동방에서 온 상인에게 산 거랍니다. 이 방의 향초를 판 상인에게서요.”

“나중에 저에게도 좀 소개해 주십시오.”

“이런 쪽에 관심이 많으실 줄은 몰랐네요.”

쪼르르륵―

노르스름한 찻물이 찻잔에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어 라니에리의 잔도 채워졌다.

마지막으로 진은 자신의 잔에 찻물을 채웠다.

바로 그때.

끼릭.

찻물이 흘러내리는 소리에 절묘하게 가려진 아주 작은 소리가 시몬의 청각에 잡혔다. 은은하게 끌어올린 오러 덕분이었다.

“라니에리. 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군.”

진은 시몬의 속도 모른 채 미소를 짓고 있다. 그리고 어서 마셔 보라는 듯 손짓했다.

하지만 시몬은 찻잔을 들지 않았다.

“아까 했던 이야기 기억나? 방치된 음식에 독을 타는 건 너무 고전적인 방식의 독살이라고 한 거.”

“기억납니다.”

라니에리가 찻잔을 들려고 했다. 하지만 시몬은 손을 뻗어 그가 들지 못하게 했다.

“공자님?”

“너라면 어떻게 한다고 했었지?”

“……전혀 의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시도할 거라고 했습니다. 같은 병에 담긴 와인을 나눠 마신다든지?”

그때 라니에리의 손이 뚝 멈췄다.

“설마.”

현명한 라니에리는 차분히 찻잔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시몬을 응시했다.

“와인만 나눠 마실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렇죠.”

“예전에 한번 본 적이 있거든. 아주 작은 장치가 달린 주전자인데, 살짝 누르면 안에 있는 장치가 작동하면서 물길이 달라지는 거지.”

“저도 들은 적 있습니다. 암살자들이 종종 쓰는 도구이기도 하죠.”

그 말에 진이 흠칫 놀랐다.

재빨리 주전자를 향해 손을 뻗으려 했지만 시몬의 손이 좀 더 빨랐다.

서걱!

빛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휘둘러졌고, 쩍 소리와 함께 주전자가 세로로 쪼개졌다.

촤르르!

주전자가 깨지며 찻물이 쏟아졌다. 시몬은 정확히 반으로 쪼개진 주전자의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하여간 이 자식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네. 잊고 있었던 아련한 추억들이 떠오르는군.”

세레스 가문.

겉으로는 고상한 척하지만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아주 비열한 가문이었다.

전생에서 알데바란을 토벌하며 세레스 가문의 비열함을 뼛속까지 알게 된 시몬이었다.

그때는 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가주였지만, 가풍이라는 게 그리 쉽게 바뀌는 건 아니다.

“이봐. 진. 한 주전자 안에 차를 넣을 수 있는 공간이 두 개나 있는데? 뭔가 이상하지 않아?”

“…….”

“내가 그 속임수를 놓칠 줄 알았나? 아크튜러스의 장남을 너무 얕봤군.”

말투가 확 바뀌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시몬은 진의 눈 앞에 주전자의 단면을 보여 주었다.

“안쪽에 있는 공간엔 맛있는 차를, 바깥쪽에 있는 공간엔 독약을 넣었겠지? 아니면 반대이거나.”

“모함이에요!”

“모함인지 아닌지는 네가 입증해야 할 문제지. 왜 이 상황에서 오해받을 짓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주인님! 제가!”

하녀가 밖으로 달려 나가 경비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빠르게 시몬의 손이 움직였다.

슉!

터엉!

“히, 히익!”

하녀가 오금을 저리며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가 나가려던 문에 단검이 정확히 박힌 것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였다면 목덜미에 칼침이 박혔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죽을 줄 알아라. 나 진심 화났으니까.”

라니에리가 문을 안쪽에서 걸어 잠갔다.

동시에 시몬은 손에 들고 있던 주전자를 집어 던지고, 자신의 앞에 놓여 있던 찻잔을 진의 앞에 들이밀었다.

“자, 아가씨. 어디 좋은 차인지 아닌지 한번 직접 마셔 보실까?”

“제가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오해예요! 이 차엔 아무것도…….”

“왜 그렇게 말이 많아? 아니면 그냥 마시면 될 거 아냐.”

“무례하군요.”

시몬은 헛웃음을 지었다.

설령 차에 아무것도 섞이지 않았더라고 해도, 이런 주전자를 써서 손님을 대접하려 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라니에리. 내가 열병으로 쓰러져 있는 동안 무례라는 단어의 쓰임이 바뀌거나 그런 건 아니지?”

“전혀 아닙니다.”

“지금 누구 앞에서 그딴 표현을 쓰는 거야? 바로 목을 날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지.”

“마, 마시겠어요! 만약 제가 마신다면…… 제대로 사과하도록 하세요.”

시몬은 비릿하게 웃었다. 그가 문 쪽으로 손을 휘젓자 박혀 있던 단검이 날아와 그의 손에 쥐어졌다.

착!

짧은 칼날이 진의 목에 닿았다.

마치 선을 긋듯, 검날이 아슬아슬하게 등 쪽으로 내려갔다. 검날은 어깨를 지나 드레스를 조이고 있던 끈을 잘라 냈다.

툭.

또 하나가 잘렸다.

하나만 더 잘리면 치부가 노출될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칼날의 목적은 남은 끈을 잘라 내는 게 아니라 심장을 겨누는 것이었다.

“당연히 목숨을 버리는 것보단 마시는 걸 택하겠지. 극약이 아니라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약을 섞었을 테니까. 차를 대접했는데 상대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그런 뻔한 일은 너희 가문과는 어울리지 않잖아? 아마도 일정 주기로 해약을 먹지 않으면 장기가 녹아내린다든지 하는 그런 약이겠지. 그렇게 나를 꼭두각시로 만들어 아크튜러스 가문을 쥐고 흔든다. 그게 네 계획 아냐?”

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완전히 간파당했다.

이 현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성공을 확신했었는데.

그때 뒤에서 라니에리가 충고했다.

“어차피 먹여도 소용없을 겁니다. 레이디께서는 해약을 만드는 법을 알고 있을 테니까요.”

“완전 해약은 없을걸? 내가 세레스 가문에 대해선 좀 알거든. 효능에 집착하게 되면 생기는 부작용이라고 할까. 그렇지?”

진은 침묵했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그때, 시몬의 머릿속에서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윽고 그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걸렸다.

“라니에리. 너 독약 가지고 다니지? 베텔게우스 가문의 비전.”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떻게 아는지 매번 말하기도 입 아프다.”

라니에리가 품에서 작은 나무 상자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작은 유리병에 담긴 투명한 액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까지도, 라니에리는 이 약의 정체에 대해 말한 적이 있나 생각했다.

“아까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약과 비슷한 작용을 하는 약물입니다. 일정 주기로 해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다리서부터 점점 몸이 썩어들어 가는 독이죠.”

“역시 충성스러운 아크튜러스의 가신답군. 경의를 표하지.”

라니에리가 병을 던졌고, 무색무취의 독약이 개봉되어 찻잔에 섞여 들어갔다.

시몬이 다시 차를 권했다.

“한 방울도 남김없이 싹 비워라.”

진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마치 악마가 현신한 것 같은 느낌.

이 이상 시간을 끌다간 칼날이 심장을 파고들 것 같았다.

결국 진은 찻물을 천천히 들이켰다.

“……크윽!”

“엄살은. 라니에리. 해약을 먹어야 하는 주기는?”

“보름입니다.”

이제 문을 잠글 필요도, 진을 통제할 필요도 없어졌다.

“보름이 될 때마다 이 여자에게 뭘 시킬까?”

화들짝 놀란 진이 흘러내리려던 옷을 끌어 올렸다. 그러곤 벌벌 떨며 뒤로 물러났다.

“아아, 오해하진 말고. 흉한 일은 안 시킬 거니까. 그래도 꼴에 귀족인데 목욕 시중을 들게 할 수는 없지.”

“이건 어떻습니까? 공자님. 일정 주기로 알데바란 가문의 기밀을 제공받는 겁니다. 세레스 가문의 가주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겁니다.”

“좋은데?”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여러 가지였다. 알데바란 가문의 자금 입출처. 그리고 군사적 요충지. 알데바란 상단의 업무 기밀 등.

“일단 알데바란 가문이 황실의 누구에게 뇌물을 바치고 있는지 좀 볼까?”

“그, 그건……!”

진의 모호한 태도를 지켜보던 라니에리가 조언했다.

“공자님. 일단 충성 서약부터 받으시지요. 레이디께서 아직 자신의 위치를 잘 모르시는 것 같군요.”

“그래야겠군. 들었지? 네가 마신 독은 베텔게우스 가문의 비전이다. 내 허가 없이는 해약도 없다는 말이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진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굴욕적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세레스 가문의 진…… 새로운 주군께 영원한 충성을…… 맹세합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해라. 오히려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라고. 또 누가 알아? 열심히 하면 완전 해독약을 줄지.”

시몬의 한쪽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물론 잘한다고 해서 해약을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아직까지는.

“그보다 너, 메르세데스 황녀랑 친하냐?”

“전혀 교류가 없습니다.”

“거짓말하면 죽어. 팔다리 썩는 걸로 안 끝난다고.”

“지, 진짜예요! 정말로 교류한 적 없어요!”

진은 절망적으로 부르짖었다.

“이 어마어마한 계획을 세레스 가문이 독단으로 기획한 거라고?”

“알데바란 가문에서도 알지 못합니다. 오로지 저의 판단으로…… 벌인 일이에요.”

“확실해?”

“예, 예! 제 목숨을 걸고 맹세합니다!”

시험하듯 진을 빤히 바라보던 시몬은 한참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메르세데스 황녀와의 관계는 없어 보였다.

“좋아. 알데바란의 기밀은 천천히 받는 걸로 하고…… 아, 그렇지. 우리 가문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면 알데바란에선 뭘 줄 수 있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