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46
송원철 전무와의 미팅을 마치고 나오는 길, 결과가 궁금했는지 장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서연 씨가 열심히 도와줬는데. 어떻하죠? 잘 안 됐어요.”
첫번째 미팅은 실패였다.
실망하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열심히 했는데, 아쉽네요. 성운 씨가 고생해서 준비한 건데...”
“어차피 한 번에 될 거라고 생각도 기대도 안 했어요.”
은행원의 몇 마디 말로 기업의 전반적인 틀을 바꾸는 게 가능할 리가 있나.
당장 완전한 개선은 바라지도 않는다.
당장 다 개선이 될 정도라면 변동정보에 기한이익상실이 뜨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럼 이제 어쩌실 거에요?”
“더 준비해서 또 부딪혀 봐야죠.”
미래 정보에 의지한 개선안이다 보니 설득력이 부족한 면이 있었다.
미래 정보 없이, 그러니까 기한이익상실이라는 키워드 없이, 해강이 경영 개선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좀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강해야 한다.
‘근데 그게 쉽지가 않다는게 문제지만.’
생각만 해도 벌써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
“그래서 말인데. 아무래도 당분간은 서연 씨 도움이 더 필요할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흐음. 이번엔 밥 한 끼로 힘들어요.”
“하하하. 물론이죠. 말만 해도. 내가 뭐든지 해 줄 테니까요.”
“농담이에요. 어차피 시험도 끝났고, 저도 기업 법무 쪽으로 진로를 잡고 있어서 공부가 많이 돼요. 그리고 성운 씨랑 호흡을 맞추면서 일하니까 재미도 있고, 데이트하는 기분도 들고······ 음, 그건 좀 이상한가?”
“아닙니다. 저도 같은 기분인데요 뭐. 하하.”
아닌 게 아니라, 이번 일로 그녀에게 법률 자문을 구하면서 새삼 반했다.
해박한 법률 지식은 멋졌고, 내가 이해하기 쉽게 어려운 법률 단어를 하나하나 풀어서 설명해 주는 배려는 고마웠다. 귀찮을 법도 하건만 자신이 알지 못하는 건 어떻게든 찾아내서 해답을 가져다주는 그녀의 헌신이 미안하면서도 사랑스러웠다.
덕분에 엄청 도움이 되었다.
혼자서 법률 자료까지 뒤져야 했다면, 어휴, 생각만으로도 어질어질하다.
거기다 졸음을 쫓아내는 그녀의 감미로운 목소리는 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장서연 변호사님.”
“아직은 예비지만, 믿고 맡겨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객님.”
이어서 터지는 상큼한 웃음소리.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니 또 보고 싶다.
그때였다.
지이이이잉—
이관우에게서 전화가 왔다.
“하씨. 해강중공업 건 말이야.”
“그래. 어때?”
해강중공업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며 이관우에게도 부탁을 한 것이 있다.
어떤 이유로 해강중공업의 사정이 지금보다 훨씬 더 나빠지게 된다면 한성이 떠안게 될 리스크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봐 달라는 거였다.
“담보보다 신용 비율이 많이 높아. 워낙에 오래된 회사고 튼튼한 회사여서 우리가 대출을 진행할 때만 해도 상황이 지금이랑은 많이 달랐으니까. 기한이익상실로 대출금 회수를 진행한다고 해도 상당한 손실을 각오해야 할 거야.”
이어지는 이관우의 말도 죄다 부정적인 말들 뿐이다.
한성이 떠안아야 할 손실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컸다.
“근데 아무리 업황이 안 좋다고 해도 해강이 설마 그렇게까지야 되겠어?”
리스크관리팀의 이관우마저 ‘해강이 설마’라는 생각을 할 정도이니, 송원철 전무에게 내 말이 먹힐 리가 있나.
“일단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근데······ 이번엔 웬일로 고분고분이야? 불평 한마디 없고? 그러고 보니까 나 차장 됐을 때도 너답지 않게 너무 쿨하게 넘긴 것 같고.”
“어? 내가 말 안 했던가? 나 하씨 줄 타기로 했잖아.”
“줄?”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배나 아파하고 있을 때가 아니더라고. 내가 업어 키우다시피 한 우리 하씨가 어쩌다가 이렇게 말도 안 되게 대단한 놈이 되어 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기세면 행장이라도 못 되겠어? 그래서 마음을 바꿔 먹기로 했지. 전무니 상무니 그딴 줄 말고, 친구 줄 타기로. 그럼 나도 언젠가 임원 한자리 정도는 얻을 수 있지 않겠어?”
“······.”
“그러니까 하씨야. 내가 앞으로 견마지로를 다해 충성을······.”
뚝!
끊었다.
더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라 싹 무시하고 지점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다시 해강중공업의 현금 확보를 위한 솔루션을 더 철저히 준비했다.
하지만 두 번째 미팅도, 세 번째 미팅도 성과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점점 귀를 닫는 건 물론이고 귀찮은지 이젠 날 피하기까지 했다.
덕분에 다음 미팅 일정 잡는 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일.
계속해서 두들긴 끝에 세 번째 미팅이 있은 후 거의 한 달 만에 겨우 네 번째 미팅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확정일자는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니 내 각오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번에야 말로!’
이번에야말로 내가 준비한 여러 경영개선안 중 단 하나라도 통과시키고 만다!
그런 각오로 송원철 전무를 찾아갔다.
그런데, 전무실에는 나 말고도 이미 선객이 있었다.
“아, 이전 곽 차장이랑은 서로 아는 사이였는데 하 차장이랑은 초면인가? 인사들 하지. 여긴 한성은행 하성운 차장. 그리고 여긴 가야은행 이일호 차장.”
가야은행이라면 한성에 이어 업계 3위 은행이다.
4년 전만 해도 한성보다 위인 업계 2위였지만 지금은 3위라고 해도 한성과는 차이가 좀 있는 편이다.
그리고 해강중공업의 주거래은행이기도 하다.
이런 자리가 우연일 리 없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송원철 전무가 의도한 상황이었다.
“가야은행 기업금융지점의 이일호 차장입니다. 듣던 대로 젊으시네요.”
내밀어진 손은 당당하고 깊은 주름을 만들며 끌어올린 입가 미소는 여유롭다.
나이는 40대 초반. 그 입가 미소의 여유가 왠지 불쾌한 기분을 들게 하지만 난 내색하지 않고 내민 손을 맞잡았다.
“한성은행 하성운 차장입니다. 근데 절 아십니까?”
“알다마다요. 아무리 은행이 달라도 이쪽 업계에선 워낙에 유명한 분이시니 저도 이름 정도는 들어봤죠.”
나를 띄우면서도 은연중에 눈 아래로 내려보는 듯한 느낌은, 아마도 이곳이 해강중공업이기 때문일 것이다.
겨우 3순위에 지나지 않는 한성에 비하면 주거래은행에, 당연히 거래 규모도 비교 불가 수준이니 자기 집 안방이나 마찬가지.
개도 자기 집에선 반은 먹고 들어간다지 않는가.
난 송원철 전무를 보며 물었다.
“근데 저를 이 자리에 부르신 이유가······?”
“하 차장 자네가 하도 불안해하니까 말이야. 이 차장하고 얘기 좀 나눠보라고. 그럼 좀 안심을 할 것 같아서.”
그 말은 가야은행 측의 생각은 나와 전혀 다르다는 뜻이다.
“저도 전무님께 말씀을 듣긴 했습니다만, 하 차장님은 정말 해강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유상 증자에 계열사 정리까지 해야 할 만큼?”
판이 벌어졌다.
송원철 전무님 자신의 책상 의자에 몸을 묻고는 관전 모드로 돌입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불리한 싸움판이다.
기업의 부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에게 부실하지 않다는 달콤한 말과 부실해서 망하기 일보 직전이라는 쓰디쓴 말 중 어느 게 먹힐지는 너무도 자명한 일이니까.
심지어 그 달콤한 말을 하는 사람이 해강의 시작과 성장을 같이 해온 최고의 파트너라면 더 말해 무엇할까.
하지만 불리해도, 이길 수 없어도 지금은 붙어보는 수밖에 없다.
“지난달 말 기준 해강의 부채비율이 290%를 넘었습니다. 이자보상배율은 0.8까지 내려왔구요. 한성은행 기준 이미 기한이익상실 사유가 발생한 상황입니다.”
“그거야 어차피 형식적인 거잖습니까? 솔직히 기한이익상실 기준 다 지키면 우리나라에 망하지 않을 기업이 몇 군데나 되겠습니까? 당장은 어려워도 다 기업 가치 보고 기다려주고 하는 거지.”
“그것도 어느 정도죠. 이대로 수주 부진이 장기화되면 자금 경색으로 인해 안고 있던 문제들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올 겁니다.”
“하 차장님은 왜 자꾸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한성이야 해강과 거래를 한지 이제 겨우 5년이나 됐나? 우리 가야는 20년이 넘었습니다. 그 20년 동안 해강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옆에서 지켜봤고 돕기도 했죠. 그런 우리가 보기에 이 정도 위기는 숱하게 겪어온 격랑입니다. 그리고 늘 그 격랑을 이겨왔죠. 하 차장님은 정말 겨우 이 정도 위기에 해강이 무너질 거라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변동정보만 아니라면 그런 생각 못했을 것이다.
수주 부진, 높은 차환, 경영 개선에 대한 불확실 등의 이유로 반박을 해보지만, 애초에 해강이 무너질 거라는 전체 자체가 너무 비약이기에 내 말은 방탄 유리에 맥없이 튕겨 나가는 총알이나 다름없었다.
그 후로도 이일호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렇게 날 조근조근, 아니, 잘근잘근 밟아 대던 이일호가 끝내 내 마지막 숨통을 끊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수주 부진이 장기화 되어서 해강의 자금 사정이 아주 안 좋아진다고 해도 말입니다.”
말끝을 늘이며 날 보는 눈이 오만하다.
“그땐······ 우리 가야가 있습니다. 설마하니 우리 가야가 해강의 손을 놓겠습니까?”
“······.”
내가 지금껏 해답을 찾지 못한 것도 이 부분이다.
해강이 지금보다 더 힘들어지더라도 기꺼이 도와줄 가야은행이 있다.
해강과의 관계, 해강의 미래 가치를 생각하면 최악의 경우 추가 대출을 진행해줄 수도 있는 것이다.
뭔가 한 방이 더 필요했다.
가야은행마저 손을 뗄 수밖에 없게 만들만한 한 방.
그래서 형식상의 기한이익상실이 해강의 신용등급을 A에서 C로 두 단계나 낮추게 할 만한 대형 악재.
그걸 찾지 못했다.
아니, 몇 가지 의심되는 것이 있지만 미래의 일이다 보니 지금 당장은 근거가 부족했다.
그래서 내 말이 설득력이 없다.
그런 날 보며 이일호 차장이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다.
하긴, 한성에서 요즘 가장 잘나간다는 날 눌러주는 쾌감이 솔솔하긴 할 것이다.
그에겐 지금까지 내가 한 말들이 그저 초고속 승진으로 차장까지 된 신입 RM의 의욕만 넘치는 삽질 정도로 비춰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강 이야기는 끝난 것 같으니까······ 하 차장. 이제 더는 경영 개선이니 하는 얘기는 안 할 거지?”
사실 이런 자리까지 만들어준 것도 2200억의 채권자에 대한 송원철 전무의 배려였다.
여기까지다.
열심히 설득하다 보면 그래도 뭔가 좀 되지 않을까 했던 희망이 이 순간 사라졌다.
주거래은행이자 1순위 은행이 저렇게 나오는데 내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이로써 해강은 빈손으로, 맨몸으로 폭풍우를 맞아야 한다.
그리고 손에 아무것도 쥐지 못한 해강은, 해강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내가 제안한 개선안보다 훨씬 더 가혹하고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채권자들의 불신을 불식시키고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욱더 강력한 개선 의지를 보여야 할 테니까.
뼈를 깎고 살을 도려내는······ 그렇지 않으면 내가 먼저 한성은행에 기한이익상실에 대한 대출금 회수를 요청할 수밖에 없다.
그게 은행의 손실을 최소화하는 길이니까.
※※※
그로부터 두 달 후였다.
[해강중공업. 차입금 차환과 운영 자금 충당을 위해 국책은행으로부터 대규모 신규 차입 진행]
결국 예정되었던 일이 터졌다.
신규 차입으로 인해 유동성 위험은 완화되었지만, 그로 인한 부채 비율이 330%까지 치솟았고, 이자보상배율도 0.5프로까지 떨어졌다.
영업이익보다 지급해야 할 부채 이자가 두 배가 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해강이 가야은행이 아닌 국책은행에 손을 벌려야만 했던 이유다.
이일호 차장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결정적인 순간 가야은행이 해강중공업을 손을 놓아버린 것이다.
주거래은행이 등을 돌렸다.
그러니 다른 채권자들이라고 가만히 손 놓고 있을 리가 없었다.
< 우리 가야가 있습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