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전생의 인연들 (3)
“빵집, 말입니까?”
라니에리는 시몬의 말이 잘 와닿지 않았다.
후작가에 납품하는 도심의 빵집도 아니고, 시골 마을에 있는, 이름조차 불분명한 빵집에 대해서는 왜 알아 와야 한단 말인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네.”
“그런 건 아닙니다만, 좀 궁금하긴 합니다. 무슨 바람이 부신 건지.”
“인연이 있는 곳이다.”
“그곳에 아크튜러스 가문의 별장이 있긴 합니다만, 제 기억으로 공자님께서 마이너 마을에 방문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똑똑한 책사를 두면 이런 면이 간혹 답답하다. 허투루 넘기는 게 없다.
“라니에리. 넌 좀 군말 없이 해 주면 안 되는 병에라도 걸렸냐?”
“의학적으로 그렇게 기술된 질병은 없습니다.”
“…….”
라니에리는 안경을 슥 밀어 올리며 진지하게 말했다.
“타당한 의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이너 마을은 이곳에서 꽤 멉니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시간도 필요합니다. 연고도 없는 곳을 궁금해하시는 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네가 직접 가지 말고 전서구를 보내서 사람을 시키면 되잖아. 방법을 찾아! 노력을 하란 말이다.”
그래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으나, 라니에리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명을 받듭니다. 그런데 혹시 불경한 일인 겁니까? 반란이라든지…….”
“인연이 있는 곳이라고 했잖아. 역도의 무리에게 인연이라는 표현을 쓰진 않지. 누구의 상식에 의하면 말이야.”
“음, 알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말을 몰고 달려가고 싶었다. 그곳에 루아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자리를 비울 수 없다.
전생의 인연인 메르세데스 황녀가 이곳으로 오고 있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자리를 비우면 황실모독죄가 추가될 것이다.
“꼼꼼히 알아봐. 특히 어떤 사람들이 일하고 있는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공자님.”
“왜?”
“요즘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으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입니까?”
시몬은 고개를 갸웃했다.
“제대로 먹고 있는데? 누가 그런 소리를 해?”
“식당에서 일하는 사용인에게 들었습니다. 그때 가주님을 뵌 이후로 한 번도 오지 않으셨다고요.”
“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너, 제일 맛있는 음식이 뭔지 알아?”
“브르고뉴의 식당이겠지요. 그의 명성은 황실도 알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대륙 각지를 돌아다니며 재료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쌓았죠.”
“아니.”
“제임슨의 해산물을 곁들인 요리도 손꼽히는 별미지요.”
“아닌데.”
“그럼 뭡니까?”
“침대에 편히 누워서 먹는 음식.”
설마 했던 일이 벌어지자 라니에리는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좀 움직이십시오. 요즘 침대에만 계신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사실이었군요.”
“싫은데.”
“그러다 살찝니다.”
“살찌는 거야 너같이 무예도 모르고 오러도 쓸 줄 모르는 애송이들이나 걱정하는 거겠지.”
“……공자님께서 왜 후계자 자리를 포기하겠다고 하신 건지 좀 알 것 같습니다.”
“뭔데?”
넌지시 시몬을 바라보던 라니에리는 대답도 하지 않고 방을 나가 버렸다.
‘즐겁군. 너무나도.’
시몬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처음 회귀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절망적이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즐거워졌다.
‘오랜 벗과 농담을 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지.’
말년에는 애초에 농담조차 할 수 없게 됐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마치 법처럼 작용했으니까.
‘이 기회를 마음껏 누릴 것이다.’
이제야 좀 방이 평온해진 느낌이었다.
푹신한 침대에 다시금 몸을 막 누일 그때, 하녀가 급하게 달려왔다.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다.
“가주님께서 급히 부르십니다.”
“급히?”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시몬은 침대에서 빠져나와 드뇌브 후작의 집무실을 찾았다.
“아버지, 시몬입니다.”
“들어와라.”
후작은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피어오르는 짙은 연기가 그의 표정을 제대로 읽지 못하게 방해했다.
“앉거라.”
“예.”
전혀 급해 보이지 않았다. 후욱, 하고 담배 연기를 내뿜은 후작이 말했다.
“며칠 전에 분명 황녀께서 오실 거라고 너에게 이야기했었다, 잊은 건 아니겠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게냐? 설마 황녀께서 저택으로 오실 때까지 침대에 처박혀 기다리고만 있을 셈이냐?”
잔잔한 분노가 느껴졌다.
시몬이 좀처럼 침대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후작의 귀에까지 들어간 게 분명했다.
그보다 메르세데스 황녀가 온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데도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는 아들이 답답하게 느껴졌겠지.
하지만 시몬은 당황하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젊어지긴 했어도 그의 영혼은 백 년 묵은 능구렁이와 다를 게 없었다.
“아버지께서 잊고 계신 게 하나 있군요. 서운합니다.”
“뭐가 그리도 서운하더냐? 서운한 걸로 따지면 내가 더 크겠지. 믿고 가문을 맡기려던 아들이 반기를 들었으니 말이다.”
“저는 열병을 앓았습니다.”
“결국 한다는 말이 열병뿐이냐? 열병이 너의 창의성까지 빼앗아 간 모양이구나.”
“죽을 정도로 심한 고열에 시달렸지요. 혼수상태에 빠졌었다는 걸 아버지도 아실 터인데, 왜 마중을 강요하시는 겁니까? 아무리 상대가 황실이라고 해도 우리 가문의 명예를 굽힐 필요는 없습니다. 이익을 취할 때는 취해야지요.”
병환 중이니 굳이 나갈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일리가 있는 말이라 후작은 묵묵히 아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오히려 혼란스러웠다.
아들이 후유증을 앓고 있는데 이리도 영민한 모습을 보이다니. 가주 자리를 잇지 않겠다는 말이 진심이었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기왕 이렇게 독대하게 됐으니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조만간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떠난다니, 어디로?”
“거처를 물색하고 있습니다. 최대한 조용하고 한적한 곳으로 갈까 합니다.”
아버지가 한숨을 내쉴 줄 알았다.
하지만 의외로 드뇌브 후작은 태연했다. 담배를 끄더니 차가운 눈으로 시몬을 응시했다.
“마음 편한 소리를 하는구나. 시몬. 너를 따르는 가신들이 지금 얼마나 동요하고 있는지 살피지도 않고 말이다.”
“그들의 마음은 갈대와도 같은 겁니다. 결국 힘 있는 사람에게 마음을 돌리겠지요.”
“…….”
이 한마디만큼은 힘이 있었다.
아직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아들은 가주를 한번 해 본 것처럼 자연스럽게 가신들을 평가하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그들의 힘을 빌려도 모자랄 판이었을 텐데.
“좋다. 허락하지.”
이렇게 쉽게 허락이 떨어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조건이 있다. 황녀께서 오시면 진심을 다하도록. 그래, 그렇지. 약혼식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좋겠군. 언제까지 마음만 나눌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더냐?”
“가문을 잇지 않는 장자 따위는 눈에 차지 않으실 텐데요.”
“약혼이 성사되면 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설마 황실에서 가문의 일에 간섭을 하겠습니까?”
“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더냐?”
그제야 드뇌브 후작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황실의 입장에서도 기왕 황녀를 출가시키는 거라면 후계자에게 보내는 것이 이익이다. 결국 제국을 지탱하는 것은 귀족들이었으니까.
황실을 개입시켜 후계를 확정한다.
과연, 아크튜러스 후작가의 주인다운 발상이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저도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군요.”
“말해 보거라.”
“만약 황녀께서 이 결혼을 물리고 싶다고 직접 말씀하신다면, 저는 기꺼이 다른 사람을 찾아보겠습니다.”
“좋다. 허락하마.”
“그뿐이 아닙니다.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아버지께서 허락해 주셔야 합니다.”
마치 시몬은 점찍은 사람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드뇌브 후작은 잠시 주저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황실 입장에서, 그리고 황녀 입장에서도 절대 손해 볼 게 없는 장사였기 때문에.
“약속하마.”
“감사합니다. 아버지.”
시몬은 가벼운 마음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이제 메르세데스의 마음을 돌릴 방법을 찾아야 했다.
* * *
그날 오후, 잠시 잊고 있었던 손님이 찾아왔다.
“그게 정말이에요? 공자님이 점찍은 여인이 따로 있다는 게?”
“드비안느.”
“왜요.”
“오랜만에 봤으면 안부라도 묻는 게 순서 아닌가?”
드비안느 로이드.
로이드 남작가의 차녀로, 드뇌브 후작의 정실부인인 헤라의 시녀로 일하고 있다.
아크튜러스 가문에서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로이드의 가주가 힘을 쓴 결과였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는 이 녀석하고도 줄곧 어울리곤 했었는데.’
드비안느는 시몬뿐만 아니라 라니에리와도 친하게 지냈다.
겉으로는 여자를 울리는 나쁜 남자라고 툴툴거리곤 했지만, 속으로는 서로를 존중해 주었다.
‘어느 순간 연락이 끊겼었지. 그게 언제였더라.’
아련한 추억에 시몬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시몬이 갑작스럽게 웃자 당황한 드비안느가 드레스 끝단을 잡고 정중히 인사했다.
“공자님을 뵙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어디서 들은 거야?”
“가주님께 들었어요.”
“역시 그랬군.”
결혼은 가문의 중대사다. 그 이야기를 어머니와 공유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시중을 들다 그 이야기를 듣게 된 것 같다.
“아버지께서도 실수하실 때가 있군. 시녀는 물리고 그런 말씀을 하셔야지.”
“오히려 반대가 아닐까요?”
“반대?”
“결국은 본인 말대로 될 거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철없는 아들이 쪽팔림을 당해야 정신을 차릴 거라는 일종의 메타포겠죠.”
시몬은 픽 웃었다.
“네가 그렇게 내 결혼에 관심이 있는 줄 몰랐군.”
“당연히 관심이 있죠! 공자님이 황녀님과 결혼하셔야 제가 황녀님의 시녀로 지원해 볼 수 있는 거잖아요.”
“역시 그런 속셈이었나.”
“우리 아버지, 저 키우느라 정말 고생 많이 하셨다구요. 황도로 가서 출세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러니까 빨리 결혼해 주세요. 아니, 하세요.”
“누가 들으면 너랑 결혼하라는 줄 알겠네.”
그러자 드비안느의 예쁘장한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누, 누가 결혼을 해요! 그런 말씀은 하시면 안 되죠!”
“너 얼굴 빨개졌어.”
“더워서 그래요. 더워서! 어휴!”
손으로 부채질한 드비안느는 간신히 마음을 추슬렀다. 시몬이 물었다.
“어머니 반응은 어떠셨어?”
“엄청 화가 많이 나셨…… 아니지, 음음. 방금 건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차분히 말씀하셨답니다. 우리 아들을 믿는다고.”
“안 봐도 훤하다.”
“근데 정말 마음에 두신 분이 따로 있는 거예요?”
“넌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어휴, 소름이야!”
그러다 문득 궁금한 게 떠올랐다. 전생에서는 묻지 못했던 것들이.
“드비안느. 너는 왜 시녀가 되었지?”
“가문을 위해서죠. 언제까지 남작가로 살아갈 수는 없으니까. 말이 남작가지 가세를 따지면 준남작이나 진배없다구요.”
“즐거워?”
드비안느는 눈을 깜빡였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나름…… 즐겁죠? 마님께서 잘 챙겨 주시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절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도 좀 즐겁고?”
“속물이군.”
“칭찬으로 들을게요.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는 건데요?”
“그냥.”
그렇게 말하곤 시몬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노을이 아름답게 지고 있었다.
“열병이 무섭긴 무섭나 보네요. 이렇게 감상적으로 되시다니.”
“남자 구실엔 전혀 문제없으니 걱정은 넣어 둬.”
“오, 주님. 우리 가여운 공자님께 자비를 베푸시옵소서…… 아니지, 아니야! 차라리 벼락을 맞으시는 게 더 빨리 정신을 차리시겠죠?”
“하하하하.”
시원한 웃음소리.
드비안느는 그 모습이 조금 이질적이면서도 싫지 않았다. 왠지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서.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지 마세요. 도대체 누구예요? 점찍은 그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