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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44화 (44/50)

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44

인맥 중에 최고는 혈연, 그다음으로 좋은 것이 학연이다.

그 학연을 잡았다.

물론 내 학연이 아니라 조성환 상무의 학연이지만.

이 나라가 좁다기보다는 상위 계층의 세계가 좁은 거다.

엘리트 코스라는 게 다 거기서 거니니까.

겹치는 학교, 겹치는 인맥 하나 없는 사람이 있을까?

앞으로 내가 상대해야 할 부류는 이 나라에서 상위 계층이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지금 눈앞의 한기태 상무만 해도, 전직은 국내 1위 전자 기업의 OLED 사업부를 총괄하던 사람이었다. 내부 비리 문제가 터져 지금이야 잠시 한직으로 쫓겨난 상태지만, 그 역시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사람.

그렇게 생각하니 약간 막연하기만 했던 RM의 길이 보이는 것도 같다.

나만의 길.

내가 상대해야 하는 부류가 상위 계층이고, 그 상위 계층이라는 게 한 다리 걸러 다 아는 인맥이라면, 나도 내가 가진 인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생각지도 않았던 조성환 상무의 덕을 보게 된 것처럼, 김강철 수석부행장이나 유종원 행장의 인맥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 말하기 좋아하지 않는 조성환 상무조차 내 이름을 입에 올렸을 정도면 그들 두 사람도 자신의 인맥들에게 내 이름 정도는 언급했을 가능성이 크니까.

장원 지점에서 내가 이루어낸 실적과 명성이 이렇게도 이어진다.

“근데, 식사들 하러 가던 참인가?”

“예. 이렇게 뵙게 된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혹시 제가 상무님을 모셔도 괜찮을까요?”

“음······.”

내키지 않는 표정.

하지만 놓쳐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기회다.

“동창이시라고 하시니 조 상무님에 대한 말씀도 좀 듣고 싶고······.”

“그보다 조 상무한테 듣자니 KMT일, 자네도 꽤 관여했다는 것 같던데, 그 일이나 좀 들어볼까?”

내부 비리로 밀려난 사람이다. 거기다 조성환 상무와 가깝게 지낸다면 당연히 질이 좋은 사람일 리 없다.

조성환 상무가 어디가서 그런 일을 떠들고 다닐 사람은 아닌 만큼, KMT 사건에 이 사람도 관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돈 줄 중 하나일지도······.’

나는 내가 어느 정도 선까지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지를 빠르게 판단했다.

그리고 이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잖아도 어디 가서 말할 데도 없었는데, 오늘 한 번 제대로 설 한 번 풀어보겠습니다. 가시죠 상무님. 제가 좋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아, 그리고 여기 이 친구는 저희 지점의 도정우 대리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상무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낯간지러운 인사를 참 시원하게도 하며 넙죽 허리를 숙이는 도정우다.

그 심정 충분히 이해가 된다.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 그 모멸감을 다 참아낸 것이니까.

“형우랑 거래 한번 터보려고 밤낮없이 고생하고 있는 친굽니다.”

“그래? 우리 회사가 좀 쉽지가 않지. 모든게 보수적인 곳이니까.”

한기태 상무의 말대로다.

공급처도 오직 국내 1위 전자 기업 한 곳에만 의존하고 있고, 은행 거래처도 10년 넘도록 그대로다. 그만큼 안정적이지만 그 안정에 너무 안주하고 있는 것도 사실.

그로 인한 문제가 조금씩 발생하고 있지만 워낙에 정체되어 있어서 문제 인식도 잘 되지 않고 있다.

“그럼 상무님. 제 차로 모시겠습니다.”

“그래. 그러지.”

내가 보필하듯 앞장서고, 한기태 상무가 그 뒤를, 그리고 도정우 대리가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나선다.

슬쩍 김준우 과장을 확인하니 어정띤 모습으로 그런 우리를 멀뚱히 보고만 있다. 한기태 상무가 같이 가자는 말을 안 하는 데 감히 물색없이 따라올 수가 없는 것이다.

굳이 나도 권하지 않았다.

별거 없는 자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

점심 식사를 빌미로 괜히 조급하게 일 얘기를 꺼냈다간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그러니 김준우 과장은 데려가지 않는 게 낫다.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한기태 상무와는 얼마나 친밀해졌는지 상상만 하게 한 다음, 도정우 대리가 적당한 MSG로 관계를 부풀리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물론 저런 진상으로 갓 뽑은 내 로망을 더럽히고 싶지 않은 사사로운 마음도 없잖아 있고.

아니나 다를까,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왔다.

한기태 상무와의 점심 식사가 있고부터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형우인터텍을 다녀온 도정우 대리가 한껏 고무된 얼굴로 나를 찾았다.

“차장님! 저 오늘 형우 재무부장 만났습니다! 그동안 진짜 얼굴 한번 보기 힘든 사람이었거든요. 우연히 마주쳐도 눈길 한번 안 줬었는데, 오늘은 먼저 저를 부르더라구요. 1년 동안 그렇게 발품을 팔아도 안 되던 일이 상무랑 점심 식사 한 끼 했다고 이렇게 간단히 해결이 된다는 게 참······.”

신이 나는 와중에도 허탈한 표정.

그 상무가 그냥 상무가 아니다.

한번 밀려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별다른 끈이 없는 개천용의 경우다.

혈연 학연 지연, 인맥 든든한 상류층들은 그들만의 정치논리에 따라 언제 어떻게 다시 원래 있던 곳의 부름을 받게 될지 모른다.

즉, 당장 내일이라도 형우인터텍의 상무가 아니라 슈퍼갑의 위치가 되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대표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과의 한 끼 식사였다.

태도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근데 차장님. 저기······ 형우 재무부장이 차장님을 한 번 볼 수 있냐고 하는데······.”

도정우 대리가 그렇게 말하며 내 눈치를 살핀다.

“그래. 밥 한 끼 하자고 해. 다음 주부터는 나도 내 업무 보게 될 거 같으니까 가능하면 이번 주 중으로.”

사실 이미 바쁘다.

격무에 시달리다 지방으로 전근을 택한 이전 차장의 업무를 본격적으로 인수인계에 들어간 상태였다.

하지만 이왕 도와주기로 한 거, 나도 결과는 보고 싶었다.

그리고 얼마 후, 마침내 형우와의 첫 거래를 텄다.

대출금은 40억.

형우인터텍의 부채총액에 비하면 그야말로 소액이지만, 첫 거래를 텄다는 게 중요했다. RM의 역할은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니까.

“이게 다 차장님 덕분입니다! 저 진짜 이 은혜 평생 잊지 않을 겁니다!”

어찌나 감격했는지 목소리마저 울먹거린다.

왜 아니 그럴까.

개진상을 만나 갖은 멸시와 천대 속에서 장장 1년이 넘는 시간을 버텨왔다.

받은 모멸감이 얼마일 것이며 실의와 자괴감에 빠져 마셔댄 술이 또 얼마일까.

숱하게 이불킥을 하며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씨발! 내가 더러워서 은행 때려친다!’ 라고 외쳐댔을 것이다.

그 힘든 시간들을 이겨낸 끝에 얻어낸 성과다.

그리고 그 성과에 기업금융팀 RM들의 나를 보는 시선도 사뭇 달라졌다.

※※※

“내일이면 대출 승인이 나는 건가? 허 참, 도 대리가 기어코 형우를 뚫었구만. 난 그거 아예 불가능하다 생각했거든.”

점심시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온 기업금융팀 RM들 세 명이 탕비실에 모여서 커피를 마시는 중 정남호 과장이 약간의 감탄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정남호 과장의 말을 이경호 대리가 받았다.

“다들 그렇게 생각했죠 뭐. 거기 완전 철벽이잖아요. 예전 박 과장님도 거기 한 번 뚫어보려다가 나가떨어진 거고. 그걸 도 대리가 이어받았으니까 합치면 거의 2년? 2년을 작업했는데도 전혀 진전이 없었으니까 뭐······.”

“엄밀히 따지면 사실 도 대리가 뚫었다고 보긴 어렵지. 다 하 차장님 덕분이잖아.”

“그러니까 말입니다. 2년 동안 못 뚫은 걸 여기 온 지 얼마나 됐다고······ 기업 하나 뚫는 게 그렇게 간단해도 되는 거냔 말이죠. 사람 맥빠지게.”

“그거야 그냥 운이 좋았던 거 아냐? 거기 재무본부 상무랑 그런 인맥이 있을 줄 어떻게 알았겠어?”

지성우 대리였다.

대리 중에서 유일하게 하성운 차장보다 나이가 많다.

그런 지성우 대리의 말에 정남호 과장이 핀잔을 준다.

“이봐. 지 대리. 그게 RM이 할 소리야? 우리한텐 인맥도 실력이야. 인맥처럼 귀한 자산이 없다는 거 알만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해?”

정남호 과장의 핀잔에 지성우 대리가 뻘쭘하게 입을 다물고, 이경호 대리가 슬쩍 지성우 대리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뭐, 지 대리님 말처럼 운이 좋았다면 좋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니까요. 들어보니까 그쪽 상무랑 계속 연락하면서 측면 지원을 제대로 해줬다고 하더라구요. 사실 자기 담당도 아닌데 그러기가 쉽지 않잖아요.”

“하긴, 그 정도는 했으니까 형우를 뚫은 거겠지. 확실히 대단한 양반이긴 해. 전근 오자마자 참······ 초고속 승진이 이젠 좀 이해가 된다고 할까?”

“덕분에 도 대리만 노난 거죠. 지금이야 40억이지만 한 번 물꼬를 텄으니까······ 형우 부채를 생각하면 대환으로 돌릴 수 있는 파이가 엄청 크잖아요? 형우만 들입다 파고들어도 실적이 어마어마해질 것 같은데······ 게다가 이번 일로 하 차장님과도 상당히 가까워진 것 같고.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지금 하 차장님만큼 핫한 라인이 또 없잖아요? 행장님에 수석부행장님, 거기다 조성환 상무님까지, 진짜 아주 그냥 후덜덜하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사수 역 내가 지원할 걸 그랬어.”

“자기보다 나이 어린 상사 수발까지는 절대 못 들겠다고 한 건 지 대리였잖아?”

“그러니까요. 지금 후회막급입니다. 그놈의 망할 자존심 따위가 뭐라고, 이래서 제가 승진이 늦는 겁니다.”

“난 어떻고? 나보다 일곱 살이나 어린 상사 라인 타기도 민망한 노릇이고. 그렇다고 가만 있자니 임원은커녕 지점장 한 번 못해 보고 은행 생활 접게 될 거 같고.”

“마인드를 바꿔먹으면 되잖아요? 여기가 은행이 아니라 일반 회사라고 생각하고, 하 차장님을 오너 아들이라고 생각하면 라인 타는 것도 좀 덜 민망하지 않겠어요?”

“자기 일 아니라고 참 쉽게도 말한다.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나······ 이 대리는 좋겠어. 하 차장님이 나이 많은 상사라.”

“그러게요. 저도 이참에 제대로 하 차장님 줄 좀 잡아볼까요?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성진실업 건으로 저도 하 차장님께 부탁 좀 드려보고 싶은 심정이긴 해요. 반년이 넘었는데 이건 뭐 아직도 답이 안 보이니······.”

“아서. 이젠 그럴 시간도 없으셔. 오늘도 팀장님 따라 하루 종일 기업 오너들이랑 미팅하고 계시잖아. 거래처 인사 끝나면 그때부턴 더 본격적으로 바빠지실 테고. 이미 골든타임은 지났다네. 이 사람아.”

※※※

아닌 게 아니라, 요즘 중소기업 오너부터 중견기업 임원들까지, 인사 다니느라 바쁘다.

심지어 팀장님 지시로 퇴근 후에는 틈틈이 골프까지 배우고 있다.

이젠 그게 내가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이란다.

그나마도 지금이야 숨 돌릴 틈이라도 있지, 다음 주부터는 지금보다 더 바빠진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며 아예 서류 속에 파묻혀 지내야 한다.

그땐 골프 연습할 시간이나 나면 다행이었다.

“차장님. 최종 승인 났습니다!”

도정우 대리가 감격에 찬 표정으로 나를 본다.

그의 손에는 형우인터텍의 대출 서류가 들려 있었다.

“정말 이게 다 차장님 덕분입니다.”

형우인터텍으로부터 대출 확답을 받은 후 했던 말이랑 똑같다.

“그게 다 내 덕은 아니지. 나야 길을 열어준 것뿐이고, 형우 이사진들을 설득시킨 건 온전히 도 대리의 공이지. 1년을 넘게 준비한 개선 솔루션들이 그만큼 완벽했다는 거 아니겠어?”

“아닙니다. 차장님이 길을 열어주시지 않았다면 애초에 제가 준비한 솔루션을 보여 줄 기회조차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이거.”

도 대리가 형우인터텍의 대출 서류와 빨간색 매직펜을 내 앞에 내민다.

“차장님이 적어주세요.”

“내가?”

“예. 형우 건은 제가 적기엔 민망해서요.”

장원 지점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잡아 온 대출의 대출 서류는 자신이 직접 등급 표시를 하고, 또한 직접 보관실에 보관하는 것이 한성은행의 전통이다.

“이럴 것까지 있어?”

“아닙니다. 이번엔 정말 제 지분이 너무 적습니다. 실적을 제 이름으로 올린 것도 죄송할 뿐인데······.”

“1년 동안 모진 고생 다 한 건 도 대린데, 당연히 도 대리 실적이지. 오히려 내 이름이 거기 들어가면 내가 너무 양아치고. 뭐, 그래도 마음이 정 불편하다면, 이리 줘. 이정도는 내가 적지 뭐.”

대출 서류를 건데 받아 등급 A를 크게 휘갈겼다.

혹시나 했지만 다행히 변동정보는 뜨지 않았다.

난 그 대출 서류를 들고 보관실로 향했다.

그리고 보관실 앞에서 잠시 멈췄다.

기업금융지점으로 전근 온 후 아직 보관실에는 한 번도 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장원 지점의 보관실이 단지 보물창고 정도였다면, 기업금융지점의 보관실은 그야말로 섬 전체가 보물로 뒤덮인 보물섬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내가 어느 선까지 이 보물섬의 보물을 취해야 할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미룰 수만은 없는 일.

이 대출 서류를 핑계로 보물섬의 보물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띠띠띠띠띠띠띠띠―

철컥―

문이 열렸다.

그리해 나는 보물섬으로 들어갔다.

< 나는 보물섬으로 들어갔다 > 끝

< 나, RM 다 됐다[여기서부터 유료연재 시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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