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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45화 (45/50)

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45

기업금융지점의 보관실은 장원 지점보다 훨씬 깔끔했다.

보관실 자체는 장원 지점이나 별 차이 없었는데 이동식 문서함인 세련된 모빌랙으로 심미적인 면도 좋았고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서 여유 공간도 넉넉했다.

아주 크고 고급진 락커룸 느낌이랄까?

난 열두 개의 모빌랙 중 가장 끝으로 향했다.

상장사들의 대출 서류만 따로 보관되어 있는 곳.

버튼을 누르자 열한 개의 거대한 모빌랙이 자동으로 이동하며 공간을 연다.

난 일단 들고 온 형우인터텍의 대출 서류를 년도 별로 나누어져 있는 선단을 찾아 넣었다.

그런 후 내가 담당하게 된 기업들 서류들을 먼저 찾았다.

그리고 그중 몇 개에서 변동정보가 보였다.

타닥 타닥 타닥 타닥······

[판정보류]

[등급하락요건 발생]

[등급하락요건: 수주 부진으로 인한 실적둔화]

[기업신용평가등급 A→B 확정날짜: 202X년 2월 24일]

[판정보류]

[등급하락요건 발생]

[등급하락요건: 재고자산과 매출채권 증가로 현금자산 부족]

[기업신용평가등급 A→B 확정날짜: 202X년 1월 18일]

그 수가 생각보다 많다.

그것도 대부분 하락 정보다. 개중에는 등급 하락 폭이 꽤 큰 곳도 더러 있다.

‘대체 어떻게 관리를 했길래······.’

순간 전임 차장에 대한 짜증이 치밀었지만, 전임 차장을 탓할 일만은 아니었다.

격무에 시달리다 결국 지방으로 스스로 전근을 택한 사람을 탓해 봤자 뭐하겠는가. 게다가 상장회사가 한성은행하고만 거래하고 있을 리도 없고, 개중에 태반은 한성이 주거래은행도 아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당장 부도 정보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안심할 수 없다.

마원섬유 때처럼 방심했다가는 새로운 변동정보를 놓칠 수도 있으니까.

‘이재신 과장은 아직도 필리핀에 있으려나?’

아직 잡혔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었다.

어쨌든,

“후우······ 골치깨나 아프겠네.”

어차피 이제 내가 감당해야 하는 회사들이다.

어떻게든 개선 방법을 찾아보는 수밖에 없다.

KMT 일을 겪으며 알게 된 것 하나.

내 개입으로 당장의 변동정보는 바꾸지 못하더라도 그 이후의 미래에는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것.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 해봐야 한다.

긍정적인 것은 변동정보 덕분에 해당 기업의 문제점을 명확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 문제점만 들입다 파고들면 되니 업무는 효율적이고도 간결하게 진행할 수 있다.

‘야근도 좀 줄일 수 있으려나?’

문제점을 확실히 파악하고 있으니 해당 기업에 최적의 솔루션을 제공할 수도 있다.

‘내 업무적인 면만 생각하면 오히려 변동정보가 뜨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네.’

아니, 차라리 그냥 내가 조금 더 피곤해지는 게 낫다.

기업을 위해서도, 그 기업에 생계를 걸고 있는 직원들을 위해서도 하락 정보는 안 뜨는 게 좋으니까.

그렇게 내 담당 기업들의 변동정보들을 다 기록한 후 나는 잠시 숨 고르기를 했다.

이제 이 보물섬의 보물을 마주해야 할 때가 되었다.

내 담당 기업을 제외하고도 거기에는 수백 개의 상장사 대출 서류들이 있다.

장원 지점에서의 변동정보는 그걸 수익으로 직접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하지만 상장사들은 다르다.

변동정보를 이용해 주식투자가 가능하다.

물론 호재가 곧 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높은 확률이지.’

등급 차이가 크면 그 확률은 더 높아진다.

난 상장사들 중에서 B등급 이하로 분류된 대출 서류만 골라냈다.

하락 정보는 거른다

지금 시장이라면 하락 정보를 이용한 풋옵션이 훨씬 나은 투자일 수도 있지만, 다시는 남의 불행을 기회로 돈을 벌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골라낸 B등급 이하 대출 서류 중에 상승요건이 뜨는 것들을 추렸고, 그중에서도 두 단계 상승이거나 한 단계 상승이라도 재료가 좋은 것들을 따로 골라냈다.

두 단계 상승은 2건, 한 단계 상승은 11건.

모두 합해서 열세 건.

그중 어떤 건 대박이 터질지도 모르고, 또 어떤 건 호재에도 불구하고 손실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확률은 높다지만 100%는 아니다.

더구나 지금처럼 경기 침체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선 확률은 그만큼 더 떨어진다.

그래서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방법은 분산투자였다.

그게 내가 그 동안 이 보물섬 안의 보물을 어느 선까지 취해야 할지 고민을 거듭한 결과 도출해 낸 결과물이다.

현재 가진 돈은 세금 떼고 170억 정도.

아직 집은 안 샀다.

한창 집을 구하고 있을 무렵에, 갑자기 서초동으로 전근을 오게 되었으니까.

나는 그 170억 중 20억은 남겨두고, 150억을 열세 곳에 나눠 담았다.

물론 비중은 조금씩 다르다.

두 단계 상승 종목에 비중을 두 배로 높였다.

솔직히 이 150억이 얼마가 되어 돌아올지는 나도 모르겠다.

큰 기대는 갖지 않기로 했다.

그저 ‘손해는 안 나겠지’ 정도의 믿음만 갖고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150억이라는 돈을 주식에 박아놓고 편하게 생각하기로 한다고 그게 마음처럼 될까 싶기도 했지만, 신기하게도 또 그게 된다.

주식계좌가 은행계좌도 아니고, 고려제당 때처럼 100%의 확률도 아닌데, 이상하게 불안감이나 조급함 같은 게 들지 않는다.

고개만 돌리면 피안이라고, 돈 귀신에서 해방된 후로 내 안에 부처의 마음이라도 생긴 것일까?

덕분에 난 그 큰돈을 주식에 담아놓고도 아무 지장 없이 내 업무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

[판정보류]

[등급하락요건 발생]

[등급하락요건: 기한이익상실]

[기업신용평가등급 A→C 확정날짜: 202X년 12월 18일]

난 보관실에서 가져온 대출 서류를 보고 있었다.

해강중공업.

변압기, 전동기, 선철 주물, 선박 재료 등을 만드는 회사다.

시총 9천억의 중견기업.

후순위긴 해도 한성의 대출금이 2200억 정도가 들어가 있다.

그만큼 우리 RM의 발언권도 꽤 크다.

얼마 전 송원철 전무와도 인사를 나눴었다.

내가 변동정보가 뜬 회사들 중 가장 먼저 해강중공업을 선택한 것은 한성은행에서 대출해준 대출 규모가 크다는 것과 신용등급이 무려 두 단계나 하락했다는 점을 주목했기 때문이다.

‘기한이익상실이라······.’

기한이익상실이란 신용 위험이 높아질 경우 대출금 만기 전에 대출금을 회수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대출금 연체시에 발동하는 것이지만, 기업 대출의 경우 대출 계약시에 따로 특약 조건을 두기도 한다.

한성의 경우 국내 신용평가사 두 곳에서 일정 신용등급 이상을 유지할 것과 부채 300% 미만 유지, 이자보상배율 2배를 초과할 것 등의 몇 가지 조건이 달려있다. 모르긴 몰라도 다른 은행의 대출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정이 안 좋다는 건 손정학 팀장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안 좋을 줄은 미처 몰랐다.

난 즉시 해강중공업에 대한 모을 수 있는 모든 자료들을 수집했다.

일단 기한이익상실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부터 알아내야 했다.

하하! 변동정보 덕분에 문제점을 알고 있으니 그것만 들입다 파고들면 업무를 효율적이고도 간결하게 진행할 수 있다고?

야근도 좀 줄일 수 있을 거라고?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보니 그게 얼마나 멋모르는 희망사항이었는지 금방 깨닫게 되었다.

기한이익상실에 대한 건 얼추 파악을 마쳤다.

해강중공업은 아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기한이익상실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에 두고 살펴보니 장기간 이어지고 있는 수주 부진이 당분간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니 현재 이자보상배율, 즉 이자 비용 대비 영업이익이 두 배 이상 되어야 한다는 조건도 충족시킬 수 없다. 2배는커녕 지금의 0.9배보다 더 밑으로 하락할 가능성이 높았다.

거기다 외국계 금융기관 대출 비율도 상당히 높아서 사정은 더 팍팍해질 수밖에 없어 보였다.

그렇게 하나하나 어그러지다 폭삭 주저앉게 되는 수순.

그걸 파악하는 데만 해도 3일을 야근했다.

문제는 그 이후다.

문제점을 알았으니 개선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워낙에 회사의 덩치가 크고, 그만큼 벌여 놓은 일도 많다 보니 살펴야 할 것들도 그만큼 많았다.

단순히 재무 개선 방법만이 아니라 계열사들에 대한 자료에, 관련한 세무, 법률 등 비금융 업무들까지 다 살펴야 했다.

내 전문 분야가 아니니 그야말로 머리에 쥐가 날 지경.

심지어 야밤에 몇 시간씩 장서연을 붙들고 법률적 자문을 하기도 했다. 변호사 시험을 끝내고 이제 좀 여유를 가지고 쉬고 있는 중인데.

미안했다.

그런 한편으로 그렇게라도 그녀와 통화를 할 수 있는 게 또 좋기도 했다.

그리고 내 귀찮은 질문들에도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조근조근 설명해 주는 그녀가 또한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아! 생각하니 또 보고 싶네.’

변호사 시험이 끝난 후로 퇴근이 아주 새벽만 아니라면 잠깐이라도 얼굴은 보는 편이다.

일이 힘드니 그 잠깐의 달콤한 휴식이 더 간절해지는 느낌이다.

아무튼 그렇게 일주일째였다.

야근에 야근, 야근에 또 야근······ 얼굴은 푸석 수염은 까칠까칠······ 거울을 보니 처음 기업금융지점에 와서 보았던 RM들의 그 초췌하고 퀭하며 생기 없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그걸 보니 내가 RM이 되긴 됐구나 싶다.

“과장님. 커피 드세요.”

도정우 대리가 내 책상 위를 가득 덮고 있는 서류 뭉치 하나를 옆으로 밀어내며 커피를 놓았다.

“평생 커피는 이미 아침에 타 줬잖아?”

“그냥······ 고생하시잖아요.”

“암튼 고마워. 근데 도 대리는 퇴근 안 해?”

“저도 오늘은 야근을 좀 해야 해서요.”

“무슨 일로?”

“형우인터텍 때문이죠 뭐. 일단 길을 뚫기는 했는데, 생각보다 파이를 키우기가 쉽지가 않네요. 40억 정도로는 임원들이랑 다이렉트로 얘기할 수 있는 급은 안 되고, 천상 재무부장 붙들고 늘어져야 하는데, 근데 그나마 좀 얘기가 통할 만하니까 재무부장이 갑자기 바뀌었거든요. 얼마 전에. 근데 바뀐 재무부장도 꼴통이라······.”

“꼴통?”

“자리를 지키는 법이 없어요. 늘 나갔대요. 심지어 이젠 김 과장 이 인간까지 같이 안 보여요.”

“가뜩이나 회사 재정이 팍팍한 상황인데 재무 담당자들이 그러고 있다고?”

“그러니까 말입니다. 그래도 어제는 운 좋게 부장을 만났거든요. 그래서 제가 준비한 자료들 보여드리면서 회사 부채 개선안을 설명해줬는데, 이건 뭐 어디서 개가 짖나 하고 있으니······ 하품이나 쩍쩍해대고.”

“그런 인간이 어떻게 재무부장이 됐어?”

“사장 쪽 인사라는 것 같은데 자세히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암튼 이번엔 제대로 준비해서 다음에 만나면 아주 귀가 번쩍 띄게 해 주려고요.”

주먹을 불끈 쥐며 의욕에 불탄다.

아니, 일에 대한 의욕이라기보다는 눈빛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이 승부욕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 재무부장이란 인간이 어지간히도 짜증나게 하긴 했나 보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좀 쳐졌던 기분이 올라가는 느낌이다.

도 대리가 놓고 간 커피를 들어 목을 축였다.

크흐! 그 적은 한 모금에도 카페인이 혈관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 뻗어가며 죽어있던 세포들을 하나하나 깨운다.

아무래도 이제 커피 중독자 다 된 모양이다.

그렇게 모진 고생 끝에 개선 솔루션까지 완성한 후 난 일정을 잡고 송원철 전무를 만났다.

그런데 그런 철야의 밤들이 허무하게도 송원철 전무는 전혀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 차장. 그거 너무 비약이 심하잖아. 우리가 부채 비율이 좀 높은 편이긴 해. 그래도 지금까지 잘 해쳐왔다고. 이번에도 그럴 거고.”

“하지만 전무님. 지금은 상황이 좀 다릅니다. 중공업 업황도 갈수록 안 좋아지고 있고······ 더 나빠지기 전에 살을 깎아서라도 재무안정성부터 개선해야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사람아. 자구안으로 증자를 해야 한다니? 자산 매각은 또 뭐고? 게다가 계열사까지 건드리라는 건 너무 나갔잖아. 아무리 우리가 은행 돈을 쓰고 있다고 해도 너무 나간 거라고 이 사람아. 거기다 신사업? 수소? 탄소 자원화?"

"물론 그걸 다 해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당장은 무리라는 것도 잘 알구요.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하나씩 준비를 하는 것이······."

"그래. 당장 업황이 안 좋은 건 사실이야. 하지만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버티다 보면 또 풀리는 게 업황이야. 하여튼 은행원들 호들갑 떠는 건 어찌 그렇게 똑같은지······.”

이미 다른 은행 RM들한테도 상황이 좋지 않다는 정도의 이야기는 들었었나 보다.

그런데도 태평하다.

위기야 몇 번이고 극복해 왔으니까.

그 덕분에 지금의 해강이 있는 거니까.

백전노장의 흔들림 없는 여유.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다.

나도 변동정보만 아니었다면 해강중공업 정도의 중견기업이 기한이익상실까지 당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이번엔 정말 위험하다.

당장의 변동정보는 A에서 C였지만, 확정날짜 이후가 문제다. 작은 계기만으로도 언제든 D로 하락할 수 있을 만큼, 내가 조사한 해강중공업은 지금 살얼음판 위에 있었다.

< 나, RM 다 됐다[여기서부터 유료연재 시작입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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