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루아 (3)
루아는 아크튜러스 상단 사람들을 종종 상대해 왔다. 그래서 시몬이 내미는 것이 진짜 상단의 표식임을 바로 알아보았다.
아크튜러스 상단.
아크튜러스 후작가에서 운영하는 거대 상단으로, 대륙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단 중의 하나다.
당연히 홈그라운드인 아크튜러스 영지에서는 그 어떤 상단보다도 세력이 크다.
빵집 운영도 크게 보면 상업 활동이다.
거대 상단에서 투자하고 싶다고 한다. 거기에 좋지 않은 상황에서 도움도 받았다. 당연히 시몬에 대한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투자……요?”
“조금 뜬금없는 말이었지요?”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투자를 해 주겠다고 하신 분은 처음이라서요.”
시몬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아버님의 기술에 투자하고 싶다는 겁니다. 아버님의 빵은 보통이 아니지요. 분점을 내면 분명히 잘될 겁니다.”
“정말요?”
“모험가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더군요. 그 집 빵 맛은 던전에 들어가 보면 확실히 알게 된다고. 저도 동감합니다.”
극찬 중의 극찬이었다. 위급한 상황에서 떠오르는 것만큼 멋진 음식이 또 어디 있을까?
당연히 루아의 경계심이 풀어지며 미소가 걸릴 수밖에.
“음, 감사한 말씀이지만 그건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숙부님과 이야기를 좀 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좋습니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내일 오전에 뵙는 건 어떨까요? 이 근처에 괜찮은 찻집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럼 열 시쯤 거기서 봬요.”
“그러지요.”
꾸벅 인사한 루아가 돌아가려다가 흠칫 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앗, 죄송해요. 존함을 여쭤보지도 않았네요. 실례지만 성함이…….”
“사이먼입니다.”
“사이먼 님. 멋진 이름이네요. 제 이름은 루아랍니다.”
“루아 양도 예쁜 이름을 가지고 계시네요.”
“감사해요.”
밤하늘을 밝히는 달처럼 예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시몬은 조금 서둘러서라도 이쪽으로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 * *
“완전 선수시더군요.”
숙소로 돌아온 라니에리가 제일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시몬은 피식 웃으며 허리춤에 걸어 두었던 검을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굼벵이 앞에서 주름잡아서 미안하군.”
“설마요. 만약 저라면 그렇게 접근하지 않았을 겁니다. 좀 더 직관적인 방법을 썼겠죠. 굉장히 자연스러운 접근이었습니다. 상대의 경계를 누그러뜨리는 아주 좋은 방법이기도 했지요.”
“칭찬하는 거야 까는 거야?”
“당연히 칭찬입니다.”
기지개를 켠 시몬이 침대에 드러누웠다.
저택에 있는 전용 침대만큼은 아니었지만 딱딱한 마차에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것보단 백 배는 나았다.
“어차피 넌 평민 상대도 안 하잖아. 있는 집 레이디들만 꼬시면서.”
“꼬신다는 천박한 표현은 삼가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성인들의 건강한 정신적 교류라고 해 주십시오.”
“그 와중에 육체적 교류는 쏙 빼놓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진심?”
주먹을 모아 헛기침을 한 라니에리가 말을 살짝 돌렸다.
“그나저나 정말 아름다운 분이더군요. 소박하면서도 보석처럼 은은히 빛나는 기품이 느껴졌습니다. 공자님께서 왜 빠지셨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탐내지 마라. 내 사람이니까.”
“그럴 일이야 있겠습니까.”
팔을 뻗고 눈을 감은 시몬은 다시금 루아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다 보니, 중개인 사무소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이 생각났다.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거기 중개인 놈 있지. 그 자식 내일부터 가게에 못 나오게 해.”
“이미 손 써 두었습니다.”
“오, 빨라서 좋군.”
“차라리 중개인이 쓰던 사무실을 가게로 내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과연 라니에리였다. 책사답게 두어 수 앞을 내다보는 능력을 보였다.
“그렇게 대놓고 도와줄 바엔 수도에 빵집 열어 주는 게 낫겠지. 한 번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면 상대가 부담을 느끼게 마련이다. 설레발은 필패라는 말 몰라?”
“공자님답지 않은 전략이군요. 늘 냉철하면서도 저돌적인 면모가 있으셨는데요.”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다.”
오히려 자세한 설명이 없었기 때문에 시몬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라니에리는 이번 일을 제대로 도와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번 일, 반드시 성공하도록 돕겠습니다.”
“어차피 너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긴 하지만, 고마운 말이군.”
“아크튜러스 상단에 따로 언질을 해 두겠습니다. 투자 건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 사이먼이라는 인물이 실존해야 할 테니까요.”
“알아서 부탁한다.”
그리고 다음 날, 시몬과 루아, 그리고 루아의 숙부라는 남자가 찻집에서 만났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크튜러스 상단의 사이먼 님이라고 하셨지요?”
“예. 맞습니다.”
“저는 폴렌입니다. 형님과 함께 빵집을 운영하고 있지요.”
사람 좋게 웃은 시몬은 악수를 청했다. 벌떡 일어난 폴렌이 손을 잡았다.
“폴렌 님. 편히 대해 주셔도 됩니다. 오히려 저희 상단이 부탁드리는 입장이니까요. 게다가 전 귀족도 아닙니다.”
“아, 그러십니까? 워낙 기품 있어 보이셔서 귀족인 줄 알았습니다.”
아무래도 분장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하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그래도 이렇게 도움을 주신다니 참 다행입니다. 말씀을 들으셨겠지만, 분점을 내는 것은 저희 형제가 늘 꿈꾸던 것이었거든요. 하지만 막상 와 보니 역시 쉽진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투자 제안을 받았으니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할 것이다.
오히려 폴렌은 두 손으로 시몬의 손을 꽉 잡았다.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일단 어려움을 겪고 계신 게 분점을 낼 건물을 구하는 것이지요?”
“맞습니다.”
“일단 차 한잔 드시지요.”
시몬은 찻집에서 가장 비싼 차 석 잔을 시켰다. 고르라고 한다면 한세월 걸릴 것 같아서였다.
“제 비서가 주변 상권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곧 자료를 들고 이쪽으로 올 겁니다.”
“아아, 그러십니까. 이거 신세만 지는 것 같아서…….”
“괜찮습니다. 비즈니스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시몬은 찻물을 후룩 들이켰다. 일부러 루아에겐 말을 걸지 않았다. 그저 설명할 때 몇 번 눈만 마주쳐 줄 뿐이었다.
‘밀당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처음부터 껄떡거릴 필요는 없지.’
마음 같아서는 심야 데이트를 신청하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곧 라니에리가 나타났다.
“잠시 실례.”
그는 찻잔을 한쪽으로 치우고 손에 쥔 종이를 테이블에 펼쳤다.
알피나 마을의 상가 지도였다.
계약할 수 있는 곳과 없는 곳이 파란색, 빨간색 잉크로 잘 구분되어 그려져 있었다.
직관적으로 그려진 도면이었기 때문에 건물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이걸 하루도 안 돼서 준비했단 말이야?’
시몬은 내심 감탄했다.
잘만 독촉하면 침대가 딸린 마차를 만드는 것은 꿈이 아니리라.
“어제 아가씨께서 보셨던 건물이 어떤 곳입니까?”
“여기요.”
루아가 손가락으로 파란색 건물을 가리켰다. 라니에리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좋은 건물입니다. 유동 인구도 많고 근처에 모험가 길드가 있기 때문에 잠재 고객의 접근성도 좋지요.”
“그런데 좀 비싸더라구요.”
“좋은 자리가 비싼 건 당연합니다. 그래서 제가 준비한 몇 곳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라니에리는 준비가 철저했다.
어디서 사 왔는지 기다란 지휘봉으로 도면을 가리키며 설명을 시작했다.
“제가 추천드리고 싶은 지역은 바로 이곳입니다. 상업 구역의 말단 지역인데, 상대적으로 주목도가 떨어지는 면은 있으나 임대료가 저렴하고 넓습니다.”
“그럼 손님들이 오시기 좀 힘들지 않을까요?”
라니에리가 지휘봉을 거두고 시몬을 바라보았다.
좋은 타이밍.
계속 설명하는 것은 오히려 방해만 된다. 이 자리에서 주목받아야 하는 것은 시몬이었으니까.
“일반적이라면 루아 양이 하신 말씀이 맞습니다. 사람들이 가까이 있는 가게를 찾는 것은 당연한 심리니까요.”
“궁금해요. 비서분이 어떤 이유로 추천해 주신 건지요. 역시 비용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루아 양 아버님의 솜씨가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루아와 폴렌이 동시에 물음표를 띄웠으나, 그 말의 속뜻을 알아채는 것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마이너 마을의 본점도 좋은 위치에 있진 않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굳이 찾아와 빵을 사 먹곤 하죠. 맛만 보장되어 있으면 입점 위치는 큰 문제가 안 됩니다.”
“아! 그럼 입소문을 내면 된다는 거네요.”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저희 상단에서 광고 한번 하면 끝이니까 말이죠.”
“와…….”
루아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 만에 보는 미소일까.
모든 것을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시몬은 다시금 침대 속에서 탈출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으음. 말씀하신 바는 잘 알겠습니다만, 아크튜러스 상단에서 저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레시피라든가…… 비법을 원하시는 걸까요?”
워낙 조건이 좋다 보니 폴렌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투자를 빌미로 가문의 비법을 빼앗는 일은 부지기수로 많다. 특히 생산 관련 일이 그렇다. 장소를 제공해 주며 기술을 자연스레 흡수하는 방식으로.
비법을 빼앗기게 되면 장인들은 상단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막강한 자본력으로 치킨 게임을 시작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당연히 그것 또한 시몬의 예상에 있는 것이었다.
“천만에요. 저희가 원하는 것은 수익입니다. 그리고 형님분의 손맛을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개인적인 바람도 있지요. 비법을 빼앗는 일은 없을 겁니다. 또한 경영 일체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저희가 계약하지 않을 이유가 없겠습니다. 마이너에 계신 형님도 이 소식을 들으면 좋아하시겠군요! 안 그러냐? 루아.”
“전 잘 모르겠지만, 좋은 것 같아요.”
호감 섞인 루아의 눈빛을 애써 피한 시몬이 팔을 들며 진정시켰다.
“자자, 일단 저희 제안을 끝까지 들어 주십시오.”
시몬이 준비한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루아와 폴렌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눈으로 그것을 살폈다.
대뜸 계약서를 보게 되면 당황하는 법이다.
시몬은 친절한 어조로 설명했다.
“가게 세팅은 전적으로 저희 상단에서 책임지고 하겠습니다. 건물도 저희가 매입할 생각입니다. 그래야 나중에 자리를 뺏기는 일이 없을 겁니다. 대신 순수익의 절반은 저희가 가져가지요.”
“정말 그 정도로 충분합니까?”
“충분합니다. 초기에는 좀 어려우실 수도 있겠지만 매출이 늘어나면 크게 부담되실 건 없습니다. 저희도 그만큼 원금 회수가 빨리 되겠지요.”
“좋군요.”
“아직 한 가지가 더 남았습니다.”
시몬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듯, 손가락을 들고 말을 이었다.
“저희가 아크튜러스 가문의 이름으로 장사를 하시는 건 알고 계시지요?”
“물론입니다.”
“귀하의 빵집에서 만든 빵을 수도에 있는 아크튜러스 가문으로 정기 납품하는 것이 조건입니다.”
“오오…… 그건 오히려 저희가 부탁드리고 싶을 정도의 일입니다. 가문의 영광입니다!”
“시가보다 저렴하게 납품해 주셔야 하는데 괜찮으십니까?”
“문제없습니다! 영주님께서 드실 음식인데요!”
씨익 웃은 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일단 이 계약서를 가지고 마이너 마을로 돌아가시지요. 보름쯤 뒤에 저희가 빵집으로 다시 찾아가겠습니다.”
“예. 그러지요!”
“이야기는 이 정도 하지요.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저기, 사이먼 님.”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시몬이 루아를 응시했다. 그녀가 부끄럽게 웃으며 청했다.
“어제 일도 보답해 드릴 겸 식사를 좀 대접하고 싶은데…… 시간 괜찮으세요?”
없는 시간도 만들어야 했다.
그때 라니에리가 나섰다.
“폴렌 님. 괜찮으시면 여기 두 분 식사하시는 동안 입점 예정지를 같이 둘러보고 싶습니다만.”
“아? 예. 얼마든지요! 그러시죠! 갑시다!”
어쩌다 보니 루아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시몬은 결심했다.
이번 일을 마치고 복귀하는 대로 베텔게우스 가문에 큰 포상을 내려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