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전생의 인연들 (2)
그 이후로 며칠 동안 시몬은 침대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할 필요도 있었고, 며칠 후면 도착할 황녀를 어떻게 쫓아내야 할지 고민해야 했기 때문이다.
‘역시 라니에리의 말이 맞아. 피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가장 좋은 것은 메르세데스 황녀의 입에서 파혼이라는 단어가 나오게 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치밀한 계획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황녀에게 회귀 운운할 수는 없는데.’
드뇌브 후작이 분명히 경고했다.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아버지가 하지 말라는 건 안 하는 게 좋지.’
괜히 살쾡이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나게 되는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다. 아크튜러스의 가풍은 엄격 그 자체였으니까.
후유증을 내세우는 것도 한계가 있을 터.
빼꼼.
그때 열린 문으로 누군가가 머리를 슬쩍 들이밀었다.
이올린이었다.
“이올린.”
“아앗!”
숨바꼭질에서 들킨 사람처럼, 이올린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빼 버렸다. 시몬은 자상한 목소리로 동생을 불렀다.
“이올린. 들어와도 돼.”
“아녜요…….”
“어서 들어와라.”
새로운 곰 인형을 품에 안은 이올린이 눈치를 보며 안으로 들어왔다. 전에 준 인형이 마음에 드는지 품에 꼭 껴안고 있다.
전생에서는 막내에게 신경을 써 주지 못했다.
그러다 나이가 차서 정략결혼을 올려 출가한 것으로 기억이 끝났다.
그 이후에는 가끔 편지가 왔을 뿐이다.
‘네 인생은 행복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라비로서, 아크튜러스의 가주로서 그 한마디 정도는 물어봐도 좋았을 텐데.
날아온 편지에 답장 한 줄이라도 써 줬다면 동생에게 큰 힘이 되었을 텐데.
그런 후회가 물밀 듯 밀려왔다.
하지만 시몬은 후회만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표정이 드라마틱하게 바뀌었다.
‘걱정하지 마라. 전생에서는 모르겠지만 이번 생은 행복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그렇게 이올린이 시몬 앞에 섰다.
여전히 두려워하는 게 느껴졌다. 마음의 벽을 허무는 게 쉽지는 않아 보였다.
“거기서 뭐 하고 있었어?”
“저기, 오라버니가 많이 아프다고 들어서…….”
“누가?”
“아버지가요.”
가문을 잇지 않겠다는 충격적인 말을 병환이 심해졌다는 이야기로 승화시킨 것 같았다.
실제로 그랬다.
요즘 문병을 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뚝 끊긴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후작이 손을 쓴 것 같았다.
“아버지가 보내서 온 거구나.”
“아니에요! 제가, 왔어요. 오라버니가 걱정되어서…….”
“그래? 난 괜찮다. 봐라, 아무렇지도 않지?”
“그, 마음이…….”
“마음도 멀쩡해.”
시몬은 손을 뻗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제야 걱정스러운 표정이 조금 풀렸다.
“쿠키 먹을래?”
끄덕끄덕.
이올린이 귀엽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몬은 아까 하녀가 놓고 간 쿠키 하나를 집어 이올린의 입에 넣어 주었다.
“맛있지?”
“네!”
“그런데 케나드는 뭐 하고 있어?”
“수련하고 있어요.”
“가서 간식 좀 챙겨 줘. 맛있는 건 나눠 먹어야 기쁜 법이지. 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네!”
머뭇머뭇거리던 이올린이 숙녀처럼 예를 표했다. 너무 귀여운 모습에 시몬이 씨익 웃고 말았다.
“이올린. 앞으로는 그렇게 인사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언제든 오고 싶을 때 놀러 오도록 해.”
“네, 감사합니다!”
“감사하다는 말도 안 해도 돼.”
“왜……요?”
“가족이니까.”
“가족…….”
그렇게 중얼거린 이올린이 활짝 웃으며 방을 나섰다. 기다렸다는 듯 하녀가 조심스레 다가와 보고했다.
“도련님. 한스 단장께서 뵙기를 청하셨어요.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한스가? 들어오라고 해.”
시몬은 침대에 머리를 괸 채로 비스듬히 누워 제2기사단장 한스를 응시했다.
얼마 전 비상벨 사건 이후로 잔뜩 위축된 한스였지만, 최대한 당당히 들어와 시몬에게 군례를 취했다.
“공자님을 뵙습니다.”
“그래. 훈련은 잘돼 가? 특별 훈련을 한다고 했었지 아마.”
“잘되고 있습니다. 이젠 1기사단에게 뒤처지지 않을 겁니다.”
“하하하.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하긴, 때론 절박한 상황이 훈련의 성과를 높이곤 하니까. 그런데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왔냐? 자랑을 하러 온 건 아닐 테고.”
“어, 그게…… 슬슬 오전 훈련에 참가하시는 게 어떨까 말씀드리고 싶어서 말입니다.”
“쯧. 가주께서 입김을 넣으신 모양이군.”
한스는 굳이 부정하지 못했다. 하루라도 훈련을 쉬는 걸 죄악시하던 사람이 바로 드뇌브 후작이었으니까.
몸이 힘들면 딴생각을 하지 못하는 법.
극한의 훈련을 통해 정신을 건강하게 하려는 후작의 배려이기도 했다.
“네 생각은 어때?”
“음…… 조심스레 말씀드리면, 간단히 체술이라도 연마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훈련을 하루라도 쉬면 몸이 굳는 법이니까요.”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아서 한심하게 보였나?”
“아, 아닙니다! 결코 그런 게 아닙니다!”
“농담이야.”
한스의 말이 옳다. 한창 수련할 때는 매일 몸을 움직여 주는 것이 좋다.
‘하지만 내 경우는 다르지.’
이미 전생에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상황이다. 그 모든 지식이 머릿속에 있었고, 훈련은 필요할 때만 하면 그만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안락한 침대에서 벗어날 생각은 없었다.
“후유증이 좀 남았다. 게다가 굳이 훈련할 필요도 못 느끼겠고.”
“예?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는 건 어인 말씀이십니까?”
“아크튜러스 검식은 지루하단 말이지.”
“……!”
정확히 말하면 현재의 검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시몬은 이미 한층 발전된 검식을 체득하고 있었다.
경악한 한스의 눈이 매서워졌다.
“……인정할 수 없습니다.”
“뭘?”
“아크튜러스 검식은 완벽합니다! 결코 지루하지 않습니다! 공자님! 그 말씀, 취소해 주십시오!”
자부심이 느껴지는 외침. 하긴, 한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우직하고 자존심 강한 기사.
하품한 시몬은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취소는 어렵겠고. 일어나기 귀찮지만, 한번 입증해 볼까.”
시몬은 한쪽에 놓인 자신의 검을 들었다.
스릉!
아주 훌륭한 검은 아니었다.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철검.
하지만 시몬에게는 그 검에 담긴 잠재력을 끌어올릴 만한 능력이 있었다.
“한스. 너는 아크튜러스 검식의 살검 단계에 있겠지?”
“그렇습니다.”
아크튜러스 검식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가장 기초적인 검식은 ‘격검’이다. 가문의 기사들 대부분은 격검 단계를 이수하고 그것을 실전에 활용한다. 기본적인 오러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살검’ 단계는 가문에서 선택한 기사와 방계만 배울 수 있는 중급 검식이다. 오러의 강도도 올라가기 때문에 단순히 노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경지다.
마지막으로 ‘심검’은 가문의 직계들만 전수받을 수 있는 가문의 비기다. 현재 아크튜러스 가문에서는 가주인 드뇌브만이 익히고 있는 고도의 검식이다.
‘지금 시기의 나는 격검 단계를 막 마무리할 때였지.’
하지만 머릿속에 든 지식은 ‘심검’ 단계를 초월했다. 문제는 머릿속에 든 지식을 어떻게 육체로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심검을 무리하게 펼치게 되면 위험해진다. 살검 정도에서 끝내야 해. 그 묘리를 알고 있으니, 적당히 공격을 파훼하면 되겠군.’
만약 상대를 죽여야 하는 싸움이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검을 떨어트리는 식으로 무력화만 시키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다.
검을 쥐자 가슴이 격동하기 시작했다.
‘그래, 바로 이거지.’
잠시 잊고 있던 즐거움을 되찾은 사람처럼 시몬은 씨익 웃었다.
“내가 갈까? 아니면 네가 먼저 올래?”
“제가 가겠습니다.”
“봐주거나 그러지 마라. 괜히 그랬다가는 네 목이 날아갈 수도 있으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덤벼.”
기합을 내지른 한스가 달려들었다.
‘방패를 들지 않은 상태에서 양손으로 검을 휘두른다. 그렇다면 밸런스가 무너지게 된다.’
물론 살검 단계에 있는 한스의 빈틈을 찾아내기는 쉬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몬의 눈에는 너무나도 크게 보였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동작이 커지는 그 접점에서, 시몬은 날카롭게 검을 내질렀다.
챙!
따앙! 채쟁!
단지 세 번 검이 부딪혔을 뿐이었다.
그런데 검을 떨어트리고 주저앉은 쪽은 한스 단장이었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시몬은 검을 그의 목에 드리우며 말했다.
“세 합 만에 검을 놓치고 자빠진 기사단장이 있다? 어디에? 아크튜러스 가문에.”
“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2기사단장 한스는 시몬에게 검을 가르쳐 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으니까.
아무리 실력 차가 나더라도 세 합 만에 상대를 제압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쉽지 않은 일이 현실이 되었다.
“훈련이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그대인 것 같군. 자아, 이 재미있는 일을 그냥 넘기긴 좀 아쉬우니까…… 사실대로 보고할까, 아니면 네가 적당히 꾸며서 훈련한 것으로 처리해 줄래?”
“패, 패배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호오, 기사답지 않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군.”
“이번엔 제대로 가겠습니다.”
실력의 차이가 극명히 나면 이런 일이 자주 있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단순한 실수나 착각으로 여기기 마련이다.
“후회할 텐데. 세 합이 두 합으로 줄어들 수도 있는 거거든.”
“먼저 오십시오!”
한스는 제대로 방어 태세를 취했다. 모범적인 아크튜러스 검식을 따르고 있었다.
정말 견고해서 마치 바위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몬에겐 아니었다.
“굳이 두 번 휘두를 필요도 없겠군. 약점이 너무 크게 보여서 한 번으로 끝낼 수 있겠어.”
“얕잡아 보지 마십쇼!”
“좋아. 검기 없이 오리지널로 간다.”
말이 끝나자마자 시몬의 신형이 흔들렸고, 똑바로 인지하기도 전에 날카로운 검이 심장을 향했다.
쩌저정!
한스는 황망히 검을 쳐 냈으나 목덜미로 서늘한 한기를 느끼고 말았다.
스슷.
따가운 느낌과 함께 뜨거운 피가 흘러나왔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피 분수가 터지는 상황.
“이거 어쩌나? 상황이 더 나빠진 것 같은데.”
“공자님. 이게 어찌 된…….”
“아직도 파악이 안 돼?”
시몬은 검을 거두고 한쪽으로 가 손수건을 챙겼다. 그러곤 그 위에 약을 뿌려 한스의 상처에 대 주었다.
쓰라린 느낌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가, 감사합니다.”
“한스 경.”
“예…….”
“후계자 자리는 그리 만만한 게 아니야. 너무 완벽하면 그만큼 질투하거나 적대시하는 세력이 늘기 마련이지. 때로는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지름길인 법이야.”
“설마 실력을 숨기고 계셨던 겁니까?”
“아니 뭐, 꼭 숨긴 건 아니고, 그냥.”
시몬은 대강 얼버무렸다. 한스의 눈에서 한없는 존경의 눈빛이 흘러나오고 있어서 너무 부담스러웠다.
“제 불충을 용서해 주십시오!”
“아아, 뭐 불충까지는 아니고…… 그 뭐냐, 그 훈련 건은 알아서 해 줄 수 있지? 둘이 비밀 훈련한다고 대강 둘러대 줘.”
“공자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다행히 한스는 융통성을 발휘했다. 거기에 약간의 충성심도 얻은 것 같다.
“너에게 감정이 있어서 이러는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말고. 훈련, 나도 하고 싶지! 몸이 근질근질하다고. 하지만 쉴 때는 또 푹 쉬어야 하는 게 아니겠어?”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서 훈련하라고.”
실제로 한스는 나중에 기사단장에 걸맞은 공을 톡톡히 세운다. 굳이 따지자면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게 좋다는 의미다.
같이 시골로 내려가자고 하면 응할지는 모르겠지만.
“가서 라니에리를 좀 불러 주겠나?”
“명을 따릅니다!”
잠시 후 라니에리가 찾아왔다. 어느새 침대에 몸을 누인 시몬이 말했다.
“마이너 마을, 알고 있지?”
“예. 영지의 끝자락에 있는 작은 마을이지요. 그런데 갑자기 마이너 마을은 왜 찾으십니까?”
“네가 좀 알아봐 줘야 할 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