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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공자는 쉬고 싶다-19화 (19/120)

19화: 알데바란으로 (2)

웅장한 성이 눈앞에 펼쳐졌다.

뒤로는 절벽이 있어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천혜의 요새.

그 앞으로 알데바란의 기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갖추고 있었다.

부우우우!

아크튜러스 가문의 마차가 가까이 다가오자 나팔이 울렸다. 이윽고 선두에 선 사람들이 마중을 위해 앞으로 다가왔다.

창문을 연 시몬은 그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알데바란성을 눈에 담기만 했다.

“이야, 정말 오랜만이군. 역시 언제 봐도 멋진 성이란 말이지.”

“와 본 적이 있으십니까?”

“전생에서 왔었지. 꽤 오래전 일이야. 알데바란 영지를 점령하고 입성했을 때였지. 아주 끝내주는 전투였다고.”

“또 회귀 타령이군요.”

“하늘 같은 도련님한테 타령이 뭐냐 타령이?”

곧 마차가 멈춰 섰다. 시몬은 사뿐히 마차에서 내렸다. 이미 마중을 나온 알데바란 가문의 사람들은 말에서 내린 뒤였다.

그들을 대표해 진이 망사를 걷고 얼굴을 드러냈다.

시몬은 살짝 놀랐다. 그 놀람의 의미를 눈치챈 진은 눈웃음을 지었다.

“어서 오십시오. 시몬 공자님. 알데바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멀리 마중을 나가지 못한 점, 용서하시길.”

“이런 미인이 알데바란에 있었다니 놀랍습니다. 존함이?”

“세레스 가문의 진이에요.”

“진. 그대가 소문의 주인공이군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소회를 밝히기엔 적당한 자리가 아니군요.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의외로 시몬은 점잖게 굴었다. 옆에 있던 라니에리는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다고 확신했다.

모시던 주인은 미인이 있다고 헤벌쭉거리는 천박한 사람이 아니었다.

틈이 있으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칼을 내지르는 냉혈한에 가까웠다.

열병을 앓고 난 이후로 성격이 좀 변하긴 했지만 말이다.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쉴 곳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급하지 않으시다면 내일 후작 각하를 만나 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럴까요? 그래도 좀 아쉬운데요. 알데바란의 가주님은 대륙에서 명성이 자자하지요. 제일 먼저 인사드리고 싶었습니다만.”

“어머, 영광입니다. 공자님.”

그 한마디에 뒤에서 대기하던 가신들이 흠흠, 소리를 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만족스럽다는 태도였다.

그들을 바라보며 시몬이 웃었다.

‘그래. 이 순간을 즐겨라. 조만간 아주 끔찍한 날을 맞이하게 될 테니까.’

지금 궁지에 몰린 것은 알데바란이었다. 시몬은 이들이 남부 오크에 대한 정보를 숨기거나 아직 모르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만약 오크족이 움직였다면 이렇게 한가하게 마중이나 나오진 않았겠지.’

그렇다면 천천히 즐겨 줄 생각이었다.

오크 영웅 ‘뮬라타’가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질 때까지.

“그럼 쉴 만한 곳으로 안내 부탁합니다.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멀끔한 얼굴로 각하를 알현하겠습니다.”

“자, 이쪽으로 오시죠.”

진은 몸소 시몬 일행을 성안으로 안내했다. 규모가 상당한 곳이었기에 내성까지는 꽤 걸어야 했다.

그녀는 멋진 조각상이나 그림이 나올 때마다 그것을 설명했다.

그러다 자연스레 라니에리와 말을 트게 되었다.

“라니에리 님, 맞으시지요?”

“예.”

“말씀 많이 들었답니다.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요. 대륙의 역사를 바꿀 만한 다섯 명의 인재를 뽑을 때 꼭 들어가는 분 중 하나시죠.”

“호사가들의 농담일 뿐이지요.”

“어머, 겸손하시기까지.”

내면에는 너무 잘생긴 것이 아니냐 하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라니에리는 선수답게 그 호감 어린 시선을 마다하지 않았다.

“뭔가 이야기할 게 많을 것 같군요. 대화가 잘 통할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여인의 몸으로 가문을 잇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요.”

“따로 시간 내주실 거죠?”

“물론이지요.”

보다 못한 시몬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쿡, 하고 라니에리의 옆구리를 찔렀다.

‘야, 그러다 잡아먹힐라. 정신 똑바로 안 차려?’

‘상대를 방심하게 하는 기본적인 책략입니다. 염려 놓으시길.’

‘책략은 쥐뿔. 내 이럴 줄 알았다.’

‘회귀하신 분이니 아셨겠지요.’

‘이런 미래는 없었다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걸음을 멈춘 진이 돌아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실까요? 소리가 들려서.”

“하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시죠!”

곧 시몬은 아주 근사한 응접실로 들어갔다. 테이블엔 귀한 과일이 놓여 있었고, 먹음직스러운 술도 준비되어 있었다.

“으음, 향이 굉장히 좋군요.”

“마음에 드실까요? 동방에서 온 향초랍니다. 심신을 안정시켜 주는 효과가 있죠.”

“역시. 알데바란 가문은 기품이 넘치는군요. 손님을 대하는 걸 보면 그 가문의 수준을 알 수 있다 들었습니다. 돌아가면 꼭 아버지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자, 그럼 편히 쉬시길.”

사람들이 모두 나갔다.

시몬은 기감을 끌어올렸다. 혹시나 잠복이 있지 않을까 찾아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너무 무방비인데? 은신 좀 하는 애들이 하나쯤은 있어야 제격인데.”

“공자님이 오러 유저인 걸 아는데 누가 그런 모험을 하겠습니까?”

“오러 유저라고 해서 다 은신을 잡아낼 수 있는 건 아니지.”

“친절을 베푸는 건 당연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크튜러스의 장남이시지 않습니까?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황도에서도 소문이 자자하겠지요.”

“그것치고는 너무 수상하단 말이지. 미인계인가?”

“그건 아닐 겁니다.”

“왜?”

“공자님의 별명 중 호색한이라는 건 없으니까요.”

“…….”

시몬은 또 어떤 별명이 있는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어때 보이디?”

커튼 사이로 밖을 내다보며 라니에리가 말했다.

“별다른 움직임은 없는 것 같습니다. 오크들이 움직임을 보이는 것치고는 너무 평화로운 느낌이군요.”

“잘 참고 있는 거겠지. 속은 타들어 갈걸?”

“무엇을 요구하실 생각이십니까?”

“대륙의 평화.”

의미심장한 한마디에 라니에리는 검지로 안경을 슥 밀어 올렸다.

“평화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너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협정을 맺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왜 사정을 봐주고 그래? 그새 진이라는 여자한테 푹 빠진 거냐?”

“매력적인 여인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에 차는 것도 아닙니다.”

“네 마음에 차는 여자가 있긴 해? 하, 이거 아끼던 부하에게 암살당하게 생겼군. 기왕 죽일 거면 고통 없이 보내 줘라.”

“…….”

“왜 반론을 안 하는데?”

“너무 어처구니없는 말씀이라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소파에 앉은 라니에리가 잘 익은 포도 쪽으로 손을 뻗었다. 시몬이 경고했다.

“조심해. 독 들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제가 먼저 먹어 보려는 겁니다. 공자님께서 중독되면 안 되니까요.”

“충신 납셨네 아주.”

“음, 맛있군요.”

라니에리는 포도를 계속 따 먹으며 말했다.

“방치된 음식에 독을 타는 건 너무 고전적인 방식의 독살법입니다. 괜히 덜미 잡히기 딱 좋지요. 만약 저라면 다른 방식으로 했을 겁니다.”

“어떻게?”

“전혀 의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시도하겠죠. 가령 같은 병에 담긴 와인을 나눠 마신다든지.”

“많이 해 본 사람처럼 이야기하네.”

“설마요.”

“내가 열병 앓은 것도 혹시 네가 사주한 일 아니야?”

“언젠 황녀님 때문이라면서요?”

“그건 그냥 핑계지.”

라니에리는 고개를 슬쩍 돌리더니 우아하게 포도씨를 뱉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놈들은 독살이라는 방법을 쓸 수 없을 겁니다. 오히려 공자님을 잘 달래서 돌려보내는 것이 가장 상책이니까요.”

“그렇겠지. 지금은 딱히 손쓸 방법이 없으니.”

그제야 맞은편에 앉은 시몬도 포도를 집었다. 라니에리의 말이 맞았다. 새콤하니 맛있었다.

그때 밖에서 노크가 들렸다.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은 알데바란의 후계자들이었다. 장남과 차남, 그리고 삼남까지 찾아와 시몬에게 정식으로 인사했다.

“아아, 반갑습니다. 또래처럼 보이는데 앞으로 친하게 지내지요.”

“시몬 님과 친하게 지낼 수 있다니 꿈만 같군요!”

“무슨 님이라고 부르십니까? 그냥 형이라고 부르세요. 아니지, 한 살 차이는 우스운 건데 그냥 친구 할까?”

“하하하하하!”

화기애애한 대화들이 이어졌다.

라니에리는 내심 놀랐다.

‘이렇게 사교적인 분은 아니었는데?’

연기를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시몬은 솔직하고 직설적인 사람이었으니까.

‘설마…… 진심인가?’

형이라고 부르라는 것까지는 어떻게든 고개를 끄덕였겠지만, 그냥 친구 하자며 편하게 말을 하는 것은 정말 의외였다.

알데바란의 후계자들이 물러가고 이번에는 중신들이 찾아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시몬은 먼저 머리를 굽히는 것에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경들께 인사 올립니다.”

그러다 보니 시몬을 잔뜩 경계하던 가신들의 마음이 풀어질 수밖에 없었다. 듣던 것과는 완전 다른 사람이었다.

“정말 시몬 공자님이 맞으십니까?”

“예. 맞습니다. 가문의 징표를 보여 드릴까요? 잠시만요. 여기에 있었는데…….”

가신들이 깜짝 놀랐다.

“아이고! 아닙니다. 그런 의미로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사자의 심장을 가진 용맹한 분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너그러운 분일 줄은 상상도 못 해서 그렇습니다.”

“하하하! 사자의 심장이라. 그런 이야기도 나쁘진 않군요.”

“기회가 된다면 공자님과 대련을 해 보고 싶소이다.”

“저는 아직 부족해서 누구와 검을 겨룰 정도는 아닙니다.”

“허어…….”

지나친 겸손이었지만 가신들은 기분이 좋아졌다. 속셈은 다르더라도 겉으로 이렇게 겸양을 부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크튜러스 가문의 미래가 정말 밝아 보이는군요. 기대됩니다.”

노련한 가신이 그렇게 추켜세웠다. 시몬은 가문을 잇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만약 그 소식이 드뇌브 후작에게 들어가게 된다면 낙향이 아니라 유배될 테니까.

한껏 떠든 가신들이 돌아갔다.

저녁 식사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시몬은 ‘정말 맛있군!’을 연발하며 차려진 음식을 모두 먹어 치웠다.

“가끔은 이렇게 바람도 쐴 겸 다른 가문에 놀러 다니고 해야겠어.”

“주인님께서 매우 기뻐하실 겁니다.”

“그냥 해 본 말이야.”

그날 마지막으로 찾아온 손님은 다름 아닌 세레스 가문의 가주, 진이었다.

하녀를 한 명 데리고 나타났다. 그리고 하녀는 고급스러운 다기가 놓인 트레이를 끌고 있었다.

시몬도 라니에리도 처음 보는 희한한 문양의 다기였다.

실용성보다는 디자인을 따져 만든 것 같았다.

“식사는 입에 맞으셨는지 모르겠네요.”

“솔직히 감탄했습니다. 아크튜러스의 주방장들을 모조리 견학시키고 싶을 정도였지요.”

“다행이군요. 괜찮으시면 차 한잔 어떠실까요? 귀빈께 어울리는 아주 귀한 차를 준비했답니다.”

“마다할 이유가 없군요. 들어오시죠.”

시몬은 흔쾌히 자리를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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