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오히려 좋아 (3)
움찔!
잠들어 있던 오러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시몬은 잠시 눈을 감고 심장에 박힌 서클에 집중했다.
‘지금은 세 개뿐이군.’
오러 심법을 통해 이론상 만들 수 있는 오러 서클의 개수는 열 개다. 회귀 전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시몬은 아홉 개였다.
‘그때는 수련할 시간이 부족했어. 빨리 서클을 만들 수 있는 방법도 몰랐고.’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마음만 먹는다면 오러 서클 열 개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시몬은 차분히 검의 공명에 집중했다.
그리고 검으로부터 뻗어 나오는 힘을 신체 내부로 끌어들였다. 검의 기운이 혈맥을 타고 시몬의 심장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좋아. 두 개가 늘어난 건가.’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 오러 서클 두 개가 생성되었다.
물론 일시적인 현상이다.
검을 일정 기간 이상 멀리하게 되면 서클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
‘5서클 정도면 소드 익스퍼트의 초입 정도겠지. 이 정도면 충분해.’
시몬은 만족스러운 표정과 함께 창고를 나섰다. 열쇠로 문을 단단히 잠근 후, 후작에게 반납했다.
“검을 골랐구나.”
“쓰던 것이 너무 낡아서 말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튀는 건 부담스러우니 이게 적당해 보였습니다.”
“어떻게 쓰는 검인지는 알고 있느냐?”
“천천히 알아 가 볼 생각입니다.”
후작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시몬의 대답엔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슬슬 가 보거라.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 반드시 만족할 만한 성과를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멀리 나가진 않으마.”
시몬을 배웅하기 위해 모인 가신들과 기사들의 수는 생각보다 많았다.
드뇌브 후작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모인 모양이다.
친모인 헤라는 물론, 둘째 부인인 미온까지 예복을 입고 시몬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용히 떠나긴 틀린 것 같군.’
시몬은 라니에리와 함께 군중을 헤치고 마차 앞에 섰다. 곳곳에서 몸 조심히 다녀오라는 충성스러운 말들이 쏟아졌다.
“아들아.”
헤라가 다가왔다.
한때는 아크튜러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손꼽히는 여인이었으나, 나이가 든 지금은 매우 고집스러운 인상만이 남아 있었다.
전생에서는 친모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질투가 너무 심하고 둘째 부인에 대한 핍박이 극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결국 그런 행동은 둘째 부인 미온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번 생에는 그렇게 놔둘 수 없지.’
딱히 미온에 대한 연민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동생인 이올린 때문이었다. 미온이 이올린의 생모였으니까.
헤라가 시몬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렇게 떠나보내는 게 맞는지 모르겠구나. 네 아버지께 다시 청해 보았지만 워낙 완고하셔서.”
“괜찮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명이 아니었더라도 제가 먼저 나섰을 겁니다.”
“걱정이구나. 알데바란 놈들은 흉악하기로 소문나지 않았더냐?”
“소문은 사실과 다를 때가 많지요.”
시몬은 한 발자국 물러나 있는 미온을 바라보았다. 계모인데도 불구하고, 미온은 고개를 살짝 숙여 예를 표했다.
어려울 수밖에 없을 터.
가문을 잇게 되면 가장 먼저 쫓겨날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여전히 안 좋다고 들었습니다만.”
“괜찮단다, 시몬.”
“내일부터 약이 바뀔 겁니다. 좀 더 신경 써서 좋은 약재를 준비했습니다. 주치의에게 말해 두었으니 잘 챙겨 드세요.”
“아아.”
뜻하지 않은 배려에 미온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다.
안타깝게도 미온이 가장 신경을 쓴 것은 헤라의 반응이었다. 역시나 헤라의 표정이 구겨지고 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볼 시몬이 아니었다.
“어머니. 둘째어머니께서도 건강이 좋지 못하시니 잘 챙겨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어머니만 믿겠습니다.”
“……알았다. 걱정하지 말거라.”
“오라버니. 위험한 곳으로 가신다고 들었어요.”
이번엔 동생 이올린이 다가왔다. 늘 안고 있는 곰 인형이 없다. 동생에게도 쉬운 자리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전혀 위험하지 않아. 오히려 편안한 여정이 될 거다. 그러니 이올린. 넌 걱정할 거 조금도 없어.”
“정말이에요?”
“그럼. 여기 모인 기사 아저씨들이 다치지 않도록 미리 손을 쓰려는 거니까.”
“싸우지 않는 거, 좋아요.”
시몬은 살짝 놀랐다. 이올린이 이렇게 솔직한 아이였던가?
하지만 그 변화조차 반가웠다.
전생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지 못했었으니까.
어쩌면 자신의 어머니를 챙겨 주는 모습에서 마음이 조금 열린 것일지도 모르지.
“건강히 잘 지내거라. 둘째 오라버니 간식 챙겨 주는 것 잊지 말고. 돌아와서 재미있는 이야기 잔뜩 풀어 주마.”
“네!”
동생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준 시몬은 군중들 앞에 당당히 섰다. 떠나기 전에 한마디 정도는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다들 어떤 걱정과 고민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조금도 걱정할 것 없다는 걸 분명히 하고 싶군. 그대들이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지고 꼭 돌아올 테니까. 설령 내가 포로로 잡히더라도, 내 목숨은 신경 쓰지 마라! 그때는 각하와 케나드 부사령관의 명령이 곧 법이 될 것이다. 나는 가문을 위해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
“명을 따릅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사령관!”
손을 한번 들어 준 시몬이 마차에 올랐다. 뒤이어 라니에리도 함께 탔다.
곧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점점 속도가 붙으며 아크튜러스 가문의 저택이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군중들은 흩어지지 않고 마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좀 걱정이 되는군요.”
“왜? 어제 고백한 레이디가 생각할 시간 좀 달라고 하든?”
“지금 농담할 때입니까?”
“뭐 어때. 아직은 우리 영지인데.”
“알데바란 가문에서 증거를 찾는 것 자체도 어려운 일이고, 그렇다고 평화 조약을 먼저 제안하는 것도 가문 입장에서는 체면이 깎이는 일이니까요.”
“걱정하지 말라니까.”
시몬이 웃자 라니에리는 안경을 슥 올리며 물었다.
“생각해 두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생각이라기보다는, 그냥 알아서 잘 풀릴 거야. 알데바란 놈들은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어지거든.”
“선택의 여지가 없어지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쯤이면 알데바란 남부에서 오크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할 거야.”
시몬이 확신을 담아 말했다.
“오크요?”
라니에리는 그 말을 선뜻 믿을 수 없었다.
아크튜러스 영지는 물론 인근 지역에 서식하는 이종족이나 몬스터들의 동향에 대해서는 자신도 정보를 받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조용한 상황.
그런 상황에서 이종족인 오크족이 준동할 거라고 말하는 시몬의 저 미소가 한없이 의심스러워 보였다.
“오크는 이종족 중에서도 굉장히 위험한 부류입니다. 그들이 날뛴다면 확실히 알데바란의 병력이 분산되겠지요. 하지만 어떻게 아신 겁니까? 오크들이 날뛴다는 것 말입니다.”
“몇 번을 말하게 하는 거야. 과거로 회귀했다니까? 그러니까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 수 있게 되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금단의 마법에 손을 대신 것은 아니겠지요?”
“하하하하. 아예 소설을 쓰는구나.”
시몬은 기분 좋게 웃으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지켜보고 있으라고. 내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맞으면 내가 과거로 회귀했다는 걸 믿어 줄 거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까.”
“네가 떠들고 다니는 그 합리론으로도 해석하지 못하는 일이 세상에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알기나 해?”
“해석하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아직 해석할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일 뿐이죠.”
“말 한번 잘하는군. 그럼 한번 천천히 증명해 봐. 너의 합리론으로 설명하는 회귀에 대해서.”
시몬은 품에서 브로치를 꺼냈다. 아까 창고에서 가져온 백룡의 브로치였다.
“이거, 적당한 곳에 잘 끼고 있어.”
“꽤 비싸 보입니다만.”
“꽤 비싸 보이는 정도가 아니야. 돈 주고도 구하기 힘든 물건이다.”
라니에리는 수수한 느낌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잘 봐 줘도 준남작 정도의 패션이다.
그에 비해 백룡의 브로치는 너무나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뭐 어때. 아크튜러스의 공식적인 후계자의 책사인데. 이 정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할 거야.”
“왜 달아야 하는 겁니까?”
“네 심장이나 이마에 화살이 박히는 걸 막아 줄 거야. 딱 한 번뿐이지만.”
끔찍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자, 라니에리는 얌전히 브로치를 받아서 착용했다.
그런데 옷 바깥이 아니라 안쪽에 착용했다.
바깥에 차서 사람들에게 주목받을 것을 우려해서였다. 모든 주목은 모시는 주인의 몫이 되어야 했다.
“이래도 효과는 유지되는 것 맞지요?”
“하여간 고집은. 비싼 거니까 잃어버리지 말고.”
“감사합니다.”
“뭐라고?”
“감사합니다.”
시몬은 귀를 들이밀며 오버액션을 취했다.
“밖에 소란스러워서 잘 안 들리는데. 좀 크게 말해 봐. 뭐라고?”
“……감사합니다.”
“하하하. 고마우면 잔소리 좀 줄이고.”
아크튜러스의 수도에서 벗어난 마차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것을 확인한 라니에리가 물었다.
“마이너 마을로 가는 것 같군요. 한스 경은 어떻게 설득시켰습니까?”
“후방의 민심을 살피는 것도 군주가 챙겨야 할 덕목이라고 하더니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더군.”
“그러셨군요. 마이너 마을엔 공자님께서 편히 머물 만한 숙소가 없습니다. 다소 불편함은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상관없어. 상인 행세를 할 거니까.”
“평민으로 위장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옷 같은 것도 다 챙겨 왔으니 걱정하지 마시게나.”
라니에리는 더는 묻지 않았다.
처음에는 열병의 후유증인 줄 알았다. 시몬이 하려는 일 모두가 상식 밖의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더욱 영민해지신 것 같단 말이지.’
눈치가 빠른 데다 머리까지 총명한 라니에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코를 골며 잠에 빠져든 눈앞의 공자에겐 분명한 계획이 있다고.
‘설마 영주 자리 그 이상의 것을 바라보고 계신 게 아닐까?’
시몬은 가문을 잇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한적한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짓겠다고 말했다. 혹시 그 ‘농사’가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어쩌면 그 자체가 은유적인 표현일지도 모르지.’
그 말 자체가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한다는 것처럼 들렸다. 땅을 일구는 것 자체가 국가의 초석을 닦는 거나 다름이 없으니까.
라니에리의 눈이 반짝였다.
‘아크튜러스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서를 만든다라…….’
그런 생각에 미치자 라니에리는 여느 때보다도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책사는 모시는 사람이 보는 것 이상의 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좀 뒤처진 기분이었다.
시몬은 물었다. 농사를 지을 줄 아냐고.
‘역시 그 질문은 새로운 세상의 기초를 닦을 수 있냐는 질문이 아니었을까?’
라니에리는 자신의 실책을 인정해야 했다. 과연, 시몬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도 분발해야겠군.’
그 생각을 끝으로, 라니에리도 흔들리는 마차에 몸을 맡기며 잠시 눈을 붙였다.
시몬의 뜻을 완전히 오해한 것도 모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