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메르세데스 황녀 (1)
시몬은 루아를 처음 만났을 때가 선명히 떠올랐다.
마이너 마을에 지어진 가문의 별장으로 가족끼리 여행을 떠났을 때였다.
휴양에는 관심이 없어 지루했던 터라 그럴듯하게 모험가로 변장한 다음 마을을 거닐던 바로 그때.
― 갓 만든 빵 나왔어요~ 한번 드셔 보세요!
그렇게 맑고 깨끗한 목소리는 죽을 때까지도 들어 보지 못했다.
자연스레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고, 운명의 사람을 목격하게 되었다.
마이너 빵집에서 일하고 있던 여인.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녀는 빵집의 외동딸이었다. 사랑스러운 눈빛과 미소에는 부모님에게 받은 사랑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홀리듯이 빵집으로 가게 되었고, 그녀와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 어서 오세요! 모험가이신가 봐요? 못 보던 얼굴이라서요.
― 아, 예.
― 맛있는 빵이 이렇게나 많답니다? 한번 보시겠어요?
― …….
빵을 보고 골라야 했는데, 그때의 시몬은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루아를 바라보며 넋이 나가 있었다.
― 손님?
― 아, 실례 많았습니다.
― 아녜요. 그런데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을까요?
루아가 조심스레 물었고, 시몬은 고개를 내저었다.
― 아뇨. 아닙니다. 이걸로…….
― 잘 고르셨어요! 저희 빵집의 명물이죠. 몇 개나 드릴까요?
― 전부 다.
― 저, 전부 다요?
어차피 수중에 있는 돈은 넘치도록 많았다. 루아에게 환심을 사고 싶었을까. 아니면 경황이 없는 나머지 실언을 한 것일까.
―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그날 시몬은 저택으로 빵을 한가득 들고 돌아오게 되었다.
이후로도 시몬은 마이너 마을에 가끔 들러 모험가 행세를 했다. 시간이 흐르는 만큼 추억이 쌓였다. 때로는 일을 마치고 따로 만나기도 했다.
그녀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했는가 싶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알게 되었다.
아크튜러스 후작가에서는 난리가 났다.
그 혼란스러운 상황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시몬은 마이너 마을에 출입하지 못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끝나면 다행이었다.
철두철미한 드뇌브 후작은 마이너 마을에 관리를 보내 루아와 그녀의 가족들을 감시하게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시몬은 죄책감과 분노에 사로잡혔지만, 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가주의 명령은 법 위에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풋풋했던 첫사랑은 잊혀 갔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지.’
라니에리에게 조사를 맡겼으니 곧 좋은 소식을 가져올 거다. 회귀한 과거가 바뀌지 않았더라면 루아는 분명 그곳에 있을 것이다.
“공자님?”
드비안느의 목소리에 잠시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직 안 가고 있었어?”
“대답 못 들었어요.”
“수상한데.”
“뭐가요?”
“이렇게 집요한 사람은 아니었잖아? 그렇다고 나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열병이 무섭긴 무섭나 봐요. 제가 공자님을 좋아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네가 이렇게 버티고 있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것 같다 이거지. 어머니가 시켰나?”
드비안느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솔직한 성미를 지녔다. 굳이 말하자면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역시 그렇군.”
“마님께는 비밀로 해 주세요. 아무튼, 저는 마님께서 납득할 만한 답을 가지고 돌아가야 해요.”
“누구인지는 아직 알 수 없어.”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분명 후작 각하께서는 생각해 둔 사람이 있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시몬은 여유롭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보겠다는 거야.”
“메르세데스 황녀님보다 더 근사한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사람은 외모로만 평가해서는 안 되는 법이지.”
의외라는 듯, 드비안느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공자님 입에서 그런 말씀이 나오니 굉장히 신선한 느낌이네요.”
“그래도 라니에리가 하는 것보단 내 쪽이 현실적이지 않아?”
“그건 그래요. 걔는 좀 뭐랄까, 지나친 면이 있죠.”
작게 한숨을 내쉰 드비안느는 그제야 한발 물러났다.
“그럼 마님께 그대로 전해 드릴게요. 그래도 괜찮죠?”
“상관없어.”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직 루아가 그곳에 있는지 확실히 알지 못했으니까.
무엇보다도 타임라인이 정확하지가 않다.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고, 그렇다면 거처나 직업이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 이만 물러갈게요. 실례 많았습니다. 공자님.”
“잠깐.”
잠시 생각을 정리한 시몬이 그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아주 비밀스러운 모임에서 지저분하게 노는 여인이 그 행실을 지적당했을 때 어떤 감정을 느낄 것 같아?”
“갑자기요?”
“그냥 궁금해서.”
하지만 드비안느는 그 질문에 어떤 의미가 내포되었는지 금방 눈치채고는 경악했다.
“공자님…… 진심이세요? 설마 황녀님의 뒤를 캐신 건가요?”
“누구라고는 얘기하지 않았어. 그냥 일반론으로 물어본 거지.”
“…….”
“뭐, 부담스러우면 대답하지 않아도 되고.”
“수치스러울 것 같아요. 두 번 다시 얼굴을 보지 않겠죠. 욕망에 솔직한 사람이라면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합리화할 거고.”
“그렇군.”
시몬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뭔가 괜히 온 것 같은 기분이네요.”
“선택의 여지는 없었잖아? 어차피 어머니께서 보낸 거니까.”
“그래도요.”
“신경 쓰지 마라. 내가 알아서 잘할 거니까.”
“공자님만 믿을게요.”
드비안느가 물러가고, 시몬은 다시금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안락하고 따뜻한 기운이 몸을 휘감았다.
‘어쩔 수 없지만 정공법을 택해야겠어. 황녀의 치부를 드러내고 이 혼인을 무효로 돌린다.’
물증은 없지만 시몬에게는 미래 지식이 있다. 어떤 남자와 놀아났는지 그 이름 정도는 기억하고 있다.
그 사실을 지목하면 황녀는 당황할 거다. 그것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더라도 수치심을 이기지 못할 터.
‘잘 풀려야 할 텐데.’
그리고 이틀 후, 웅장한 나팔 소리가 황녀가 타고 있는 마차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 * *
시몬은 간 큰 선택을 했다.
황녀의 마차가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방에서 나가지 않은 것이다. 보다 못한 드뇌브 후작이 직접 마중을 나가야 했다.
“제국에 무궁한 영광을. 어서 오십시오. 황녀님. 정말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어머, 드뇌브 경. 이렇게 직접 나와 주시다니 영광인데요?”
고급스러운 금발과 의복은 수많은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도도한 눈빛과 입매는 모든 남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실제로 도열한 기사들은 절로 향하는 시선을 돌리기 위해 무척 애를 써야 했다.
“그런데 시몬 경의 얼굴이 안 보이네요? 오는 길에 들었을 땐 거의 나았다고 들었는데.”
“후유증이 좀 남았습니다. 으음, 이런 말씀 드리긴 송구하오나, 심리적으로 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심리적으로?”
황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죽을 고비를 넘기다 보니 좀 쇠약해진 모양입니다.”
“그럴 수 있죠. 듣자 하니 열이 정말 심하게 났다던데…….”
황녀는 놀라운 연기력을 보였다.
시몬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 가련한 표정이 가식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아크튜러스의 모든 구성원들은 그 표정이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드뇌브 후작이 안쪽을 가리켰다.
“일단 들어오십시오. 시몬도 황녀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러죠.”
곧 황녀는 시몬과 독대했다.
시몬은 드비안느의 도움을 조금 받았다. 살짝 분칠을 해 얼굴을 창백하게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게다가 실제로 병환을 겪었기 때문에 메르세데스 황녀가 기억하던 마지막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살이 많이 빠져 홀쭉해진 것이다.
“아아, 시몬 경. 정말 힘들었던 모양이군요. 얼굴이 반쪽이 되었어요.”
“나가서 인사드리지 못한 점, 사죄드립니다.”
시몬은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메르세데스가 그의 어깨를 누르며 괜찮다고 말했다.
“일어나지 말고 누워 있어요. 우리 사이에 그런 예법은 필요 없는 법이니까요.”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내 사랑 시몬. 몸은 좀 어때요? 후유증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 말 줄임에서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만약 전생이었다면 그저 연민이 섞인 말이었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어디 하나 망가지면 곤란하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이 반영된 물음이었다.
메르세데스는 지독하게 남자를 밝혔다. 그런데 시몬이 병 때문에 남자구실이라도 못 하게 되면 큰일이니까.
“몸은 이제 괜찮습니다. 수련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지요.”
“어머, 정말 다행이네요! 역시 당신은 강한 남자예요.”
“하지만 조금 혼란스럽군요.”
“무엇이 그대를 혼란스럽게 하나요?”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와서 그런지 삶 자체가 허망하게 느껴집니다.”
“그런 약한 소리는 그대와는 어울리지 않아요. 시몬 아크튜러스. 당신은 위대한 가문의 적장자잖아요? 또 나의 연인이기도 하고.”
“그래 봐야 죽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거 아닙니까?”
시몬은 씁쓸하게 웃었다.
물론 연기였다. 만약 옆에 라니에리가 있었다면 감탄하며 손뼉을 칠 정도라고 자평했다.
“시몬, 뭔가 다른 사람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저는 무섭군요.”
“어쩌면 그렇게 느끼시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다시 깨어나고 나니 세상이 다르게 보이더군요.”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요. 세상도.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도.”
메르세데스 황녀의 손이 포개졌다. 놀랍게도 시몬은 그녀의 손을 물리쳤다. 표정이 냉정하게 변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황녀님. 제가 왜 열병에 걸렸는지 아십니까?”
“알데바란 후작가에서 독살을 시도했다는 말이 있더군요. 나는 그 소문의 진상을 파헤칠 준비가 됐어요.”
황실에서도 나서겠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소용없을 거다. 그들에게는 혐의가 없으니까.
“알데바란 후작가는 이번 일에 조금도 관련이 없습니다.”
“그럼요?”
시몬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가슴을 툭 쳤다.
“아주 큰, 마음의 상처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상처라니요?”
“바로 그대 때문에.”
조용한 호수에 파문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흠칫 놀란 메르세데스는 눈매를 파르르 떨었다.
“나 때문에…… 열병을?”
“엘 루나.”
“……!”
다른 사람의 입에서 절대 나와서는 안 되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아무리 도도하고 침착한 메르세데스라도,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알고 계시는군요. 엘 루나라는 비밀 모임에 대해서.”
“아, 아뇨. 제가 잠시 착각을…….”
황녀는 시치미를 뗐다. 하지만 시몬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황녀 자신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으니까.
“아주 난잡한 사교 모임이라고 하더군요.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문 비밀 모임…… 그곳에 그대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그 충격으로 드러눕게 되었죠.”
“거, 거짓이에요! 처음 듣는 모임이라고요! 감히 누가 그런 모함을 하는 거지요? 황실 모독입니다! 용서할 수 없군요!”
“저도 모함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름 하나가 더 딸려 오더군요. 일로스테 남작…… 그와 특별한 사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쐐기가 박히자, 메르세데스 황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