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49
유종원 행장이 한성은행 최초로 4연임에 성공한 후, 왠지 상주는 게 일이 되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러니까······ 추가 대출 승인이 났다고?”
“예. 방금 지점장님으로부터 행장님의 결재가 떨어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
내 말을 들은 오종록 대표의 눈이 그렁그렁해진다.
지독한 가난으로 중학교 교육도 받지 못한 채 그 어린 나이에 노가다 판에 뛰어들었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생각하면 어린아이들이 그 험한 노가다 판에서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벌었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된다.
그런 사람이 해강중공업을 일으켰다.
그야말로 시대의 거인.
그 시대의 거인이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있다.
지난 보름은 지옥이었다.
연일 떨어지는 주가, 하루가 다르게 채권단의 압박은 더해졌고, 이런저런 빚들의 상환 날짜도 임박해 오고 있었다.
믿을 건 한성은행 뿐인데, 여신협의회의 심사는 길어만 지고 있고.
내가 간간이 긍정적인 소식을 전했지만 그 정도로는 불안을 지우기엔 역부족이다.
여신협의외의 결정이 거절로 나게 되면 그땐 부도 선언을 해야 할 만큼 지난 보름 동안의 상황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심각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도 제대로 못 잤는지 그 사이 많이 수척해졌다.
내 손을 잡은 손의 주름이 더 많아지고 깊어져 보인다.
평생을 일궈온 해강이 이렇게도 간단히 무너질 수 있다는 걸 뼈저리게 깨닫게 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거면 되었다.
그렇게 가슴 졸인 시간들로 인해 이번 위기를 극복하고 나면 해강은 보다 단단해질 거라는 확신.
“이제 재무 개선안과 함께 한성은행의 추가 대출을 공시하시면 됩니다. 그럼 상황이 많이 좋아질 겁니다.”
해강중공업이 벼랑 끝까지 내몰린 데에는 해강건설의 악재가 큰 몫을 하긴 했지만, 결정적인 한 방은 가야은행이었다.
가야은행이 등을 돌리면서 채권단의 불안이 가중된 것이 해강중공업을 급전직하로 곤두박질지 치게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한성이 추가 대출을 결정했다.
그건 곧 해강중공업이 가야은행의 완벽한 대체제를 찾았다는 뜻이다.
물론 개선안들이 제대로 이루어질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다.
많은 기업들이 도산 위기에 내몰려 자구안을 내놓지만 그게 다 이루어지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으니까.
더구나 오종록 대표가 약속한 해강중공업의 개선안들은 특히나 어렵다.
해강건설 인수처를 찾는 것부터 비핵심자산들을 제 값에 처분하는 것도 간단한 일이 아니고, 유산증자도 상당한 반발에 부딪힐 수 있다. 거기다 친환경 에너지 관련 신사업을 위한 사업 포트폴리오를 확장해 수익을 만들려면 필요한 자회사도 편입시켜야 하고 지배 구조도 대폭 개선해야 한다.
정말이지 할 일이 태산인데 그 하나하나가 결코 쉽지가 않은 것이다.
하지만 한성은행이 해강중공업의 손을 잡았다는 것만으로도 채권단들의 불안을 어느 정도는 누그러뜨릴 수 있다.
채권단 또한 해강중공업이 회생하는 쪽이 이득이기에 지금까지처럼 사납게 달려들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몇몇은 그래도 불안해 채무 상환을 원할 테지만 그건 한성은행으로부터 받게 될 추가 대출로 처리하면 된다.
그렇게 시간을 벌면서 개선안대로 6천억의 자금이 만들어지면, 해강중공업은 비로소 고비를 넘기게 되는 것이다.
“이게 다 하 차장 덕분이야. 이번에 진 빚, 정말 평생 잊지 않겠네! 우리 해강이 안정을 찾게 되면 그땐 이 빚, 아니, 이 은혜 내가 어떻게든 갚을 것이네!”
내 손을 움켜쥔 양손이 다시 격정으로 떨린다.
당장의 감정에 취해서 허투루 내뱉는 말은 아닐 것이다.
해강중공업에 막심한 피해를 끼치고 있는 중에도 해강건설을 놓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 우직함이 해강중공업을 위기로 몰아넣기도 했지만, 그 뚝심과 의리가 해강중공업을 키워온 동력이기도 할 것이다.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야 그저 제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니까요. 그래도 정 고마우시다면 개선안을 잘 이행해 주세요. 그거면 됩니다.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이기도 하구요. 그리고 재원이 마련되는 대로 급한 채무부터 최대한 처리하시구요.”
“암! 그래야지! 돈이 마련되는 대로 가야은행 것부터 싹 다 정리할 것이네!”
단호한 말에서 울분이 느껴진다.
그런 모습을 보면 가야은행이 끼어들 여지는 없는 것 같다.
그게 아니더라도 계약 내용 중에 가야은행에 대한 채무를 가장 우선으로 상환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명확히 하지 않으면 괜히 나중에 남 좋을 일만 시켜주는 꼴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오종록 대표에게 추가 대출 승인 소식을 알린 후 지점으로 돌아오니 나를 보는 RM들 분위기가 이전과는 또 조금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아마도 추가 대출 승인 소식을 들었나 보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4천억이다.
그것도 끝도 없이 부정적이기만 했던 해강중공업에 대한 추가 대출.
당연히 그들도 부결을 예상했다.
정남호 과장은 부결되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마시라며 미리부터 날 위로하기까지 했다.
물론 그중에는 정상용 부지점장과 손정학 팀장도 있었다.
이번 해강중공업 건으로 내가 유이하게 설득 시키지 못했던 사람들이니까.
내 부족한 설득력에도 기꺼이 본점으로 달려가는 박순호 지점장을 보며 그저 황당해하던 두 사람이니까.
그런데 대출 승인이라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그것도 고작 보름 만에.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느낌이려나?’
그만큼 기업금융팀 내 내 입지는 더 강해졌다.
해강중공업의 회생 여부를 떠나서 여신협의회의 승인이 떨어졌다는 것만으르도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하긴, 4천억 대출을 성공시켰는데 입지가 달라지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수고하셨습니다. 하 차장님. 결국 해내셨네요?”
도정우 대리가 내 앞에 커피를 내민다.
처음엔 약속대로 아침 출근 때만 한 잔씩 주더니 이젠 하루 세 잔은 기본이다.
그것도 마침 커피가 땡긴다 싶을 때면 어김없이.
자기 말로는 여섯 형제 중 다섯째로 자라서 눈치가 장난이 아니란다.
확실히 눈치가 장난이 아닌 것 같긴 하다.
“형우인터텍 쪽은 어떻게 돼 가?”
내 일이 마무리가 되고 나니 그제야 다른 것도 보인다.
“어휴! 말도 마세요. 이 인간들이 하도 자리를 비워대길래, 안 그래도 어제는 짚이는 게 있어서 인근 사우나탕이란 사우나탕은 다 뒤졌거든요.”
“그래서?”
“찾았죠. 아니나 다를까, 새로 생긴 사우나탕에서 팔자 좋게 사우나를 즐기고 있더라구요. 그 두 진상들이. 심지어 업무시간에 맥주까지 처마시고 있는데, 와! 진짜 마음 같아서는 한기택 상무님께 전화라도 때리고 싶었다니까요.”
두 진상이라고 하면 원조 진상인 김준우 과장과 새롭게 합류한 대표의 막내처남이자 진상 꼴통인 박경수 재무부장이다.
“그런데도 형우가 제대로 돌아가?”
재무를 담당하는 실무자들이 여전히 그러고 있다고 하니 내 일이 아닌데도 걱정이 된다.
재무 담당자에게 필요한 건 첫째가 실력이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성실함이다.
다른 어느 부서보다도 성실함의 유무가 바로 티가 나는 곳이고, 그만큼 불성실함이 빚어내는 사고 또한 잦은 곳이었다.
“모르겠어요. 업무적인 일로 소통이 아예 안 되고 있으니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죠. 차라리 한기태 상무한테 보고라도 하는 게 나을까요?”
“안 돼. 한기태 상무는 한시적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뿐, 어디까지나 외부 사람이야. 언제든 다시 복귀할 준비만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기태 상무 앞세웠다가, 한기태 상무가 정말 원래 있는 곳으로 복귀라도 해버리면? 도 대리만 새 되는 수가 있어.”
괜히 조급한 마음에 일을 벌였다가는 밥그릇을 키우기는커녕 가지고 있는 밥그릇마저 도로 빼앗겨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일단 재무 상태에 구멍이 없는지 그것부터 제대로 확인해봐. 아무리 형우가 보수적인 곳이고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곳이라고 해도, 재무 담당자들이 그 지경이라면 분명 어딘가에서 균열이 생겨나고 있을 거야. 문제점이 뭔지, 해결 방안은 어떤 건지 잘 파악해두고 있으면 언젠가 써먹을 기회가 생길 거야. 운이 좋으면 그걸 계기로 파이를 넓힐 기회도 만들 수 있을 테고.”
“옙!”
내 말에 도정우가 힘차게 대답한다.
날 향하는 눈빛은 신뢰, 아니, 그 이상의 존경과 동경.
따지고 보면 RM 경력은 나보다 한참 위다.
그런데도 일말의 거리낌도 없는 선망을 내게 보낸다.
그 또한 지금의 내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도정우야 내 덕을 본 게 조금 더 많아서 그 위상이란 것도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높고 강하긴 했지만.
‘이러다 차 본부장님 전성기 때 위상도 금방 넘어버리겠는데?’
차규완 본부장을 생각하니 새삼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이번 여신협의회에서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늘어졌다.
차 본부장만 아니었다면 여신심사회가 훨씬 더 빨리 끝났을 것이다.
가뜩이나 나날이 상황이 나빠지고 있는 해강중공업이고, 오종록 대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앓는 소리를 해대는 상황. 그런 와중에 매번 매 안건마다 태클을 걸어대니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이었다.
물론 차 본부장의 지적은 늘 정확했다.
다시 검증을 거쳐야 할 만한 것들을 정확하게 집어냈다.
어떻게 본부장식이나 된 건지 신기할 지경이던 양반이 여신협의회에선 그야말로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새삼 그 대단했다던 RM시절의 모습을 살짝 엿본 느낌.
하지만 그런 감탄과는 별개로 정말이지 짜증이었다.
그게 옳은 일이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건 이해를 하지만, 막상 당하는 입장에선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특별심사역이고 뭐고, 당분간은 국물도 없을 줄 알라고!’
그렇게 속에도 없는 다짐을 하고 있을 때였다.
마침 차규완 본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 하 차장, 곧 퇴근이지? 여기 솥단지인데 얼른 여기로 와.”
솥단지라면 본점 근처의 삼겹살 집이었다.
“RM한테 퇴근이 어딨습니까? 잘 아시는 분이······.”
지난 보름 간 쌓인 감정이 그렇게 표출된다.
“하긴, 퇴근이 없긴 하지. 하지만 임원이 명령하면 없던 퇴근도 생기는 게 또 사회생활이지. 내가 명령하는 거니까 지금 당장 퇴근해서 이리로 달려와.”
평소 권위를 내세우는 양반이 아니건만 오늘은 왠지 강압적이다.
무슨 일인가 싶어 솥단지로 달려가 보니, 거기엔 차 본부장만 있는 게 아니었다.
김강철 수석부행장을 필두로 여신협의회 열두 명 모두가 방에 자리를 잡고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해 있는 내게 김강철 전무가 말했다.
“여신협의회의 전통이네. 여신협의회가 끝나면 그 결과가 승인이든 실패든 간에 이렇게 다들 솥단지에 모여서 축하주든 위로주든 하는 거지.”
“나랑 하 차장처럼 여신협의회가 진행되는 동안 안건을 올린 사람과 그걸 검증하는 심사역들 간에 충돌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거든. 그 묵은 감정들을 푸는 자리라고 보면 돼. 사실 우리는 그렇게 심한 편도 아니었어. 예전에 내가 RM일 때는 아예 멱살잡이까지 한 경우도 있었으니까.”
그래도 내가 자기한테 빈정이 상해 있는 걸 알긴 아는 모양이다.
‘아니, 근데······ RM때 멱살잡이를 했다면 하극상 아냐?’
뭐지? 뭔가 자꾸 통하는 이 느낌은?
“자자. 그렇게 멀대같이 서 있지 말고 하 차장도 이리로 와서 앉아.”
차 본부장의 권유에 그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가장 먼저 김강철 수석부행장이 술을 권한다.
“4천억 추가 대출, 축하하네.”
김강철 수석부행장을 시작으로 축하주가 이어진다.
“이햐! 내가 심사역이긴 했어도 정말 그게 통과될 줄은 생각도 못했어. 축하하네. 하 차장.”
여신심사회에 안건이 채택되었다는 것만으로도 한성의 은행원으로서는 출세에 상당한 플러스 요인이 된다.
그것만으로도 본점 임원들과도, 주요부서의 핵심 멤버들과도 얼굴을 튼다는 것이니까.
거기다 이렇게 승인까지 나게 되면 그 효과는 몇 배가 된다.
지금 내게 웃으며 술을 권해오는 사람들의 면면만 보아도, 수석부행장이야 말할 것도 없고 핵심부처의 본부장들에, 죄다 추후 임원이 될 가능성이 높은 주요부서의 관리자급 인사들이 아닌가.
그중에는 이관우가 하늘처럼 받들어 모시고 있는 리스크관리팀의 허창혁 본부장까지 끼어 있다.
한성에서 출세를 하려면 여신협의회부터 열라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닌 것이다.
< RM한테 퇴근이 어딨습니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