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47
숨겨져 있던 대형 악재.
해강중공업의 자회사인 해강건설이었다.
워낙에 부실한 회사였다.
5년 전 짓고 있던 아파트 단지 미분양 물량이 터지면서 그 후로 줄곧 적자에 허덕였고, 그런 해강건설을 멱살 잡고 끌고 온 것이 해강중공업이었다.
그렇게까지 한 데에는 해강건설이 해강중공업 오너의 형제 기업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매각을 주장한 계열사도 바로 이 해강건설이었다.
그래도 최근에는 순이익을 올리고 있긴 했었다. 하지만 그건 눈 가리기였다. 어떻게든 급한 불을 뒤로 미루다 미룬 끝에 결국 4분기에 한꺼번에 순손실 2천억이 터져버린 것이다.
심지어 두 달 후면 700억 규모의 신주인수권부사채 조기 상환일까지 도래하는 상태.
그게 바로 내가 놓친 하나다.
실수가 아니었다.
그저 해강중공업 입장에선 두고두고 골칫거리이기에 재무 개선을 위해서는 하루 빨리 정리가 필요하다고 송원철 전무에게 보고를 하긴 했지만, 사실 그 이상을 판단하기엔 내가 가진 정보가 너무 적었다.
해강건설의 자세한 내부 상황까지는 내가 조사할 수 있는 범위 밖의 일이었으니까.
해강건설에는 우리 한성의 돈이 들어간 게 없으니까.
해강중공업의 해강건설에 대한 지분율은 78%다.
멱살 잡고 끌어올리며 돈을 퍼부어 댄 끝에 이젠 한 몸이나 마찬가지.
가뜩이나 해강중공업 자체의 재무 상황도 최악인 상황에서 자회사의 악재까지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니, 해강중공업의 주가가 폭락하는 거야 당연했다.
신용등급 하락이 불가피하다는 각 신용평가사들의 부정적인 평가까지 이어지며 상장폐지 얘기까지 나돌 정도로 악재에 악재가 거듭되었다.
그런 와중에 이일호 차장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가야은행에서 해강중공업의 추가 대출을 거절한 것이다.
심지어 그 믿었던 가야은행에서 기한이익상실을 사유로 가장 먼저 채권 회수에 들어갔다는 말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하긴, 주거래은행인 만큼 그 손해는 다른 채권자들에 비할 바가 아닐 테니까.’
추가 대출을 거절했다는 건 해강중공업을 밑 빠진 독이라 판단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배신자가 아니라 악마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채권 회수부터 해야 하는 게 가야은행의 입장이었다.
그러니 다른 채권자들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천만다행히도 국책은행을 통해서라도 대출을 받게 되어 당장이야 한숨을 돌렸다지만, 가야은행에서 채권 회수에 나섰다면 해강중공업에겐 그나마 있던 희망마저 사라졌다고 봐야 한다.
늦으면 뺏긴다.
조금이라도 더 건지려면 당장 달려들어 해강의 살점부터 물어 뜯어야 한다.
그건 한성은행이라고 입장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결국 하 차장 말대로 이런 지경까지 와버렸군.”
박순호 지점장이 자신의 책상에 앉아 이마를 매만진다.
“허 참! 그 해강이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질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차라리 하 차장 보고를 받았을 때 좀 무리를 해서라도 채권 회수에 들어갔어야 했나?”
박순호 지점장 잘못이 아니다.
변동정보의 등급이 D가 아니었기에 내가 채권 회수를 주장하지도 않았을뿐더러, 해강이 위험해질 거라는 내 판단만을 믿고 본점에 건의를 했더라도 여신관리팀을 움직이기엔 역시 근거가 부족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
나를 보며 던지는 질문.
그런 내 옆으로 정상용 부지점장과 손정학 팀장이 서 있다.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손정학 팀장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우리도 즉시 회수 절차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미 본점 리스크관리팀도 급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이견이 있을 수가 없다.
당연히 손실을 최소화하려면 1분 1초라도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
“하 차장 생각도 그래?”
뻔한 답인데도 나한테 한 번 더 확인한다.
물론 해강중공업이 내 담당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젠 정말 내 충실한 신도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내놓은 대답은 그 뻔한 답이 아니었다.
“저는······ 회수가 아니라 회생에 걸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판단한 이유.
이번 사건이 터지고 나는 당연히 변동정보부터 확인했다.
첫 번째 변동정보의 확정날짜가 지났으니 다음의 변동정보가 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변동정보가 바뀌어 있었다.
[판정보류]
[등급상승요건 발생]
[등급상승요건 : 재무구조 개선 및 신사업 비중 확대]
[기업신용평가등급 C→A 확정날짜: 202X년 10월 6일]
신용등급이 9개월 만에 C에서 A로 회복된다는 것은 모두의 우려와는 달리 결국 해강건설의 매각은 물론이고 뼈를 깎는 재무 개선에도 성공한다는 뜻이었다.
이 또한 내 개입의 영향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회생을 한다는 걸 알았는데 망하게 둘 이유가 없다.
그건 한성에도 해강에도 전혀 이득될 게 없는 일이니까.
순간, 박순호 지점장만이 아니라 정상용 부지점장과 손정학 팀장마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눈으로 나를 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회생에 걸어야 한다니? 해강이 위험하다고 한 건 하 차장 자네였잖아? 지금 상황도 하 차장 말대로 진행되고 있는 중이고. 근데 회생에 걸라니?”
“물론 위험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회생이 가능만 하다면 가야가 떨어져 나간 지금, 해강이라는 기업의 1순위 파트너가 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해강건설을 떠안기 전만 해도 시총이 2조원이 넘었던 기업이 아닙니까? 이대로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기업입니다.”
정상용 부지점장이 내 말을 반박했다.
“그게 어디 말처럼 쉽나? 가야가 등을 돌렸고 채권단들이 이미 달려들기 시작했어. 지금으로서는 회생 자체가 불가능해.”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불가능한 건 아니라니?”
“우리가 추가 대출을 해주면 됩니다.”
“추가 대출이라고? 그 막대한 부채를 우리더러 다 떠안자는 말이야?”
“물론 그 부채를 다 떠안자는 건 아닙니다. 해강도 뼈를 깎는 재무 개선에 들어가야겠죠. 유상증자든 계열사 처분이든, 그렇게 최대한 부채를 줄인다는 가정 하에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추가 대출은 4천억 정도가 될 겁니다.”
내 말에 다들 더욱 어이없어한다.
4천억이라니?
당장 회수 절차에 들어가도 손실이 상당한 이 마당에 4천억을 더 추가 대출하자고 하니 그야말로 황당무계할 밖에.
그건 내 충실한 신도를 자처하는 박순호 지점장도 마찬가지.
“말이 뼈를 깎는 재무 개선이지, 그게 그렇게 쉬울 리가 없잖아? 무엇보다 회생의 선결 조건은 해강건설의 매각일 텐데, 그게 되겠어?”
해강건설은 한 때 상장사였다.
부실 경영과 실적 부진으로 상장 폐지가 되었지만 주주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도 그런 해강건설을 떠안은 것이 지금의 해강중공업 오너 오종록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독불장군처럼 그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지독한 형제애.
과연 이번엔 해강건설을 포기할까?
지금 당장의 위기가 그 똥고집을 과연 꺾을 수 있을까?
바뀐 변동정보를 확인하지 않았다면 나 또한 회의적이었을 것이다.
“해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게 가야은행이야. 가야은행이 돌아섰다는 건 이미 오너 일가의 의사를 타진해 본 후 그럴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기에 발을 뺀 거 아니겠어?”
“오히려 그래서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가야에서 의사를 타진했을 때는 해강건설을 버릴 생각까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가야가 어떻게든 도와주겠지’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가야가 등을 돌렸습니다. 채권단이 물어뜯을 거고 주주들도 더는 수수방관만 하고 있지 않을 겁니다. 오종록 대표도 더는 똥고집을 부릴 상황이 아니라는 거죠.”
정상용 부지점장이 끼어들었다.
“거기에 4천억을 걸기엔 지나친 낙관론이지. 해강건설을 버리기로 결정을 한다고 해도, 그 결정이 조금만 늦어져도 어찌해볼 도리도 없이 한순간에 도산을 맞을 수도 있는 상황이야.”
“하지만 모험을 해 볼 만한 가치는 충분합니다. 해강의 주거래은행이 될 절호의 기회가 아닙니까?”
주거래은행이 된다는 건 단순히 많은 대출이자를 얻게 된다는 뜻만이 아니다.
앞으로 해강이 움직일 막대한 자금이 한성을 거쳐 갈 거라는 뜻이고, 수출입으로 발생하는 상당한 외환 실적까지 거둘 수 있다는 뜻이다.
“그거야 어디까지나 해강이 회생에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고. 지금 상황에서 4천억을 움직이려면 보다 확실한 근거가 필요해.”
근거.
물론 확실한 근거야 있다.
하지만 당연히 내게만 보이는 근거다.
나름대로 내 주장에 대한 현실적인 근거들을 준비해 왔고, 지금 열변을 토하며 설명을 하고 있지만 4천억 추가 대출을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정상용 부지점장과 손정학 팀장의 지금 표정이 그걸 말해준다.
하지만,
“좋아. 하 차장이 이렇게까지 진심인 걸 보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지점장이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난 지금 바로 본점으로 가서 그렇게 보고를 올릴 테니까, 하 차장도 브리핑 준비해. 규모가 규모인 만큼 여신협의회가 열릴 거야.”
여신협의회.
여신심사부에서 결정할 수 없는 규모이거나 여러 이권이 걸린 대출일 때 임시로 만들어지는 협의체다.
구성원으로는 여신심사부, 리스크관리팀, 여신관리팀 등 관련 부서들의 본부장부터 팀장급 이상 관리직들이 전원 소집된다. 그리고 그 여신협의체의 수장은 김강철 수석부행장이다.
즉, 임시로 만들어지는 것이긴 해도 여신에 관한 한 한성은행 최고의 의결기관인 것이다.
그런 박순호 지점장의 행동에 정상용 부지점장도, 손정학 팀장도 벙찐 얼굴을 하고 있다.
근거도 부족한 내 몇 마디 말에 박순호 지점장이 이 중대한 사안을 그렇게 간단히 결정해버리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나와 박순호 지점장이 보내온 시간을 모르니 당연히 황당하게 보일 밖에.
그들의 반응에 일일이 신경 쓸 시간이 없다.
“두 시간 후에 송원철 전무와 약속이 잡혀 있습니다. 저는 그쪽 반응부터 확인해보겠습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해강 쪽 생각부터 들어 보고 본점에 보고를 하든 말든 해야 할 일이었지만, 지금은 한시가 급하다. 차후에 말을 번복하는 한이 있더라도 여신협의체부터 열어야 했다.
※※※
송원철 전무가 먼저 내게 연락을 해왔다.
세 가지 이유였다.
첫 번째는 내가 전부터 지금의 사태를 얘기해 왔다는 것.
두 번째는 내가 제시한 개선안에 관심이 생겼다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내가 한성은행의 은행원이라는 것.
가야은행에 뒤통수를 당한 입장에서 그래도 비벼 볼 만한 언덕은 한성 밖에 없는 것이다.
당연히 마음 급한 쪽은 해강이었고 그래서 송원철 전무가 지점으로 오겠다고 했지만, 해강에서 만나는 편이 내가 원하는 바를 이끌어내기에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아서 해강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해강중공업에 도착해 주차를 하고 나오던 참이었다.
해명이라도 하고 온 것인지, 아니면 마지막 인사라도 나누고 오는 길인지, 가야은행의 이일호 차장과 주차장에서 마주쳤다.
“아, 하 차장님.”
먼저 말을 건네오는 이일호의 낯빛은 그렇게 좋지 못하다.
해명이었든 마지막 인사였든 간에 분위기가 안 좋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차장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그냥 인사를 드리러······ 상황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오래 봐온 분들이니까요. 그러는 하 차장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나는 대답 대신 물었다.
“왜 해강을 포기한 겁니까? 전에 저한테는 해강의 손을 놓을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뭐, 그게 어디 제 결정이었겠습니까? 아무리 RM이라고 해도 은행 차원에서 내린 결정을 제가 뭐라고 바꿀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표정이며 말투가 너무 가볍다.
그 은행 차원에서의 결정에 목소리나 한번 제대로 내기나 했을까?
머리로는 이해를 하겠는데, 지금의 무책임한 모습과 일전에 보여주었던 그 오만했지만 또한 당당하고 자신만만했던 모습이 교차되며 묘하게 비위가 거슬렸다.
그런 내 표정이 질책으로 보였는지 이일호가 따지듯 묻는다.
“그러는 한성도 채권 회수를 결정한 거 아닙니까? 하 차장님도 지금 그걸 통보하러 오신 건 아니구요?”
“······.”
난 대꾸하지 않았다.
한성이 채권 회수가 아니라 추가 대출을 결정하게 된다면, 그 사실을 굳이 가야은행에 알릴 필요가 없다. 그런 한성의 결정에 혹시라도 가야가 마음을 바꿔 다시 해강과 손을 잡으려 든다면 괜한 경쟁자만 만드는 꼴이니까.
아무리 가야에 대한 배신감이 크다고 해도, 그간 맺어온 오랜 시간을 무시할 수도 없을뿐더러 해강 입장에선 은행 간의 경쟁은 두 손 들고 환영할 일이니까.
그러니 조용히, 그리고 추가 대출 쪽으로 결정이 난다면 신속하게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난 대꾸 없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이일호를 스쳐 지나갔다.
그런 내 행동이 자신의 말에 정곡을 찔린 거라 판단했는지 입꼬리에 말려 올라가는 비릿한 웃음이 보였다.
무시했다.
지금은 무시했지만 나중에 그 웃음이 어떻게 변하는지 그건 한 번 확인해 볼 생각이다.
< 회수가 아니라 회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