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루아 (1)
마차가 갑자기 멈췄다. 격한 흔들림에 시몬이 잠에서 깨어났다.
“아, 이런 빌어먹을 승차감…… 뭐야? 벌써 도착한 거야?”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창밖으로 머리를 빼 전방을 확인한 라니에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도적 떼를 만난 모양입니다.”
“아크튜러스 가문의 문양을 보고도 앞길을 막는 미친놈들이 있다고?”
“그런 것 같습니다만.”
“환장하겠네. 낮술이라도 처먹었나?”
시몬이 마차에서 내렸다.
어느새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숲길을 통과하고 있어서, 오히려 도적들이 나오지 않으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호위 책임자 한스는 근엄하게 도적들의 우두머리와 교섭을 시도했다.
“너희들이 누구 앞길을 막은 줄 아느냐?”
“으흐흐흐. 알다마다. 아크튜러스의 핏덩이 아니더냐?”
“이놈!”
노호가 터져 나왔음에도 도적들은 낄낄 웃으며 그것을 무시했다.
“아크튜러스의 핏줄이라고 살가죽이 쇳덩이로 되어 있더냐? 이 칼날 맛 좀 보면 정신이 번뜩 들겠지.”
“귀족 놈들의 수탈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 더 줄 것도 없다고!”
“어차피 굶어 죽을 바엔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
“와아아아!”
통치에 대한 불만이 쏟아졌다. 시몬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생에서도 폭동이 일어난 적은 없었는데? 오히려 가뭄이 들었을 때 곡창을 연 것은 아버지 쪽이 아니었던가.’
혹시 놓친 것이 있나?
마침 마차에서 내린 라니에리에게 물었다.
“우리 영지가 그렇게 악독해? 서민들의 피를 쪽쪽 빨아먹을 정도로?”
“전혀 아닙니다. 근방에 있는 알데바란이나 알퐁스 쪽이 세율이 훨씬 높지요. 자비로우신 주군께서는 빈민 구제에도 관심이 많으십니다.”
“근데 저 새끼들은 왜 저러는 건데?”
“공자님 말씀대로 낮술을 마신 게 아닐까요? 분명한 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단 말이지.”
시몬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그가 앞으로 나갔다.
“한스, 비켜.”
“도련님. 위험합니다! 물러서십시오!”
도련님이라는 말이 시몬의 정체를 특정하고 말았다. 한스는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오, 네놈이 그 대단하다던 시몬 아크튜러스냐?”
“그래.”
“때깔 참 곱구나. 피부가 무슨 종이처럼 하얗군. 노예로 팔아넘기면 아주 비싸게 받을 수 있겠어. 크하하하!”
대장으로 보이는 털보 사내가 낄낄거리며 비아냥거렸다.
도적들은 시몬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죽을 뻔할 정도로 앓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은 하나의 가능성을 만들어 냈다.
시몬의 몸이 온전치 않으니 포로로 잡을 수 있을 거라고.
“네놈이 병에 걸렸다고 들었다. 지금이야말로 좋은 기회가 아니겠느냐? 한 놈만 잡으면 팔자가 피니까 말이다. 하하하!”
“야, 털보.”
“음?”
“아크튜러스의 후계자가, 그것도 호위기사 달랑 한 명만 데리고 먼 길 떠난다는 거에서 뭔가 느껴지는 위화감 같은 게 없냐?”
“음…… 딱히?”
“그러니까 네가 오래 못 살게 되는 거야. 어디서 주워들은 정보인지는 모르겠지만 목숨을 걸 정도였다면 신중했어야지.”
시몬이 외투를 벗고 그것을 마차 쪽으로 휙 던졌다. 그리고 소매를 걷었다. 잔 근육이 도드라지며 힘이 들어갔다.
굳이 검을 뽑을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우우웅!
꽉 쥔 시몬의 두 손에 오러가 맺히기 시작했다.
그제야 털보는 상황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 하지만 분명 황녀도 금방 돌아가고 연회도 취소되었다고 하던데……!”
“아아, 그래서 내 목숨이 더 위태로워졌다고 생각한 거군. 그런데 어쩐다? 나는 이렇게 멀쩡한데. 오히려 예전보다 더 강해졌는데?”
“허, 허풍은! 지원군이 오기 전에 사로잡아 주지! 뭐 하냐 얘들아! 어서 무기를 들고……!”
콰직!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숲속으로 찾아온 정적.
“뭐, 뭣!”
털보는 기겁했다.
어느새 접근한 시몬이 부하의 턱뼈를 날려 버린 것이었다.
“끄륵?”
부하는 쓰러져 경기를 일으키다 정신을 잃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방법이 없다.
다만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은 시몬이 오러를 사용했다는 것.
그러지 않고서 한 대 맞은 턱이 저렇게 너덜거릴 수는 없을 것이다.
털보와 도적들은 벽을 느끼고 말았다.
“사, 살려 주십시오!”
“내가 왜?”
“부탁입니다. 살려 주십시오! 제발! 한 번만!”
털보를 비롯해 마차를 포위한 도적들이 일제히 바닥에 엎드려 자비를 구했다. 소매를 내리고 단추를 잠그며 시몬이 물었다.
“가진 거 좀 있냐?”
“무,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돈 말이야 돈. 여비가 좀 부족해서 말이지.”
“아!”
털보가 황급히 가진 돈을 모두 꺼냈다. 다른 도적들도 돈이 될 만한 것을 모두 꺼내 마차에 실었다.
덕분에 시체의 품을 뒤지지 않아도 재물을 한곳으로 모을 수 있게 되었다.
털보가 굴욕적인 미소를 지으며 슬쩍 시몬을 올려다봤다.
“그, 그럼 저희는 이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딜 가려고?”
“히익!”
시몬은 그들을 곱게 보내 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꿀처럼 달콤한 낮잠을 깨운 장본인들이었으니까.
“라니에리.”
“예. 공자님.”
“내가 법에 좀 약해서 말이야. 제국법 좀 읊어 봐라. 귀족을 해치려는 자는 어떤 처벌을 받게 되지?”
“목이 잘려 저잣거리에 걸리게 됩니다. 그리고 시체는 잘 조각내어 동물들의 먹이로 사용되지요.”
“그렇다는데?”
“고, 공자님! 제발!”
시몬은 기감을 끌어올렸다.
주변을 탐색했다. 숲이 점점 깊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방해물이 많아질 것 같다고 판단했다.
“너희들에게 살 기회를 주마.”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뭐든 하겠습니다!”
“앞서가서 앞길을 막는 몬스터들을 모조리 처리해라. 그리고 알데바란 방향 숲 끝에서 얌전히 기다려. 만약 도망가기라도 한다면 군사를 일으켜 지옥 끝까지 따라갈 거다.”
“예, 옛! 얘들아. 가자!”
도적들이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한스 경.”
“예!”
한스는 다시금 존경 어린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방금 시몬이 보여 준 체술은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부터 앞길을 막는 놈들은 모조리 베어라. 말도 섞지 마. 마차 덜컹거리는 거 못 참겠으니까.”
“알겠습니다!”
마차에 오르자마자 라니에리가 물었다.
“그런데 왜 도적놈들을 알데바란 쪽 숲으로 보내신 겁니까? 저희는 지금 반대로 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접경에 있는 소대 하나가 복귀하고 있다.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겠지.”
“전서구를 보낼까요?”
“냅둬. 몬스터한테 죽나 기사들한테 죽나 운 한번 시험해 보라고. 여비가 좀 아슬아슬했는데 채웠으니 됐다.”
시몬은 다시 의자에 기대 잠을 청했다. 그러나 숲길이 평탄하지 않아 마차가 자꾸 흔들렸다.
“망할! 침대가 그립군.”
“다 도련님의 업보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비꼬기만 하지 말고, 마차에 침대를 넣을 방법 좀 고민해 보는 건 어때? 좋은 머리 뒀다 뭐에 쓰려고.”
“예.”
“가끔은 좀 진심을 담아서 대답해 주면 안 될까?”
“예에.”
한숨을 내쉰 시몬은 억지로 잠을 청했다.
* * *
며칠 후, 시몬 일행은 마이너 마을에 근접했다. 시몬은 창문을 열고 한스 경을 불러 마차를 세우게 했다.
“어인 일이십니까?”
“너는 마차를 끌고 알피나 마을로 돌아가라.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도록 해. 나는 라니에리와 마이너 마을을 둘러보고 합류하겠다.”
“오, 그건 곤란합니다! 공자님. 저는 공자님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나보다 약하면서 누굴 지킨다는 거야.”
때로는 강하게 나설 필요도 있었다.
물론 시몬은 채찍질만 하는 우둔한 주인이 아니었다.
“그리고 너도 좀 쉬어야지. 며칠 동안 고생했잖아?”
“고생이라니 무슨 섭섭한 말씀입니까? 저는 무척 즐거운 여정이었습니다!”
“됐고, 받아.”
슥.
가죽 주머니가 내밀어졌다. 한스는 그것을 받으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무엇입니까?”
“뇌물.”
“예?”
“가서 먹고 싶은 거 잔뜩 사 먹으라고. 너 술 좋아하잖아? 알피나의 술은 꽤 유명하다고.”
“오오…….”
“기사단장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 잘 알고 있다. 가끔은 휴식도 필요한 법이지.”
거부하기에는 너무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 게다가 위로의 말에 한스는 감격했다.
“공자님의 명을 따릅니다.”
“여기에 오래 있진 않을 거다. 조만간 보자.”
“옙!”
마차에서 필요한 물건만 내리고 평복으로 환복한 시몬은 라니에리와 함께 마이너 마을로 들어섰다.
“아주 좋군. 평화롭고 경치도 좋고.”
“아주 낙후된 곳은 아닙니다. 남쪽으로 뻗어 있는 산맥엔 몬스터가 제법 많이 나와서, 모험가들의 전초 기지 역할을 하기도 하지요.”
“몬스터가 마을로 침입하지는 않나?”
“침입하기도 전에 모두 사냥당하니 그럴 일은 없다고 합니다. 자경단도 있고 해서 큰 문제는 없습니다.”
“상생이군.”
시몬은 여관에 짐을 풀기 전에 빵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들뜬 마음을 숨기려 했으나, 라니에리가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걸음이었다.
“공자님. 좀 천천히 가십시오.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내가 빠른 게 아니라 네가 느린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냐?”
“전혀요.”
“그러니까 평소에 운동 좀 하라니까.”
“서두르면 일을 그르치는 법입니다.”
잠시 후 시몬은 빵집에 도착했다. 어렴풋이 기억이 떠올렸다. 루아와 운명적으로 만났던 바로 그 순간이.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루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간 거지?’
중년의 남자가 열심히 밀가루 반죽을 하고, 그의 부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옆에서 새로 만들어진 빵을 진열하고 있을 뿐이었다.
시몬이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어서 오세요. 처음 뵙는 분 같은데, 어떤 빵을 드릴까요? 모두 맛있답니다!”
“어…….”
잠시 머뭇거린 시몬은 예전처럼 있는 걸 다 주라고 하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이것 두 개만 주십시오.”
“예, 손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중년 여인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손바닥만 한 빵을 종이봉투에 넣었다.
“2천 실링입니다. 손님.”
“잔돈은 됐습니다.”
시몬은 1만 실링을 건네곤 빵을 받았다. 여인은 깜짝 놀랐으나 이내 온화한 미소를 짓는다.
“그래도 그냥 받을 수는 없으니 빵 좀 더 챙겨 드릴게요. 손님.”
“괜찮습니다.”
“안 받으시면 잔돈 돌려드릴 거예요?”
시몬은 어쩔 수 없이 여인이 건네는 빵을 받았다. 가만히 보기에도 잔돈보다 훨씬 더 많아 보였다.
“실례지만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예? 말씀하세요.”
“여기에 일하던 젊은 아가씨는 어디 갔습니까?”
“루아요?”
중년 여인은 환하게 웃으며 이유를 알려 주었다.
“알피나 마을에 잠시 가 있답니다. 그곳에 저희 빵집을 하나 더 낼 거라서, 준비할 겸 해서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저희 딸을 찾으시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으음, 전에도 빵을 얻어먹은 적이 있는데, 떠나기 전에 감사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아아, 그런 거라면 괜찮아요, 손님! 여행자분들 덕에 저희가 이렇게 장사를 하고 있는걸요? 대접해 드리는 건 당연하지요.”
한마디로 길이 엇갈린 것이다.
하지만 시몬은 최대한 좋은 표정으로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어떻게 됐습니까?”
“알피나 마을에 가 있다는군.”
“길이 엇갈렸군요.”
시몬은 걸음을 돌렸다. 마을 입구 쪽이었다. 흠칫 놀란 라니에리가 뒤를 따랐다.
“공자님. 하루 정도는 쉬고 가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럴 여유 없다.”
“저도 여유 없습니다.”
라니에리는 단호했으나 시몬은 그저 웃을 뿐이다.
“그렇게 저질 체력으로 어떻게 나를 보좌하겠다는 거냐? 한심한 놈. 빨리 전서구나 날려. 차 돌리라고.”
“한스 경이 서운해하겠군요.”
“네 저주 때문에 꼬인 거잖아!”
“제가요?”
“서두르면 일을 그르치는 법이라며?”
“…….”
라니에리가 품에서 작은 피리를 꺼냈다.
잠시 후 하늘 저편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