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48
나이는 69세.
작달막한 키, 하얗게 센 머리, 부리부리한 눈, 꽉 다문 얇은 입술에선 고집스러움이 느껴진다.
해강중공업 대표 오종록.
송원철 전무와 함께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부탁했다.
오종록 대표도 같이 만나고 싶다고.
“한성은행 하성운 차장입니다.”
내 인사에 오종록 대표가 고개를 끄덕인다.
간단히 오가는 인사.
이 자리에 오종록 대표까지 부른 걸 무례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불쾌한 기색은 전혀 없다. 그런 걸 불쾌해할 만한 처지가 아니니까.
애써 감추고 있지만 나를 보는 시선에서 절박함이 느껴진다.
저 절박함이 바로 새롭게 바뀐 변동 정보의 이유일 것이다.
“하 차장도 알고 있을 테니 솔직하게 다 말하지.”
송원철 전무가 그렇게 먼저 운을 뗐다.
“지금 우리 해강의 사정이 많이 안 좋네. 가야은행에서 회수 절차를 진행할 거라고 통보까지 해온 상황이지.”
순간, 송원철 전무는 물론이고 오종록 대표의 눈가도 같이 꿈틀거렸다.
가야은행의 배신에 대한 분노.
이일후가 단지 인사 차 온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가야은행 입장에서는 틀린 선택이 아닐 수도 있다.
해강중공업이 해강건설을 떠안은 후, 해강중공업의 재정 상태는 악화일로를 걸었고 재작년부터는 수주 부진까지 겪으며 이중고에 시달렸다.
가야은행으로서도 리스크가 상당했을 것이다.
‘은행 내부적으로도 이미 해강중공업에 대한 회의적인 의견들이 꽤 나오고 있었을 테고.’
그런 상황에서 결국 곪은 상처가 터지고 말았다.
기약 없는 회생을 기다리다 막대한 손실을 입는 것보다 빠른 손절로 피해를 최소화하는 쪽이 은행입장에선 현명한 판단일 수 있다.
“그래서 말이네. 일전에 자네가 제의한 개선안 말이야. 다시 검토를 해봤는데······.”
“이제 그 정도로는 안 됩니다.”
송원철 전무의 말을 딱 잘랐다.
“그때의 개선안은 가야은행이 뒤를 받치고 있다는 가정 하에 만든 겁니다.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그 정도로는 안 됩니다. 채권단을 설득시키려면 그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체질 개선이 필요합니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선결되어야 할 것은 해강건설 매각이구요.”
그렇게 말한 후 오종록 대표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대표님께 여쭙겠습니다. 해강건설을 매각할 각오, 되어있으신 겁니까?”
“······.”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해강선걸의 매각 없이는 이번 위기, 극복 못합니다. 그건 대표님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신 겁니까?”
“······ 해강건설은 나와 내 동생이 열다섯 살도 되기 전부터 노가다 판을 전전하며 하수급부터 키워온 회사야. 해강중공업의 뿌리 같은 회사지. 뿌리 없이 자랄 수 있는 식물이 있다던가? 내가 주위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금껏 해강건설을 지켜온 이유도 그래서고.”
“해강건설은 해강중공업의 뿌리가 아닙니다.”
“······?”
“줄기와 가지가 강한 비바람에도 버틸 수 있도록 지탱해주는 것이 뿌리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강건설이 해강중공업의 뿌리일 수 있겠습니까? 해강건설은 그저 썩어 문드러져 가고 있는 팔다리일 뿐입니다. 잘라내지 않으면 목숨까지 잃게 되는 그런 고름 덩어리라는 말씀입니다.”
“······.”
오종록 대표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하지만 내 말은 결코 심한 것이 아니다.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 뿐이다.
그리고 지금은 예의도, 포장도 필요한 순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대표님께서 해강건설을 지켜왔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 또한 틀렸습니다. 해강건설을 지켜온 것은 대표님이 아니라 채권단들의 돈입니다. 그 채권단들이 해강중공업을 믿지 못하겠다고 돈을 돌려 달라고 하는 상황입니다. 그럼 해강건설을 팔아서라도 돈을 갚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 아니겠습니까?”
“······.”
“지금부터 대표님이 지켜야 하는 것은 해강건설이 아닙니다. 대표님만 바라보고 있는 해강중공업의 직원들과 그 가족들의 생계입니다. 지금은 사사로운 정에나 구애될 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버릴 건 버려야 한다.
그리고 오종록 대표는 그 확고한 의지를 내게 보여줘야 한다.
아니, 날 설득 시켜야 한다.
내가 설득 당할 정도의 확실한 해답을 내어 놓아야 나도 그걸 가지고 여신협의회를 설득할 수 있을 테니까. 지금 내가 가진 패만으로는 부지점장과 팀장조차 제대로 납득 시키지 못하는데, 여신협의회의 승인인들 가능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 하나 제대로 설득 시키지 못할 정도의 각오라면, 변동 정보대로 당장은 어떻게 위기를 넘길 수 있다고 해도, 세 번째 변동 정보의 내용은 어쩌면 도산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4천억 추가 대출을 진행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그 돈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라도 내겐 지금 오종록 대표의 확실하고도 확고한 대답이 필요하다.
내가 그렇게 오종록 대표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오종록 대표는 한참을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불쾌함이나 불복함은 보이지 않는다.
그 눈에 채워져 있는 것은 체념이었다.
그건 내가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부터 있던 것이었다.
알고 있는 것이다.
더는 똥고집이나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란 것을.
가야은행이 등을 돌린 순간, 자신은 이미 거부할 권리도 결정할 권리도 모두 잃어버렸다는 것을.
“내가 해강건설을 포기한다면······ 한성이 우리를 도와주긴 하는 건가?”
오종록 대표의 입장에선 그걸 확인하기 위해 참석한 자리였다.
목소리는 간절하고 나를 보는 시선은 절박하다.
당연한 일이다.
내 결정에 따라 해강중공업의 명운이 갈릴 수도 있는 순간이니까.
그 간절한 기대에 나마저 등을 돌려버린다면 해강중공업은 정말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르니까.
“해강건설의 지분을 매각할 거라는 공시부터 올리는 게 먼저입니다.”
그건 비단 여신협의회를 설득하기 위한 전제조건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채권단의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함이었다.
송원철 전무가 오종록 대표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그건 이미 대표님도 결정을 내리신 일이네.”
“그럼 한성은행이 해강중공업을 돕는다는 전제 하에, 지금부터 제가 제시하는 개선안에 대해 협약서도 작성해주셔야 합니다. 그럼 그걸 가지고 제가 은행을 설득해보겠습니다.”
“정말인가?”
오종록 대표가 격앙된 목소리로 반문한다.
“예. 몇 가지 조건만 더 동의해 주신다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해강중공업에 대한 지원책을 마련해보겠습니다.”
순간 오종록 대표가 내 손을 덥석 잡는다.
“고맙네! 고마워! 그렇게만 된다면 내가 뭐든 못하겠나?”
목소리가 떨리고, 나를 보는 눈이 떨리고, 잡고 있는 손이 떨리고, 그 작은 몸이 떨린다.
어떤 심정일지 충분히 짐작이 된다.
지금까진 어떻게든 내 앞에서 약한 모습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작은 짐승이 강한 맹수 앞에 몸집을 부풀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해강중공업이 먹잇감이 아니라 파트너로서 아직 건재하다는 걸 내게 보여주고 싶어 한 것이겠지만, 그 속마음은 후회와 자괴감, 그리고 절실함으로 매분 매초가 피가 마르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모두가 절망만을 얘기했을 테니까.
믿었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괴물이 되어 자신의 살점을 물어뜯으려 이빨을 드러냈을 테니까.
온통 칠흑같은 세상에 홀로 버려진 느낌.
그런 차에 내가 희망을 얘기했다.
‘처음이었겠지.’
그래서 그 작은 희망만으로도 지금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될 것을 그동안 왜 그렇게 미련을 떨어 회사를 이 지경까지 만든 건지 답답하긴 했지만, 해강건설에 대한, 그리고 그의 동생에 대한 마음을 내가 감히 재단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종록 대표가 보내온 세월을 내가 옆에서 지켜본 게 아니니까.
그저 늦게라도 마음을 돌려준 게 다행일 뿐.
나는 그 작은 희망을 여신협의회로 가져갔다.
※※※
여신협의회가 열리는 회의실 앞이다.
"긴장할 거 없어. 하 차장이야 행장님 앞에서도 당당한 사람 아닌가."
옆에서 박순호 지점장이 긴장하지 말라지만, 긴장이 된다.
내겐 첫 여신협의회니까.
준비한 자료를 한 번 더 꼼꼼히 살핀 후,
"후우······."
긴 숨과 함께 긴장을 털어냈다.
회의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회의실에 앉은 열두 명 중 아는 얼굴들이 보였다.
김강철 수석부행장을 필두로, 여신심사부 차규완 본부장, 이혁수 부장, 신우찬 팀장 정도였고, 나머지는 오다가다 얼굴 정도 본 사람들이다.
한성은행 최고의 엘리트들.
그 열두 명을 설득 시켜야 한다.
자신 있었다.
내가 준비한 고강도의 개선안을 오종록 대표가 군말 없이 따라주었기 때문에 협약서도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만들어졌고, 급하게나마 해강 실무팀을 통해 검증도 어느 정도 마친 상태였기 때문이다.
돈이 되는 일이다.
고강도 개선안을 통해 리스크도 상당히 잡았다.
이대로 망하게 놔두는 것보다 살리는 게 훨씬 큰 이득인데, 시중은행 중 가장 실리적이라는 한성의 여신협의회가 그걸 거절할 리 없다는 믿음.
"안녕하십니까! 기업금융지점 기업금융팀 차장 하성운입니다!"
시원하게 인사를 올렸지만 반응은 그야말로 삭막.
심지어 평소 친분이 있는 차규완 본부장까지 지금은 무거운 표정과 눈빛으로 날 보고 있었다.
워낙 큰 돈을 움직이는 곳인 만큼, 이게 여신협의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인 모양이다.
새삼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바로 브리핑을 시작했다.
“그럼 지금부터 해강중공업에 대한 4천억 추가 대출의 이유와, 추가 대출을 진행했을 때 한성이 얻게 될 수익, 그리고 해강중공업의 회생 가능성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해강중공업과 상의해 만든 협약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향후 해강건설 매각과 그 외 비핵심자산 매각, 유상증자 등을 통해 부채 탕감이 다각적으로 빠르게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그렇게 마련되는 재원은 6천억 규모로 예상되며······.”
물론 임시 협약서다.
이 임시 협약서는 여신협의회를 통해 더해지고 다듬어져 정식 계약서의 어느 조항들을 차지하게 될 것이고, 대출 진행과 동시에 법적인 효력도 발생하게 될 것이다.
브리핑은 무난하게 끝이 났다.
사실 브리핑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 다음의 검증절차가 여신협의회의 진짜 일이다.
여신협의회가 한 번 열리면 대출 결정을 내리기까지 평균 한 달이 걸린다.
그만큼 검증이 철저하게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번엔 시간이 촉박했다.
자칫 미적거리다 부결이 나게 되면 2200억 채무에 대한 회수가 늦어지게 되니 그만큼 손해를 볼 수밖에 없고, 승인 쪽으로 결론이 난다고 해도 그때까지 해강중공업이 무사할 거라는 보장이 없다.
그로 인해 유례 없이 빠른 속도로 검증절차가 진행되었다.
그런데도 최종 결정이 떨어지기까지는 보름이나 더 걸렸다.
※※※
“그래서? 여신협의회의 결정은?”
유종원 행장이 김강철 수석부행장을 보며 물었다.
해강중공업 추가 대출 건으로 인해 긴급하게 열렸던 여신협의회는 오늘로 문을 닫았다.
김강철 수석부행장은 그걸 보고하기 위해 행장실을 찾은 것이었다.
협의회에서 결정을 내렸다고 해도 최종 승인은 행장의 몫이니까.
“4천억 추가 대출은 가능하다는 결론입니다.”
“그런가? 역시 그렇게 되었군.”
여신협의회는 은행 내에서 가장 독립적인 협의체다.
여신협의회가 열리는 동안에는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다.
그건 행장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워낙에 규모가 큰 돈을 움직이는 곳이다 보니 직위나 외부의 압력에 휘둘리게 되면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중간 보고도 없었다.
그런데도 예상했다는 반응.
“하 차장이 진행하는 일이었으니까 말이야.”
의아해하는 김강철 수석부행장에게 당연하다는 듯 하는 말.
“그 친구가 진행하는 일이 어그러진다면 이젠 그게 더 이상하게 느껴질 지경이니. 그런데······ 그렇게 확실한 사람이라 이왕 물어오는 거 큰 건들 좀 물어오라고 RM을 시켜놓긴 했는데, 그래도 이건 시작부터 커도 너무 크잖아? 설마 해강중공업이 낚시 바늘에 걸릴 줄 어떻게 알았겠어?”
“리스크는 여전히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신협의회의 결정은 승인이잖은가?”
“하 차장이 제의한 강도 높은 개선안을 따른다는 가정 하에 살펴보니, 예상치보다 회생 가능성이 훨씬 높게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말이네. 해강중공업 시총이 반 토막 났어. 앞으로 더 떨어질 테고. 회생 가능성을 점치는 사람이 이젠 아예 없어. 상장 폐지될 거라는 말까지 공공연히 떠돌고 있을 정도니까. 그런데도 하 차장은 거기서 가능성을 봤다는 거잖아?”
사실 놀랍기는 김강철 수석부행장도 마찬가지였다.
한성은행이 해강중공업의 도우미를 자처하고 나서게 될 거라고는 여신협의회가 열린 그 순간까지도, 아니, 하성운 차장이 브리핑을 다 마친 그때까지도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건 여신협의회에 모인 심사역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만일 그게 박순호 지점장을 통한 하성운 차장의 건의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자신이 그 협의회의 의장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아예 여신협의회 자체가 열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검증 과정에서 하나둘 희망적인 면들이 부각되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분위기가 승인으로 가닥이 잡혀버렸다.
지금 이렇게 결재 서류를 내밀고 있는 순간에도 얼떨떨하다.
유 행장이 펜을 들며 결재 서류를 건네 받았다.
4천억이라는 숫자를 보니 새삼 하성운 차장이 큰 건을 물어왔다 싶다.
사인을 했다.
최종 결재는 행장의 몫이지만, 요식행위다.
여신협의회가 생겨난 이래 거의 이십 년 간 행장이 그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한 것은 단 두 번 뿐이니까.
그렇게 사인을 마친 후 잠시 더 서류를 내려다 보던 유 행장이 고개를 들어 김강철 수석부행장을 본다.
“해강중공업이 정말 회생에 성공한다면 말이지. 역대 RM들 중에 단일 거래로는 최고 실적 아닌가?”
물론 대출 액수로는 그보다 많은 대출을 기록한 RM들이 있었다.
하지만 무려 주거래은행을 바꿔버린 사건이다.
해강이 회생에 성공해서 지난날의 영광을 되찾게 된다면, 그 성장을 통해 얻어지는 전체적인 수익은 유 행장의 말대로 가히 역대급이라 할 수 있었다.
“거 참! 기업금융지점으로 옮긴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땐 또 뭘로 포상을 해줘야 하는 거야?”
< 그땐 또 뭘로 포상을 해줘야 하는 거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