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루아 (4)
둘만 남자 조금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하지만 루아는 천성이 해맑은 사람이었다. 이내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걸어왔다.
“혹시 어떤 음식을 좋아하시나요? 너무 비싼 건 대접해 드리지 못하지만, 그래도 말씀해 주세요.”
전생에서 루아와 교제할 때 안 먹어 본 음식이 없다. 그녀를 만날 땐 늘 서민식을 고집했으니까.
회귀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음식을 먹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녀와 얼마나 알차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느냐가 중요했다.
“굳이 자리를 옮길 필요는 없겠군요. 이곳에서도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것을 팔고 있으니까요. 전망도 좋고, 무엇보다도 조용한 게 좋네요.”
“맞아요. 너무 소란스러우면 이야기 나누기가 좀 힘드니까요. 그럼, 여기서 먹어요.”
“괜찮으시면 제가 메뉴를 좀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만.”
“좋아요.”
루아는 얼굴이 발그레해진 채 손을 무릎에 모았다. 시몬은 손가락을 튕겨 웨이터를 불렀다.
시몬은 루아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다 알고 있었다.
‘뭐든 잘 먹지만 특히 샐러드를 곁들인 닭요리를 좋아했었지.’
능숙한 말투로 주문을 마치자 루아의 눈이 한차례 반짝였다.
“이런 곳에 자주 오시나 봐요.”
“아무래도 영업을 하다 보니 손님을 만날 기회가 많습니다. 접대는 기본이니까요.”
“아, 접대요.”
“지금은 물론 아닙니다. 마음씨도 고우신 레이디와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것은 저로서도 굉장히 기쁜 일이지요.”
‘레이디’라는 표현에 루아가 살짝 놀랐다.
평민으로 살면서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저기, 사이먼 님. 너무 띄워 주지 않으셔도 돼요. 과분하네요.”
“아닙니다.”
단호히 선을 그은 시몬이 깍지 낀 두 손으로 턱을 괴곤 몸을 앞으로 살짝 내밀었다.
“저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봐 왔습니다. 사람의 진가는 외모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죠. 눈빛, 말투, 몸짓…… 그것만 봐도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전생에서 아크튜러스 가문의 가주로서 수많은 전쟁을 치렀고, 수많은 사람을 만났었다. 자연스레 체득된 기술이기도 했다.
그 기억을 가지고 고스란히 과거로 회귀했으니 사람 보는 눈 하나는 기가 막힐 수밖에.
“제 눈빛이 어떤데요?”
“눈부십니다. 마주 보기 어려울 만큼. 아우엘리 대성당의 여신상이 내뿜는 빛보다 더욱 찬연하게.”
“…….”
루아는 부끄러운 마음과 설레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도저히 평민의 화법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을 설레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당연하지. 이미 한번 만나 본 사인데.’
겸손하면서도 때로는 솔직한 모습이 그녀에게 잘 통할 거라고 생각했다.
둘만 있는 자리에서 굳이 거리감을 둘 필요는 없으니까.
“어, 그게…… 너무 부끄럽네요. 이런 말은 처음 들어서요. 감사해요.”
“감사하시면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떤 부탁일까요?”
“직접 만드신 빵을 한번 먹어 보고 싶네요.”
“빵이요?”
자연스레 화제가 넘어갔다. 시몬은 능숙하게 제빵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갔다.
“지금은 아버님과 폴렌 씨가 빵을 만들고 있다곤 하지만, 언젠가 루아 양도 가업을 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빵을 직접 만드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텐데요.”
“맞아요. 하지만 아버지는 아직 생각이 없으셔서요.”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시몬은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그래도 물었다.
“음…… 제빵 일이 쉽지 않아서요. 손이 거칠어질 거라고. 힘드니까 하지 말라고 하셔요.”
“그래도 누구보다도 빵에 대한 열정이 있지 않으십니까?”
“어떻게 아셨어요?”
“방금 제 부탁을 말씀드렸을 때 눈빛이 반짝이더군요. 흥미를 느끼신 게 분명하다고 생각해서.”
전생에서 얻은 정보였다. 실제로 루아는 아버지 몰래 빵과 쿠키를 만들어 시몬에게 주곤 했었다.
“뭔가 사이먼 님은 제 마음을 들여다보고 계신 것 같아요.”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리죠.”
“전혀요. 마음이 잘 맞는 친구랑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거의 초면인데도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걸 보면요.”
“다행이군요.”
그때 주문한 요리가 나왔다.
통째로 구워 낸 닭고기 요리와 샐러드. 그리고 간단히 먹을 수 있는 핑거스낵과 와인 두 잔이었다.
루아의 시선이 와인을 향했다.
뭔지 잘 모르겠다는 듯한 눈빛이다.
“와인은 잘 드십니까? 마침 좋은 와인이 들어와 있는 것 같아서 시켰습니다.”
제대로 과거로 돌아왔다면, 루아는 한 번도 와인을 입에 대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킨 이유는 처음 와인을 맛본 루아의 표정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아뇨. 주스인 줄 알았는데 와인인가 봐요. 처음이에요. 술…… 괜찮을까요?”
“그리 센 와인은 아닙니다. 향을 깊게 음미해 보시고, 혀를 살짝 적시는 정도만 마셔 보세요.”
“앗, 네. 근데 이 음식…….”
통째로 구워져 나온 닭을 보고는 막막한 표정을 짓는 루아. 서민은 구경하기 힘든 요리다. 이렇게 정갈하게 차려 먹진 않으니까.
포크와 칼을 든 시몬은 살짝 오러를 일으켰다.
닭이 빠른 속도로 해체되기 시작했다.
슥. 스스슥.
전직 소드 마스터의 칼질은 조금의 손실도 없이 닭을 해체해 냈다. 시몬은 포크와 나이프로 통통한 살점을 집어 루아 앞에 덜어 주었다.
“우와…… 엄청 맛있을 거 같아요!”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한번 드셔 보시죠.”
“네! 사이먼 님도 어서 드세요. 제가 잘라 드렸어야 하는 건데.”
“괜찮습니다.”
고기를 다시 한번 작게 잘라 입 안에 넣은 루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 그래도 큰 눈이 더욱 크게 떠졌다.
“너무 맛있어요…… 어떻게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는 걸까요?”
“하하하. 입맛에 맞으시다니 다행이군요.”
“이 샐러드도 너무 신선해요. 소스도 처음 맛보는 거고요.”
“발사믹입니다. 포도주로 만드는 것인데, 올리브유와 곁들이면 빵하고도 아주 잘 어울리죠. 남부 지방에서는 많이들 먹지만 이곳에서는 좀 보기 드물지요.”
“정말 그래요. 저희 집 빵에 찍어 먹으면 정말 맛있을 거 같아요.”
“계약이 잘되면 저희 상단에서 따로 공급해 드리겠습니다.”
“진짜요?”
루아는 입 안에서 퍼지는 행복감을 환한 웃음으로 표현해 냈다. 당연히 아크튜러스의 장남 입장에서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라니에리에게 말 한마디만 하면 끝나는 일이다.
“다만 소스의 단가가 조금 비싸니 나중에 고급화 전략으로 판매하면 좋을 것 같군요.”
“아, 그건 아버지와 한번 상의해 봐야겠어요.”
“지금은 음식에 집중하시죠.”
시몬이 와인 잔을 들었다. 루아도 어색하게 잔을 들었는데, 눈을 깜빡이며 시몬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건배하실까요?”
“아, 건배요. 죄송해요. 제가 이런 건 처음이라서…….”
“괜찮습니다.”
쨍!
두 사람의 잔이 부딪쳤다. 동시에 루아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음식의 황홀한 맛도 그렇고, 와인으로부터 느껴지는 감미로운 향도 그렇지만 뭔가 계속 끌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성으로부터 느끼는 감정은 아니었다.
기시감.
아무리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다닌다고 하지만, 그것 이상의 익숙함이 있었다.
‘마치 오래도록 알고 지낸 분 같아.’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그런데 불현듯, 루아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앗, 이거…… 얼마나 비싼 거지?’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한 것은 루아 자신이었다. 넉넉하게 돈을 들고 오긴 했는데 와인까지 마셨다. 이걸 다 지불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안색이 어두워지셨습니다.”
“아, 아뇨…….”
“계산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식사비는 제가 지불할 겁니다.”
참 신기한 일이다.
이번에도 마음을 들키고 말았다.
“하지만 대접하겠다고 한 건 저였는데요. 사이먼 님께서 식사비를 내시는 건 좀 실례인 것 같아서…….”
“루아 양께서는 이미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제가요?”
“시간.”
잔을 들고 와인을 한 모금 넘긴 시몬이 루아를 은근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상인들은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합니다. 시간이 곧 금이다…… 루아 양께서 이렇게 귀한 시간을 내주셨는데 어찌 식사비가 아깝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도요.”
“정 마음에 걸리시면 아까 제가 드린 부탁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시면 고맙겠군요.”
“그건 어렵지 않아요.”
루아는 결심했다.
아버지에게 조금 잔소리를 듣더라도 빵을 한번 만들어 보기로.
“저기…… 보름 뒤에 오신다고 하셨죠? 그때 제가 만든 빵을 드릴게요. 대신 맛은 보장 못 해요.”
“영광이군요.”
이번에는 좀 더 작게 썰린 닭고기를 루아의 앞접시에 덜어 주었다.
“자, 어서 드십시오. 소개할 요리가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요.”
* * *
루아와 헤어진 시몬은 숙소로 돌아왔다. 라니에리는 아직 폴렌을 만나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정말 꿈같은 시간이었어.’
침대에 드러누운 시몬이 씨익 웃었다. 모든 게 완벽했다. 분위기도, 음식도, 대화도.
‘조급해하면 안 된다. 좀 더 천천히 다가가는 거야. 루아가 부담감을 느끼지 않게끔.’
이것으로 걱정을 조금 덜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에 적당히 명분도 만들어 뒀으니 황녀의 마수가 뻗치진 않겠지.’
시몬은 황녀가 사람을 보내 감시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보름 뒤면 루아의 빵집과 아크튜러스 상단이 정식 계약을 체결할 것이기 때문에.
‘루아를 빵집 대리인으로 세우고, 너무 튀게만 대하지 않으면 돼.’
이제 남은 문제는 알데바란 가문과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 알퐁스 백작가의 책략을 파훼시키는 것이다.
‘최대한 빨리 알데바란으로 간다. 보름 내에는 돌아와야 하니까.’
가는 도중 어떤 변수가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서두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빨리 결과를 가지고 돌아와야 급진적인 기사들을 달랠 수 있을 터.
때마침 들어온 라니에리에게 명했다.
“내일 오전에 바로 떠날 거니까 준비하도록.”
“바로 가시려고요?”
“왜? 뭐 문제라도 있냐?”
“제가 아는 공자님이라면 침대에서 사나흘 정도는 더 지내셔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사나흘이나 지낼 정도로 그리 푹신하진 않아.”
“동감합니다.”
너무 쉽게 긍정하는 그 모습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라니에리는 오늘 너무나도 큰 공을 세웠다.
“아깐 고마웠다. 역시 여자를 유혹하는 능력은 너를 따라갈 사람이 없을 거야.”
“잘된 모양이군요.”
“나름?”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공자님의 말씀을 좀 정정하고 싶군요. 저는 아크튜러스 가문과 공자님을 위해 일할 뿐입니다. 유혹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 말 할 거면 어깨에 붙은 머리카락은 좀 떼고 말하든가?”
라니에리의 시선이 왼쪽 어깨를 향했다. 누가 봐도 여자의 머리카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금발 한 가닥이 걸려 있었다.
“흠흠.”
헛기침을 한 라니에리가 어깨를 툭툭 털었다. 시몬이 피식, 비웃었다.
“무슨 짓을 하면 어깨에 머리카락이 남는 건지 모르겠네.”
“신규 점포에 대한 건설적인 대화였습니다.”
“폴렌 씨와 같이 간 거 아니었어?”
“맞습니다. 옆 점포에서 일하는 분께 잠시 도움을 받았습니다. 괜찮은 꽃집이 있더군요.”
“꽃집 여자를…… 진짜 너도 대단한 놈이야.”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신규 점포 입점에 대한 건설적인 조언을 받았을 뿐입니다.”
“알았어. 알았다고.”
손을 휘휘 내저은 시몬은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크튜러스의 장남이 알데바란 영지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이 타이온 후작에게 전해진 것은 바로 그 무렵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