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후계 양보 작전 (1)
황족이 찾아왔다는 사실만으로 아크튜러스 후작가의 모든 사용인이 긴장했다. 그래서 연회 준비도 타이트하게 진행되었다.
식탁보에는 조금의 먼지도 허락되지 않았고, 준비되는 술과 음식의 맛엔 조금의 부족함도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중단하게 되자, 저택에는 지독한 침묵이 깔렸다.
“당장 시몬을 불러와라!”
“예. 각하.”
드뇌브 후작은 분노를 가까스로 억누르며 몸을 홱 돌렸다. 그가 먼저 집무실에 도착하고, 잠시 후 시몬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당당한 모습의 시몬을 보니 다시금 울화통이 치밀었다.
“얼마 전, 너와 한 약속을 다시금 떠올려야 할 것 같구나. 시몬.”
“황녀님의 입에서 파혼이라는 말이 나오게 하겠다는 그 약속 말씀이지요?”
“이놈!”
격렬한 노호.
오랜만에 들어 보는 꾸짖음마저 반가웠지만, 시몬은 차마 웃을 수 없었다. 지금은 농담이나 할 때가 아니다.
“황녀님이 빨리 돌아가신 것 때문에 이러시는 겁니까?”
“근본적인 문제는 너의 불성실한 태도겠지.”
“저는 황녀님과 충분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또한 황녀님께 분명히 전했습니다. 황녀님은 아크튜러스 가문과 어울리지 않는 분이라고.”
“……뭐?”
드뇌브 후작이 기겁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황녀가 떠나기 전, 어느 정도 시몬을 감싸는 듯한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문과 어울리지 않는다니.
터무니없는 말이다.
그 한마디로 황실을 부정해 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어, 어찌 네가 그럴 수가 있더냐? 아무리 장남이라고 해도, 아니. 오히려 장남이기 때문에 지켜야 할 가문의 명예라는 게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가문의 명예에 흠집을 내는 것도 모자라 아예 부숴 버릴 작정이더냐?”
“소자 서운합니다. 아버지.”
반성의 기미는 조금도 없이 오히려 서운하다고 말하자, 드뇌브 후작은 미간을 찡그리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생각해 보면 전에도 그랬다.
시몬은 아무런 이유 없이 이렇게 난장판을 만들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유도 없이 제가 황녀께 모질게 굴었겠습니까?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그 이유도 묻지 않으시고 황녀님 편만 드시는군요. 그러니 서운할 수밖에요.”
“기가 차는군. 그 잘난 이유가 무엇이냐?”
“엘 루나라는 모임을 들어 보셨습니까?”
“들은 적 없다.”
“그럼 설명해 드리죠.”
시몬은 ‘엘 루나’라는 비밀 모임에 대한 것은 물론, 황녀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빠짐없이 전했다.
후작도 잘 안다.
수많은 귀족들이 모인 황도에는 남녀의 은밀한 만남이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 시대에서는 한 사람이 여러 이성을 선택하는 것은 결코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엘 루나라는 이름은 처음 듣는데.”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분명한 건, 일로스테 남작이 황녀님의 정부라는 사실이지요.”
“증거는 있느냐?”
“일로스테 남작을 끌고 와 심문하면 밝혀질 일입니다.”
증거도 없이 이리도 당당히 말하니 드뇌브 후작은 정신이 아찔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시몬의 말에는 확신이 있었다.
바로 명령만 내려 준다면 당장이라도 일로스테 남작을 잡아들일 거라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증거였다.
증거도 없이 주장하는 것은 모함이나 다를 게 없었으니까.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말은 아니겠지?”
“제가 처한 상황을 설명드린 것뿐입니다. 믿고 말고는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라니에리 그놈이 집어 온 정보더냐?”
“아닙니다.”
이번 일은 절대 외부 사람을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화를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께서 생각하시는 것 이상으로 제 눈과 귀가 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명색이 아크튜러스의 장남이 아닙니까?”
“어쨌든 그렇다 하여도 너의 불경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황녀께서 눈물을 흘리셨단 말이다! 게다가 넌 이렇게 멀쩡히 두 다리로 서 있을 수 있음에도 배웅을 나오지 않았지.”
“그런 일이 있었군요.”
예상하던 일이다. 위선이야말로 황녀가 가장 잘하는 연기 중 하나이니까.
“조만간 황도에 올라가 볼 생각입니다. 그때 황녀님과 만나 다시 이야기를 잘 풀어 보겠습니다.”
“진심이냐?”
“저도 제 고집만 부릴 생각은 없습니다. 아버지의 걱정도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제야 드뇌브 후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들아. 네 말이 옳다고 해도…… 작은 일탈을 큰일로 만들지 말거라. 귀족이라면 누구든 그런 유혹에 빠질 수 있으니 말이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란 말이다. 너의 미래만이 아니라 가문의 미래가 걸린 일이다. 가끔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각하.”
아버지가 아니라 각하라 칭했다.
이번엔 시몬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그는 기꺼이 언성을 높였다.
“진심으로 작은 일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크튜러스 가문의 장남이 둘째 남편이 되는 것을 빤히 지켜보시고도요?”
“뜬소문일 뿐이다.”
“언젠가 진실을 밝힐 날이 올 겁니다. 그때 분명한 증거를 아버지께 보여 드리죠.”
시몬은 메르세데스 황녀의 취미와 취향, 좋아하는 장소를 모두 알고 있다. 또한 일로스테 남작에 대한 정보도 꽤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현장을 덮쳐 증거를 확보하는 건 일도 아니다.
중요한 건 타이밍.
‘다만, 그렇게 한다면 황실과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나빠지겠지.’
황녀의 입에서 파혼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게 하려면 이 일을 최대한 깔끔하게 끝내야 한다.
‘무엇보다도 신경 쓰이는 건 알퐁스 백작가.’
전생에 황녀가 뒤를 봐주던 가문이었다. 알퐁스 백작가는 다름 아닌 황녀의 외가이기도 했다.
‘우리 가문과 알데바란 가문의 사이가 나빠진 것도 알고 보면 알퐁스 백작가가 겁도 없이 계략을 썼기 때문이었지.’
전생에서는 결국 알데바란 후작가와 전쟁을 벌이게 된다. 전쟁에서 승리하긴 하지만, 아크튜러스 가문도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그 와중에 어부지리를 취해 부쩍 성장한 것은 알퐁스 백작가였다.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식량이나 무기 등의 전쟁 물자를 팔아 막대한 부를 채운 것.
이후에 시몬이 각고의 노력으로 다시 주도권을 빼앗아 오긴 하지만, 그 고난의 과정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후계자가 될 마음이 없는 지금에서는 더더욱 피해야 하는 전개.
‘분명 황녀와 알퐁스 백작가 사이에 커넥션이 있을 거다. 외가라는 것 이상의 커넥션이. 그걸 잡아야지.’
그래야 동생이 건강한 영지를 계승할 수 있다.
간단히 생각을 정리한 시몬이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무튼 심려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아버지. 저는 이제 성인입니다. 또한 명예로운 아크튜러스의 일원이라는 생각으로 이번 일을 깔끔히 해결해 보이겠습니다.”
“하나만 묻겠다. 넌 진심으로 황녀를 마음에 두고 있지 않은 것이냐?”
“예.”
깔끔한 한마디.
후작의 탄식이 다시금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아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버지.”
후작은 말없이 손을 내저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오자 반가운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전, 시몬의 명을 받아 조사에 나선 라니에리였다.
“생각보다 일찍 왔군.”
“황녀님도 생각보다 일찍 돌아가셨더군요.”
“왜, 눈도장이라도 찍으려고 했는데 못 찍어서 서운하냐?”
그렇게 대꾸한 시몬은 침대에 누웠다. 푹신한 쿠션이 마음을 가라앉혔다.
역시 침대가 최고였다.
“설마요. 아시잖습니까? 저는 중앙 관직에 관심이 없다는 걸 말입니다.”
“너처럼 똑똑한 사람이 황도로 가서 이름을 날려야 제국이 발전하는 건데.”
“입신양명엔 관심이 없습니다.”
그건 사실이다.
굉장히 지적이고 학자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라니에리도 밤만 되면 어떤 여인의 마음을 훔칠까 고민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각하께서 화가 많이 나셨다고 들었습니다. 다행히 무사하셨군요. 어디 하나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고 하던데.”
“누가 그런 무엄한 말을 해?”
“드비안느 양께서.”
“……조금 위험할 뻔했어. 검을 뽑으신다고 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었지.”
시몬은 드뇌브 후작과 나눈 이야기를 간단히 정리해 라니에리에게 말해 주었다.
“잘하셨습니다. 황도로 가신다고 하지 않으셨으면 정말 큰일이 났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런데 정말 물증이 있으신 겁니까?”
“당연히.”
주인의 표정을 본 라니에리는 의문을 품지 않았다. 저 자신감 넘치는 표정은 시몬의 전매특허이기도 했다.
시몬은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조사가 모두 끝났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마이너 마을에 있는 빵집은 딱 하나밖에 없더군요.”
“읊어 봐.”
시몬은 서류를 싫어했다. 그걸 잘 아는 라니에리였기에 당연히 서류는 준비하지 않았다.
“별다른 이름이 있는 빵집은 아니었습니다. 40대 중년의 남자가 빵집을 운영하고 있고, 파는 빵의 종류는 열 가지 정도 됩니다. 그곳의 빵은 황도에 비해 저렴한 편이고 맛이 좋아 평판이 좋습니다. 소문을 듣고 여행자들이 찾아올 정도라고 하더군요. 또한 주인장의 인품이 훌륭해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돕고 산다고 합니다.”
라니에리는 그 작은 빵집의 역사보다 더욱 긴 설명을 줄줄 늘어놓았다.
하지만 끝내 시몬이 원하는 정보는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해 물었다.
“종업원은 없나?”
“종업원이라고 하시면?”
라니에리가 날카롭게 캐묻고 들어왔다. 시몬은 뭔가 함정에 걸린 듯한 느낌이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아니, 보통 시골 가게라고 한다면 가족끼리 장사하는 경우가 많잖아? 40대 중년 남자 중 독신이 많던가? 그 시골에?”
“질문을 좀 더 다듬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쳐 낼 건 쳐 내고 말입니다.”
“무슨 말이야?”
“참하고 예쁜 여인이 없었는지.”
정답이 나오자, 시몬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자식, 일부러 루아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군.’
라니에리는 안경을 슥 밀어 올리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외딴곳에 있는 빵집을 조사하라고 하셔서 좀 의아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공자님 또래의 여인이 빵집에서 일하고 있더군요. 설마 그 평범한 여인이 황녀님을 밀어낸 겁니까?”
“그래서 일부러 그 정보는 빼고 나한테 말했다?”
“불충을 용서하시길.”
전혀 불충을 저지른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심지어 라니에리의 얼굴은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다.
“이것으로 궁금증이 하나 풀렸군요. 공자님의 이상형이 누구인지 알았으니, 매우 귀중한 정보가 될 것 같습니다. 으음, 아주 오랫동안 말이죠.”
“설마 그걸로 아버지와 협상할 생각은 죽어도 하지 마라. 내가 아끼는 부하이자 친구의 장례식에 찾아가기는 싫으니까.”
“그건 하수의 방식입니다. 가주님보다 공자님께 더 얻어 낼 게 많은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요.”
라니에리는 얄밉게 웃었다.
한마디로 이 건 자체를 약점으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알게 된 여인입니까? 다시 드리는 말씀이지만 공자님께서는 마이너 마을에 가 본 적이 없으실 텐데요.”
“넌 그렇게 상상력이 부족한데 어떻게 책사를 하고 있냐?”
“상상력은 작가의 덕목이지 책사의 덕목은 아닙니다만.”
“도시에 올 수도 있잖아! 빵 팔러! 요즘 황도에서 인기 있는 빵집 몰라? 그때 봤을 거라는 생각은 왜 안 해?”
“공자님은 매사에 자신감 넘치고 당당하시죠. 나쁘게 말하면 오만하고 자만심이 강합니다.”
“하, 이젠 면전에 대고 욕을 하네?”
“자기애가 강한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그런 분이 황녀님과 교제하고 계신데 평민 여인에게 눈길을 준다?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명쾌한 분석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루아가 그곳에 있다는 게 밝혀졌으니까.
“전생의 내 첫사랑이었지. 그래서 찾아보려고 했던 거였다.”
“또 회귀론입니까. 제가 믿기를 바라고 하신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이름은 루아.”
그 한마디에 라니에리가 살짝 놀랐다.
“……제가 이름을 말씀드렸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