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후계 양보 작전 (2)
시몬은 피식 웃었다.
라니에리의 저 당황한 표정을 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웠었다. 오래도록 잊고 지낸 보물을 다시 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당연히 아니지.”
“…….”
“왜, 네 계산에 어긋나는 일이 생기니 정신이 대략 멍해지냐?”
라니에리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절대로 주인의 회귀를 인정하지 않았다.
“제 분석이 틀렸음을 인정해야겠군요. 아무래도 보편적인 심리학으로 접근한 것이 실수였나 봅니다.”
“의외로 실수를 빨리 인정하네?”
“그럴 리가요. 제가 놀랄 거라고 생각하시진 않으셨지요? 루아는 아주 흔한 이름입니다. 우연의 일치겠지요.”
“그냥 도시에서 만났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더 깔끔하지 않아?”
“확률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내 입만 아프지. 믿지 않을 거면 그냥 너 편한 대로 생각해라.”
지금은 회귀를 했냐 안 했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었다.
“그나저나 이제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제가 아는 공자님이라면 만사 제쳐 두고 마이너 마을로 가실 분입니다만.”
“잘 아는군.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장 그럴 수는 없다. 더 급한 일이 있거든.”
“알데바란 후작가 말씀이지요?”
“그래.”
지금 접경으로 계속해서 병력이 집결하고 있었다. 언제 국지전이 벌어지고 전면전으로 확대될지 알 수 없는 상황.
게다가 호전적인 드뇌브 후작의 성정도 큰 영향을 끼쳤다.
기사들은 반반으로 의견이 나뉘었지만 결국 드뇌브 후작의 명령에 의해 전선으로 출진하게 된다.
시몬은 몇 가지 사건으로 현재의 타임라인이 어디까지인지를 분명히 인지한 상황.
‘그때가 여름이었으니, 이대로 방치하면 전쟁은 곧 일어나고 말 거다.’
시몬은 알데바란이 쓴 누명을 벗기는 것은 물론, 전쟁이 일어나 영지가 황폐화되는 것을 막으리라 다짐했다.
‘내 소중한 동생이 고생하지 않고 영주가 되려면 어쩔 수 없지.’
무엇보다도 더 중요했던 것은.
‘전란에 시달리면 내가 마이너 마을에 정착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어쨌든 가문의 일원으로 재건을 도와야 하니까. 라니에리 녀석도 바빠질 거고.’
그래서 시몬은 과감히 일의 선후 관계를 조정한 것이었다.
여유로운 은퇴 라이프를 즐기기 위해서.
마음 같아서는 하루라도 빨리 루아를 만나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가문을 안정시키는 게 중요했다.
이 상황에서의 핵심은 가문을 안정시키되 가신들로부터 주목을 최대한 덜 받아야 한다는 것.
‘이번 일의 주인공은 케나드가 되어야 해.’
동시에 그럴듯한 계획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케나드가 이 소란을 잠재우고 가신들의 주목을 받는다. 그리고 가주인 드뇌브 후작의 인정을 받는다.
‘그렇게 되면 가주 자리를 넘기는 게 더 쉬워지겠지.’
그것을 지켜보던 라니에리가 주먹을 말아쥐며 헛기침을 했다.
“가문에서 유일하게 전쟁을 반대하는 분이 공자님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 위대한 분을 모시고 있는 네 생각은 어때?”
“저는 각하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오래도록 서로 견제해 왔습니다. 한 번쯤은 서열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피해가 있더라도 말이지요.”
“발상을 조금 바꿔 보는 건?”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우리 가문과 알데바란 가문이 서로 맞붙었을 때 가장 이익을 보는 쪽을 생각해 보는 거지.”
“그야 전쟁에서 승리한 쪽이겠지요. 막대한 전쟁배상금은 물론 영지의 일부까지 할양해야 할 테니까 말입니다.”
“그건 1차원적인 문제고.”
“혹시.”
라니에리가 손가락을 튕겼다. 시몬은 그가 원하는 답을 꺼내 줬으면 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알퐁스 백작가를 염두에 두고 계신 것입니까?”
“맞아.”
시몬이 원하는 답을 내놓긴 했는데, 라니에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알퐁스 백작가는 메르세데스 황녀님의 외가입니다. 공자님과의 관계를 생각했을 때 뒤에서 음모를 꾸밀 수는 없을 텐데요? 혼인이 이루어진다면 어차피 아크튜러스의 후광을 받게 될 테니까요.”
“그건 네가 황녀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그 정도입니까…….”
“아니, 그 이상이지. 어쨌든 나는 이 모든 일에 황녀가 끼어 있을 거라고 본다. 우리 가문은 물론 알데바란 후작가까지 잡아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거든.”
“으음.”
턱을 괴고 한참을 생각한 라니에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공자님. 개인적인 감정을 투영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특히 가문과 가문 사이의 일에서는 말이지요.”
“무슨 얘긴지 안다. 하지만 잘못된 일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건 위험한 일이 아니다. 필요한 일이지.”
“확고하시군요.”
“그리고 당분간 기사 한 명을 붙여 주마. 혼자 다니지 마라.”
“갑자기요?”
“말했잖아. 황녀는 보통 인물이 아니라고. 당장은 아니더라도 조만간 나에 대한 조사가 시작될 거다. 당연히 오른팔인 너에게도 미행이 붙겠지.”
황녀가 눈치채지 못한 것은, 이미 시몬이 제너릭 경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황녀를 위해서라면 누구든 죽일 악마.’
전생에서도 흉악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지금 당장 어떻게 하진 않겠지만, 라니에리가 피해를 보는 건 막아야 했다.
‘엘 루나’라는 비밀 모임의 비밀이 그만큼 잘 지켜진 이유도 제너릭 경 때문이었다.
의심 가는 사람들은 모조리 암살해 버렸으니까.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밖에 나갈 일은 별로 없을 테니까요.”
“그게 싫으면 검술이라도 좀 익히든가.”
“생각해 보니 외출이 필요할 때가 있겠군요. 공자님의 배려, 감사히 받겠습니다.”
라니에리는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죽어도 검술은 익히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넌 여전하구나.
시몬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튼 지금은 전쟁은 막아야 한다. 동생에게 피폐해진 영지를 물려줄 수는 없지.”
“누가 듣겠습니다.”
라니에리가 조용히 경고했지만 시몬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너 농사지을 줄 알지?”
“해 본 적은 없지만 원리는 압니다.”
“역시 경험자를 찾아야 하나…….”
“제빵 기술이라도 배워 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빵집 처녀와 말을 트려면 접점이 있어야 하니까 말이지요.”
“우리 사이를 인정해 주는 거야?”
“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저 주인의 말을 따를 뿐.”
시몬은 그 제안이 마음에 들었다.
제빵 기술.
한번 해 볼 만했다.
“그런데 오늘도 계속 침대 안에만 계실 겁니까?”
“이따 슬슬 움직일 생각이다.”
“공방의 다임 씨가 말하더군요. 공자님께서 침대를 워낙 좋아하시니 공자님 이름을 붙여서 침대 장사를 해 보면 잘될 것 같다고.”
“시몬의 침대. 좋네. 로열티는 제대로 내고 하라고 해.”
“싫지는 않으신 모양이군요.”
“뭐, 어쨌든 상관없잖아?”
“이후 일정을 알려 주시면 준비하겠습니다.”
“일정이라고 할 것까진 없고, 케나드 좀 만나 보려고. 굳이 따라올 거 없으니 정 할 일 없으면 이올린하고 놀아 주든가.”
“예. 알겠습니다.”
* * *
시몬이 향한 곳은 케나드의 거처였다. 하지만 방을 지키고 있는 건 전담 하녀뿐이었다.
“동생은 어디에 갔지?”
“수련 중이신 걸로 압니다. 제가 가서 모셔오겠습니다. 도련님.”
“아니다. 됐다.”
방을 나선 시몬은 바로 연무장으로 향했다.
아크튜러스 후작가의 저택은 인근 영지를 통틀어도 가장 넓기로 유명하다. 기사들의 숫자도 많다. 때문에 연무장이 여러 개 있었다.
‘동생이 아끼는 연무장은 따로 있었지.’
케나드는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천성이 정직하고 바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모든 주목은 형인 시몬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이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시몬은 저택과 조금 떨어져 있는 한적한 연무장을 찾았다.
휭! 휘잉!
허공을 가로지르는 쇠붙이의 소리가 들려왔다. 시몬은 뒷짐을 진 채 연무장 한가운데를 응시했다.
케나드는 온몸에 땀을 흘리며 검술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다른 기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시몬은 잠시 수련 장면을 지켜보았다.
‘이제 막 격검 중급 단계를 넘어선 수준인가.’
동생이 이제 16살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나쁘지 않은 성취다.
하지만 검술명가인 아크튜러스의 엄밀한 잣대를 댄다면, 평범할 뿐이다.
평범함은 아크튜러스 가문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지. 동생은 오히려 나중에 더욱 빛을 보게 될 테니까.’
케나드는 실전 경험을 쌓게 되면서 엄청나게 성장하기 시작한다. 눈부신 성장이라는 표현이 조금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게다가 노력 천재니까, 곧 아크튜러스 검식을 마스터할 수 있을 터.’
씨익 웃은 시몬이 옆에 놓인 진검을 들었다. 놀랍게도 검을 손에 쥐기까지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시몬이 내딛는 발걸음도 마찬가지였다.
솜털보다도 가벼운 보법으로 천천히 케나드 쪽으로 다가갔다.
이윽고 검을 휘둘렀다.
“……!”
흠칫 놀란 케나드가 검을 옆으로 휘둘렀다.
까앙!
멋지게 공격을 막아 낸 케나드는 몸을 빙글 돌아 검세를 취했다.
“아, 형님!”
암살자인 줄 알았는데 눈에 익은 사람이 앞에 있었다. 시몬이 미소를 지었다.
“훌륭한 실력이구나. 케나드. 초식에 집중하고 있는데도 반응하다니. 대단한 반사 신경이야.”
“아뇨. 형님에 비하면 새 발의 피입니다.”
“상대의 실력을 칭찬하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실력까지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 아크튜러스의 피를 이어받은 자라면.”
“아, 예!”
동생이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군례를 취했다.
통상 군례는 명백한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취하는 예법이다.
‘전생에서는 당연하게 받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케나드는 이제 가문을 이어야 할 사람이다. 이미지 관리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시몬이 진지하게 말했다.
“케나드. 너는 왜 나에게 군례를 취하지?”
“형제임을 떠나 무인으로서 형님을 존경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라면 앞으로 군례를 할 필요는 없다. 군례는 충성을 표하는 예법일 뿐이다. 형제 사이에서 나누기엔 적당하지 않다.”
“하지만…….”
“부탁이다.”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라는 말이 나오자, 케나드는 살짝 놀랐다. 평소 알던 형님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했다.
열병이 시몬의 강인함을 빼앗아 간 것 같아서.
“알겠습니다. 형님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따를 것입니다.”
“그래. 고맙군.”
“그런데 여기엔 어쩐 일이십니까?”
“전에 칼춤 추기로 한 건 기억하지?”
“아, 예.”
지금은 적당한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지켜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으니까.
시몬이 세운 계획은 이랬다.
‘기왕이면 판을 크게 벌여야지. 부모님도 모셔다 놓고 동생이 얼마나 훌륭한 무인인지 보여 드릴 필요가 있다. 그래야 작위 계승 과정이 쉬워지겠지.’
“형님. 왜 갑자기 웃으십니까?”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흠흠, 지금은 검을 나누기에 적당하지 않은 것 같구나. 몸 상태도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고.”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케나드가 울 것 같은 표정을 했다.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게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괜찮다. 그보다 좀 할 이야기가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알데바란 후작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돌연 케나드의 표정에 힘이 들어갔다. 마치 한 마리의 야수를 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