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오히려 좋아 (1)
드뇌브 후작은 연설이 막 시작할 무렵 걸음을 돌렸다. 집무실로 돌아가려 하자 칼림이 물었다.
“지켜보지 않으실 겁니까?”
“허가하지 않은 소집 따위엔 관심 없네.”
“각하. 시몬 공자님은 군단 사령관이기도 합니다. 기사들을 소집하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만.”
후작은 말없이 그저 걸음을 옮기기만 했다. 두 사람은 곧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때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그곳까지 파고들었다.
― 우리는 지금 중요한 기로에 서 있도다. 그대들도 알다시피, 오랜 악연으로 이어진 알데바란 가문이 우릴 향해서 이빨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기사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명백한 적개심.
케나드는 오러를 실어 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드뇌브 후작의 집무실까지 그 내용이 쩌렁쩌렁 울렸다.
후작은 의자에 몸을 맡기곤 눈을 감았다.
“내가 왜 돌아왔는지 아나?”
“짐작은 갑니다. 장성한 아들을 둔 것은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니지요.”
“그래. 만약 기사들이 내가 지켜보는 모습을 본다면 녀석이 하는 말을 용인한 거라고 생각할 테니 말이네.”
“저는 좀 다른 부분에서 흥미를 느꼈습니다.”
후작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칼림을 바라보았다. 흰 수염을 근사하게 쓸어 만진 칼림이 대답했다.
“시몬 공자님과 케나드 공자님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시몬 공자님이 케나드 공자님을 지극히도 경계했지요. 후계 문제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마땅히 들려와야 할 시몬 공자님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고 케나드 공자님의 당당한 음성만이 울려 퍼지는군요.”
집무실 내로 침묵이 돌았고 다시금 연설이 시작되었다.
― 우리 아크튜러스는 제국에 뿌리를 내린 순간부터 지금까지 숱한 도전에 직면했었다. 그리고 용기 있게 그 도전을 좌절시켜 왔다! 그 누구도 우리의 영지에 발을 내디디지 못했으며, 우리 영지민의 안위를 위협하지 못했다. 그대들은 누구를 위해 검을 드는가? 위대하신 우리의 주군이시자 사랑스러운 가족들을 위함이 아닌가!
― 오오!
― 하지만 그대들도 알아야 할 것이다. 전장에 나가 검을 휘두르는 것만이 가문과 가족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칼림의 입가에 흥미로운 미소가 걸렸다.
방금 나온 연설에 담긴 의미는 전쟁을 반대한다는 것이었으니까.
“시몬 녀석이 케나드를 회유한 건가.”
“저에게 숨기고 계신 게 있으시군요.”
잠시 고민하던 드뇌브 후작이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을 꺼냈다.
“시몬이 가문을 잇지 않겠다고 하더군.”
“정말입니까? 의외로군요.”
“요즘 내가 좀 수척해 보이지 않나? 아들이 중병에 걸려서가 아니라네. 간신히 살아난 아들이, 마치 세상을 다 살아 본 사람처럼 욕심이 없어졌단 말이지. 심지어 가문을 잇겠다는 원초적인 욕심마저 없어졌단 말이네.”
“장자 계승의 원칙이 있으나 가문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꼭 장자만이 가문을 계승한 것은 아니지 않았습니까?”
“……자네가 이렇게 개방적인 사람이었던가?”
“꽉 막히진 않았지요.”
“어느 면을 보더라도 시몬이 훌륭하네.”
“모든 면에서 훌륭한 사람이 꼭 멋진 군주가 되라는 법은 없습니다.”
“자네도 시몬 녀석에게 회유당한 건가?”
“저는 공자께서 깨어나신 이후로 한 번도 뵙지 못했습니다.”
적당히 선을 그은 칼림이 은근한 눈으로 주인을 바라보았다.
또다시 오러가 실린 케나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가문을 위해 검술을 연마하고,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따뜻한 음식을 나누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가정을 지키는 일일 것이다. 나는 평화를 원한다! 무의미한 희생은 바라지 않는다. 가문을 위하는 것도 중요하나, 나는 경들과 이름 없는 병사들의 안위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기사들은 감동에 찬 눈으로 다시금 기합을 내질렀다.
― 본 시간 이후로 접경에서의 군사 행동은 수세로 전환한다! 이 모든 것이 알데바란의 비열한 계략인지, 제삼자의 흉악한 농간인지 보다 확실히 검증한 후 검을 뽑을 것이다!
― 와아아아!
물론 모든 기사가 케나드의 연설에 감화된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접경의 일들을 걱정하는 기사단의 수뇌부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것은 집무실에서 연설을 듣고 있던 드뇌브 후작도 마찬가지.
“이 상황에서 내 자식놈들이 헛소리를 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흐하하하하.”
“왜 웃나?”
“아, 실례. 시몬 공자님이 참으로 영민하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본인이 직접 나섰다면 하책이 되었을 텐데, 케나드 공자님을 앞세우는 것으로 더 큰 지지를 이끌어 내셨군요. 상책을 고르셨습니다.”
맞는 말이라 후작은 대꾸하지 않았다.
“이제는 케나드 공자님까지 평화를 외치시는군요. 체크메이트. 각하께서 궁지에 몰리셨습니다.”
“열 살만 젊었더라도 당장 뛰쳐나가서 연단을 엎어 버리는 건데 말이지.”
“그것도 나름 재미있겠습니다.”
그 이야기는 상상에 그쳤다. 두 아들은 장성했다. 아무리 아들이라고 해도 가문에서의 지위가 있다. 그에 비해 후작은 지는 해였다.
“이제 어떻게 될 것 같나?”
“시몬 공자님과 케나드 공자님의 말씀엔 일리가 있습니다. 특히 전쟁을 원하지 않는 젊은 기사들에게 지지를 얻을 겁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접경의 긴장은 조금 지나친 면이 있지요. 접경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자들의 대부분은 도적단 출신입니다. 물론 그들이 알데바란에 고용된 것일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전쟁에서 중요한 건 명분일세.”
“옳으신 말씀입니다.”
“단장을 비롯해 기사단의 주역들이 당장 여기로 달려와 항의하겠지. 명분은 이미 세워졌으니.”
“발걸음 소리가 벌써부터 들리는 듯한 느낌이군요.”
“방법은?”
생각은 길지 않았다. 칼림은 마치 지혜 보따리에서 책략을 꺼내는 것처럼 자연스레 대답했다.
“시몬 공자님을 알데바란 가문으로 보내는 건 어떻습니까? 사절로 말입니다.”
깜짝 놀란 후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몬을 보내라고? 장남을 적진으로 보내란 말인가?”
“각하께서 직접 나서 혼란을 수습하는 것은 하책입니다. 상대가 상책을 골랐으니 우리도 상책을 골라야지요.”
“으음.”
“위험한 일은 아닙니다. 만약 시몬 공자님을 해치기라도 한다면 놈들은 흔적도 없이 이 대륙에서 사라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그래도 너무 위험하다. 인질로 잡히게 되면 우리의 피해도 적지 않아.”
웬만해서는 칼림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후작이었으나,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어차피 상관없는 일 아닙니까?”
“뭐라?”
“시몬 공자께서는 가문을 잇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인질로 사로잡혀도, 놈들을 토벌하는 것엔 문제가 없습니다. 후계는 케나드 공자께서 잇게 되실 테니.”
그제야 후작은 칼림이 꺼낸 계략에 담긴 속뜻을 이해하고는 씨익 웃었다.
“그러니까 스스로 책임을 지라 이건가?”
“명예로운 아크튜러스의 핏줄이라면 응당 그래야지요. 저는 시몬 공자님께 그만한 지혜와 용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가문을 잇지 않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지요.”
“좋군.”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전쟁을 찬성하는 기사단 중역들의 불만도 쉽게 잠재울 수 있다.
후작가의 장남이 목숨을 걸고 적진으로 가는 것이니까.
게다가 후작은 장남이 놀고먹는 꼴은 죽어도 볼 자신이 없었다.
바로 그때, 밖에서 시종이 보고했다.
“각하. 파월 경과 한스 경이 뵙기를 청합니다.”
“들라 하라.”
집무실 앞까지 찾아온 것은 두 기사단장만이 아니었다. 전투에서 숱하게 공을 세운 베테랑들도 함께 온 것 같았다.
성큼성큼 다가온 두 기사가 절도 있게 군례를 취했다.
“각하를 뵙습니다.”
“그래. 두 사람이 한꺼번에 무슨 일인가. 라고 묻기에는 너무 뻔한 상황인가…….”
“각하께서 소집령을 허가하신 것입니까?”
다소 무례한 어투였다. 그만큼 파월 단장은 흥분해 있었다.
전쟁 준비를 위해 숱하게 고생해 온 그였다.
한편으로는 이번 기회에 알데바란 놈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젠 그럴 수 없게 되었다.
“허가한 적 없네.”
“허어, 그렇다면 두 공자께서 독단으로 수비 전환을 결정하신 겁니까!”
“진정하게. 각하 앞에서 무슨 무례인가?”
“……송구합니다.”
잠시간의 침묵은 파월 단장의 흥분을 가라앉혀 주기에 충분했다. 한숨을 내쉰 후작이 말했다.
“시몬은 이번 일의 배후로 알퐁스 백작가를 지목했다.”
“알퐁스…… 말입니까?”
“또한 열병으로 쓰러진 것도, 독살 때문이 아니라 황녀님 때문이라고 하더군.”
“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온지.”
다른 건 몰라도 황녀 이야기는 깊게 할 수 없었다. 냉정히 고개를 가로저은 후작이 말을 이었다.
“내가 경에게 할 말은 이것뿐이네. 장차 가문을 일으켜 세울 두 형제가 똑같은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
“하지만 알퐁스 백작가가 연루되었다는 증좌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번 기회에 그걸 좀 가지고 오라고 할 생각이지.”
냉철한 눈이 움직여 한스 경에게 닿았다.
“한스 경. 그대는 시몬과 함께 사절단을 꾸릴 준비를 하게. 경호는 자네가 맡고.”
“알퐁스 백작가로 가는 것입니까?”
“아니. 알데바란으로.”
한스 단장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 * *
“하하하하! 정말 잘했다! 케나드. 역시 너는 아크튜러스 가문을 이을 자격이 있다!”
“혀,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찌 그런…….”
케나드가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시몬을 따르는 가신들의 견제를 받는 상황이었다.
억울했다.
조금도 형님의 자리를 뺏을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다.
“어? 아니, 하하하. 말이 좀 헛나왔군. 그만큼 대단하다는 이야기다. 많은 기사들이 너의 연설에 감화되지 않았더냐?”
“그건 모두 형님 덕입니다. 다 형님께서 알려 주신 말 아닙니까?”
“아니지. 내용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을 포장하는 형식 또한 중요한 것이다. 너는 아주 훌륭한 사령관의 자질을 가졌다.”
시몬은 은근슬쩍 군단 사령관직도 넘길 것을 암시했다. 하지만 순진했던 케나드는 눈치채진 못했다.
두 형제는 시몬의 거처로 돌아와 다과를 함께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는 라니에리도 함께였다.
“아까 케나드 도련님께서 연설하시기 전, 주인님께서 단상을 보고 계셨습니다.”
“종소리를 들으셨으니 무슨 일인가 싶어 나오셨겠지.”
“이번 일은 꽤 큰 후폭풍을 몰고 올 겁니다.”
라니에리는 왜 사전에 의논하지 않았냐 하는 뉘앙스를 풍겼다.
시몬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사래 쳤다.
“신경 쓰지 마. 어떻게든 잘될 거다.”
“과연 그럴까요?”
“그러질 않기를 바라는 태도네.”
“곧 알게 되실 겁니다.”
그 말이 마치 예언처럼 들려왔다. 밖에서 하녀가 고했다.
“공자님. 한스 단장이 뵙기를 청합니다.”
“들어오라고 해.”
문이 열렸다.
시몬은 반가운 표정으로 두 팔 벌려 그를 맞았다.
“한스 경! 무슨 일이야? 오늘 훈련은 다 한 거 아니었나?”
“공자님. 그게, 저…….”
“왜. 다시 대련하고 싶어서 그래? 미안하지만 순번을 좀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동생하고 한번 해야 해서.”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내일 당장 알데바란으로 가라는…… 주군의 명령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