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50
“그거 알아? 1200억 사기 대출 사건 말이야. 하 차장 때문에 우리 여신협의회 체면이 말이 아니었었지.”
취기가 오르자 리스크관리팀 고연석 부장이 그렇게 푸념을 한다.
그런 고연석 부장의 말을 여신심사부 이혁수 부장이 반박을 했다.
“사실 하 차장 때문은 아니지. 우리가 놓친 거지. 어떻게 그걸 놓칠 수가 있었던 건지······.”
“박성동이란 인간이 그만큼 철저하게 준비를 했던 거죠 뭐.”
“사실 박성동이 아니라 그 인간이랑 손잡고 서류를 조작한 신라은행 담당자가 대단했어. 아주 제대로 속아 넘어갔지. 그 정도면 재능인데, 그 재능을 엉뚱한 데다 썼으니······.”
다들 취하긴 취했나 보다.
범죄자들을 칭찬까지 하고 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식은땀이 다 난다니까.”
“그때 하 차장이 막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지······ 거기서 내 은행 생활도 종 칠 뻔했지.”
내겐 무용담이지만 그들에겐 목이 달아날 뻔했던 공포스러운 기억.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 그 공포와 치욕의 사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김강철 수석부행장 밖에 없다.
당시에는 수석부행장이 아니었고, 그러니 당연히 여신협의회의 수장도 아니었다.
‘근데······.’
왜 그 이야기의 결론이 또 내 앞에 내밀어지는 술잔인 거냐고!
“그땐 진짜 하 차장 덕분에 살았어. 자자, 내 술 한잔 더 받아.”
그사이 받아 마신 술만 해도 이미 목까지 찼다.
“그렇죠. 다 제 덕분이죠. 그러니까 그 신세 잊으시면 안 됩니다. 하하.”
받아마셨다.
당장 내일 숙취에 쩔어서 업무를 못 보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런 자리의 분위기를 깰 수야 없는 노릇이니까.
다행인 것은 다들 취기가 제법 오른 듯하자 김강철 수석부행장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며 회식을 마무리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하 차장을 알게 된 지도 2년이 다 되어가는군. 아니, 2년도 안 되었다고 하는 게 맞나?”
김강철 수석부행장의 차 안이었다.
대리를 부르려고 했더니 자기 차로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주차장에 세워둔 지바겐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수석부행장의 배려를 거절할 수야 없는 노릇. 게다가 내게 뭔가 따로 할 말도 있는 것 같았다.
“대리일 때 만났는데 2년도 안 된 시간에 벌써 차장이라······ 30년을 은행원으로 살았지만 자네 같은 경우는 처음이야.”
“다 수석부행장님이 좋게 봐주신 덕분입니다.”
빈말이 아니었다.
적어도 과장 특진은 김강철 수석부행장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었다.
“내 덕이라고 하긴 민망하군. 그간 자네가 세운 공이 얼만데. 그래서 행장님도 자네를 예뻐하시는 거고. 하 차장에 대한 행장님의 믿음이 아주 깊어. 30년을 모셔온 분이지만 그분이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신뢰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거든.”
역시 지난 번 여섯 건의 만기 대출 건 덕분이다.
결국 여섯 건이 모두 부실 대출로 결론이 나면서, 날 무슨 신기라도 있는 것처럼 보던 행장이었다.
‘의외로 미신 같은 거에 잘 빠지는 타입일지도······.’
“자네, 조 상무와 가까이 지낸다지?”
잠시 방심하고 있다가 조 상무란 이름에 순간 술이 확 깨는 느낌이다.
부석부행장의 입에서 정적의 이름이 나오는데 긴장이 안 될 수가 있나.
솔직하게 말했다.
“가까이 지내는 건 아닙니다. 일전에 몇 번 식사 자리에 초대를 받긴 했지만, 좀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어서 요즘은 웬만하면 피해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렇잖아도 당분간은 거리를 두라고 말해주려던 참이니까.”
“······?”
“곧 조 상무에 대한 인사이동이 있을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 행장님께서 칼을 빼 드신 거지. 자네도 알다시피 예전 셀프대출 건이나 KG브레이크를 통한 상장 시도 같은 경우만 해도 증가만 없다 뿐이지 조 상무가 관여했다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잖아. 그런 과격한 행보가 그거 한 번만도 아니고. 금감원이나 정재계에 인맥이 상당해서 지금까진 그냥 두고만 본 거지만, 우리 한성 입장에선 시한폭탄 같은 사람이지. 게다가 이번 행장 선출 과정에서 행장님의 심기를 건드린 면도 있고.”
유종원 행장이 4연임을 맞아 결국 그 시한폭탄을 제거하기로 한 것이다.
아주 뜬금없는 소식은 아니었다.
임원들의 대대적인 인사개편에도 조성환 상무만 쏙 빠져있어서, 그때부터 이미 유행장이 조성환 상무를 쳐내기로 한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었다.
그런데 유종원 행장의 심기를 건드렸다니?
“행장 선출 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외압이 있었어. 물론 그 외압이 통하진 않았지만.”
은행 인사에 정치권이 개입하는 게 아주 없었던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로 인한 폐단이 워낙에 심각했기에 법도 바뀌었고 자정 안도 마련이 되었다. 그럼에도 정권의 실세 하나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려고 한 적이 있었지만, 행장추천위원회의 폭로까지 이어지면서 한바탕 난리가 난 후, 한성은행에서 이제 그런 구시대적인 폐습은 완전히 사라진 걸로 알고 있었다.
“물론 조 상무가 그런 멍청한 일을 지시했을 리는 없고, 그 주변 인맥이 좀 오버를 한 모양이지만, 어쨌든 더는 조 상무를 안고 가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신 거야.”
“인사이동이라면 어디로?”
“자회사인 한성파이낸스 사장으로 가게 될 거야.”
한성파이낸스라면 소액대출 등을 주 업무로 하는 곳이다.
그야말로 한직.
조성환 상무 입장에선 굴욕적인 좌천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인간이라면 거기서도 왠지 조용히 있지는 않을 것 같은 예감.
“그러니까 괜히 그런 일에 휩쓸리지 않게 조 상무와는 거리를 둬.”
“예.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번 해강 건은······ 아주 잘 했네. 이걸로 가야와의 격차를 더 벌릴 수 있게 되었다고 행장님도 아주 기뻐하셨고. 거기다 4연임에 대한 불만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이거면 그 불만들도 한방에 잠재울 수 있겠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또 행장에게 절실히 필요한 최고의 선물을 가져다 준 셈이다.
'이러니 날 예뻐하지 않을 수가 있나,'
만일 이번 행장 선출 건으로 인해 행장과 부행장이 한 배를 타지 않고 그대로 정적의 관계에 머물러 있었다면, 지금 이 차 안이 참 불편한 공간이 되어있지 않았을까?
“그래도 이제 첫걸음을 내딛은 것 뿐인데요 뭐. 지금부터가 더 중요하죠. 해강중공업을 다시 제 궤도에 올려놓지 않으면 오히려 행장님께 폐를 끼치게 되는 거니까.”
“그래. 지금부터지. 오종록 대표의 의지가 꺾이거나 바뀌지 않게 자네가 옆에서 잘 케어 해야 할 거야.”
“예!”
“그나저나 궁금하군. 내일 개선안과 더불어 우리 한성이 도우미로 나선 게 발표가 되면, 가야은행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고 한성의 경쟁 은행은 신라가 아니라 가야였다. 특히 김강철 수석부행장이 영업점에서 활동하던 시기엔 2위 경쟁이란 말조차 민망할 정도로 격차가 커서 무시도 꽤 당했다고 들었다.
저 비릿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는 아마도 그때의 앙금이 아닐까?
나도 궁금하긴 하다.
잘난 척하며 거만을 떨던 이일호 차장은 또 어떤 얼굴을 하게 될지.
※※※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기업금융지점 송승섭 지점장이 이일호 차장을 보며 따지듯 묻는다.
조금 전에 올라온 해강의 기업 공시를 본 때문이다.
“해강건설 매각한다는 건 그냥 급하니까 하는 말일 뿐이라며? 오종록 대표는 그런 의지 자체가 없는 사람이라며? 근데 이 개선안은 다 뭐야?”
이일호 차장도 아침에 올라온 그 발표가 아직도 황당하기만 했다.
자신이 그렇게도 해강건설을 매각해야 한다고 할 때는 완전 벽창호가 따로 없던 사람이, 가야가 손을 떼자마자 매각을 하겠다지 않나, 게다가 아예 기업을 갈아엎는 수준의 이 혹독한 개선안은 또 뭐란 말인가?
“그냥······ 이번에도 워낙 급하니까 그냥 아무렇게나 둘러대는 것뿐입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둘러대는 말에 한성이 4천억이나 추가로 대출을 해줬다고?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해강중공업에 대해선 제가 가장 잘 압니다. 한성이 돕는다고 해도 그렇게 간단히 좋아질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실적 욕심에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될 짐덩이를 우리 대신 떠안은 겁니다.”
“확실해?”
“예! 그렇지 않다면 제가 왜 해강을 버려야 한다고 했겠습니까? 오히려 이건 우리 가야로서는 손실 없이 손을 털 수 있는 최고의 기회입니다.”
사실 해강중공업과의 거래를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한 건 이일호였다.
하성운 차장 앞에서는 대단한 의리인양 떠들어 대긴 했지만, 이일호에겐 그렇게 애정이 깊은 곳도 아니었다.
가야와는 이십 년이 넘는 동반자였다고 해도 그가 담당하게 된 건 고작 4년이었고, 그 4년 동안 해강중공업은 악화일로를 걷기만 했으니까.
그 때문에 위에선 개선방안을 찾으라고 매일 같이 닦달을 해대고, 오종록 대표는 똥고집만 부려대고, 그 바람에 자신의 고과는 바닥을 치고······ 정말이지 똥도 그런 똥이 없었다.
당장에라도 치워버리고 싶은 그런 똥.
그런 차에 해강건설의 순손실 사건이 터졌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이참에 그냥 깔끔하게 털어버리자 싶었다.
그게 자신에게도, 가야은행을 위해서도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다소 감정적이었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해강중공업의 부채부터, 재정 상태, 업황, 경기, 앞으로 예상되는 실적, 그리고 오너의 마인드까지, 그가 가진 해강중공업에 대한 테이터들을 충분히 고려한 후의 판단이었다.
그러니 가야은행의 윗선에서도 해강중공업과의 거래를 중단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해강중공업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리라고는 눈곱 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 확신에 송승섭 지점장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정을 찾는다.
“확실한 거지?”
“예. 이번엔 한성이 완전 잘못 판단한 겁니다!”
“좋아. 이 차장을 믿지.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니까, 이 개선안들이 제대로 이루어졌을 때 해강중공업의 회생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데이터부터 뽑아봐. 만에 하나라도 회생 가능성이 높다면 우리도 포지션 변경을 고려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애초에 이런 개선안들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다니까요.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종록 대표는.”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거야 없잖아!”
하지만, 가야은행이 포지션을 변경할 일은 없었다.
이일호가 해강중공업의 회생 가능성에 대한 데이터에도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았을뿐더러, 포지션을 변경할 틈도 없이, 해강중공업이 4천5백억에 이르는 가야은행의 채무를 한방에 다 갚아버렸기 때문이다.
오히려 해강중공업이 아니라 가야은행이 손절을 당한 것이다.
※※※
이일호의 예상과는 달리 해강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해강건설의 지분과 비핵심자산 매각만 해도 예상했던 것보다 덤벼드는 인수처가 많았다.
덕분에 예상했던 인수가보다 가격도 상당히 높게 받을 수 있었다.
아직 유상증자는 진행 전인데도 가야은행의 채무를 다 갚아버리고도 여유가 있을 정도였다. 물론 그 여유는 거의 대부분 신사업에 대한 투자로 전환되었다.
그로 인해 시장의 시선도 변했다.
그 변화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듯, 끝도 없이 바닥을 찍던 주가가 드디어 반등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 바람에 가야은행은 거의 초상집이 되어있었다.
“이봐! 이 차장!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해강은 가망이 없댔잖아!”
물론 정말 가망이 없게 된 건 이일호 차장이였다.
눈앞이 아득해지는 절망감.
그러면서도 도무지 받아들여 지지가 않는 현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럴 리가 없잖아?’
대체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순간 뇌리를 스쳐가는 얼굴 하나.
그래. 모든 게 오종록 그 빌어먹을 늙은이 때문이다.
'이 망할 영감탱이가······ 내가 그렇게 설득을 할 때는 들은 척도 않더니 왜 한성한텐 갑자기 순한 양처럼 구는 거냐고!’
※※※
그렇게 순한 양이 된 오종록 대표는 우리와의 협의 내용을 충실하게 따랐다. 오히려 희망이 보이자 해강중공업의 회생 의지를 불태우며 더욱 적극적으로 임했다.
나도 거의 매일 해강중공업으로 출근하다시피하며 혹시 생길지 모를 나태와 방만을 감시했고,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도왔다.
이대로라면 변동정보대로 신용 회복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날도 그렇게 해강중공업에 들렀다가 지점으로 돌아온 길이었다.
기업금융팀 사무실에 낯익은 얼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가운 얼굴.
“창주 씨?”
금융계 귀족가 도련님인 이창주였다.
“창주 씨가 여긴 어떻게 왔어?”
장원 지점에 있어야 할 그가 왜 여기 있는 것일까?
“인사발령이 났습니다.”
“인사발령?”
아직 확인 못했다.
“어디로 가는데?”
“여기요.”
“뭐?”
“다음 달부터 저도 여기 RM으로 근무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리 인사 드리러 왔습니다.”
“······.”
“그러니까 한 달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때부터 차장님 커피는 다시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순간 반사적으로 내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도정우 대리가 있었다.
“······.”
< 인사발령이 났습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