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43
그렇게 시작된 일과.
“저기 차장님······ 오늘도 차장님 차로 가면 안 될까요?”
도정우 대리가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보며 묻는다.
‘오늘도 차장님 차’라고 했지만 그 차가 어제와는 전혀 다른 차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가는 곳도 어제와는 다르다.
어제는 기존 거래처를 방문해 RM과 기업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 안에서 어떤 활동이 이루어지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면, 오늘은 도정우 대리가 현재 열심히 문을 두들기고 있는 새 거래처 후보들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게······ 오늘 가는 곳 중에 좀 진상이 하나 있거든요. 사람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아주 얼굴만 마주치면 손만 까딱까딱. 차장님 차에 태워서 점심 한 끼 하고 나면 태도가 좀 나아질 것도 같은데, 안 될까요?”
아침 회의 때까지만 해도 왠지 기운이 빠져 있던 도정우 대리였는데 어느새 또 기운을 차려서는 나를 보며 그 특유의 긴 입꼬리를 그어 올린다.
“그거 알아?”
“예?”
“여자친구가 지금 시험공부 중이라 첫 시승도 못 시켜줬어. 근데 그 첫 시승을 도 대리가 하겠다고?”
예쁜 것만 태우기에도 아까워 죽겠다.
내 말에 도정우의 표정이 이내 시무룩해진다.
감정이 참 즉각적으로 얼굴에 드러난다. 그래서 그런가 사람을 대할 때 어떤 속셈이나 그런 게 안 느껴진다. 여기 RM들 중에는 아직도 나에 대해 경계하고 못 미더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도정우만은 처음부터 편견이나 그런 거 없이 참 스스럼없이도 다가오는 느낌이다. 아니, 어쩌면 그 솔직하게 드러나는 감정들에 내가 오히려 안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떤 회산데?”
순간, 풀죽어 있던 도정우의 표정이 또 금세 환해졌다.
“잠깐만요!”
급히 자신의 책상에서 서류뭉치를 찾아 내게 내민다.
“주식회사 형우인터텍이라고, OLED 소재 부품을 만드는 회사예요.”
“상장사네?”
“예. 국내 대기업과 오래 거래를 해와서 공급망도 안정적입니다.”
“시총이 2천억에 자본보유액이 3천억 정도. 음······ 규모에 비하면 영업이익도 150억이면 나쁘지는 않는데······ 부채 이자가 좀 높은 편이군.”
“예. 그래서 파고들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부채 이자가 거의 영업이익에 근접한 상황이고, 그런 상황이 꽤 오래 지속 되고 있는 중이라 분명 자금 흐름이 원활하지 않을 겁니다. 이자 혜택으로 윗선을 공략하면 길이 열릴 것도 같은데······ 그 인간이 도통 틈을 안 줍니다.”
“이 정도면 이자 혜택만으로는 위험성이 있는데, 개선 방향은 마련했고?”
“예. 솔루션은 거기 중간에 따로 표시해줬습니다.”
확인해보니 꼼꼼하게도 정리가 되어 있다.
도 대리가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확실히 공략해볼 만한 곳이긴 하네.”
“그쵸?”
사실 이런 기업 찾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재무제표상 도산 위험은 없다 판단되는 곳 중에서 몇 날 며칠이고 살피고 살펴야 겨우 고개를 내미는 물건이다.
“뭐 해 줄 거야?”
“예?”
“내가 오늘 내 차에 도 대리를 태우면 내 여친한테도 미안한 노릇이고, 내 차도 그건 별로 안 좋아할 것 같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도 대리를 첫 시승자로 태우는 건데, 그럼 그만한 대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
“뭘······ 원하시는 건데요?”
“가볍게 커피 정도?”
“그거야 뭐, 어렵지 않죠!”
“일단 딱 한 달.”
“예?”
“한 달 동안 아침 커피 대령. 참고로 나 드립커피 말고는 안 마셔. 누구때매 내 입이 그렇게 길들여져 버렸거든.”
“······.”
망설임.
한 달이라고 해도 매일 아침 드립 커피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창주가 워낙에 유별나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가져다 바친 거지, 여간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 아니다. 덕분에 지난 1년간 완전히 거기에 길들여져 버렸다.
“무려 여친과의 역사적인 첫 시승을 포기한 건데, 그 정도는 나도 받아야 하지 않겠어?”
“음······ 좋아요. 그렇게 할게요. 대신 형우와의 거래가 성사될 때까진 도와주세요. 형우랑 거래만 트면 한 달 아니라, 차장님을 모시는 동안에는 평생 드립커피 제공해드리겠습니다. 아니, 아예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따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거 진짜지?”
“물론입니다. 제가 또 한 입으로 두말은 죽어도 안 하는 타입입니다.”
“좋아. 스케줄만 허락하면 언제든 도와줄게.”
그렇게 나는 장원 지점에 이어 기업금융지점에서도 매일 향긋한 커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은 처음부터 내 차로 이동을 하려고 했었다.
어제 들은 것도 있고, 그래도 차장으로 부임한 입장에서 내 차가 은행 일에 도움이 된다는데 모른 척 할 수야 있나.
그런데 평생이라는 떡밥이 자기가 뿌리고 자기가 덥썩 물겠다는 듯 나야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
“와아······.”
지바겐 특유의 클래식함과 페이스리프트를 통해 더해진 깔끔함과 세련됨의 조화.
내부를 둘러보며 연신 감탄을 토해낸다.
당연히 뿌듯하다.
승차감이 뭐 따로 있으랴.
이런 게 바로 승차감이지.
“근데 그 진상이란 인간은 어떤 인간이야?”
“아, 그 인간요? 음, 재무회계 김준우 과장인데, 그냥 말 그대로 진상이에요. 사람 무시하고 허세도 심하고, 허언증도 좀 있는 것 같고. 의사가 되려고 했다느니 집안에 누가 있다느니······ 대리 때도 진상이었는데 얼마 전에 과장 달고부터는 아주 그쪽 방면으로는 각성을 해버린 느낌?"
사실 허언증까지는 아니더라도 은행원들에게 자신의 이력을 부풀려 말하는 경우가 꽤 있는 편이다.
은행원을 잡상인 취급하려면 담당 은행원보다는 뭔가 더 있어 보여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아닐까 싶다.
“그래도 그런 개인사까지 주고 받을 정도면 꽤 진전이 있었던 거 아냐?”
“진전은요 무슨. 그냥 감정 오물통으로 사용한 거죠.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개인사도 알게 된 거고.”
대강 어떤 인간인지는 파악이 된다.
대개 그런 부류의 사람은 자신보다 밑이라고 생각하면 자신이 위라는 걸 끊임없이 증명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동안 꽤 시달렸겠네.’
도 대리가 그 귀찮은 커피 심부름까지 마다 않고 왜 내 차로 가고 싶어 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사실 차장님이 상대할 급은 아닌데······.”
“어차피 지금은 배우는 차원에서 같이 가는 건데 뭐. 팀장님 지시기도 하고.
아니나 다를까, 형우인터텍 본사가 있는 의정부시까지 가서 만나게 된 김준우 과장은 정말이지 예상했던 그대로의 인물이었다.
“안녕하세요. 김준우 과장님.”
의자에 비스듬히 상체를 기댄 채 마우스를 움직이고 있던 30대 중반의 김준우 과장이 도 대리의 인사에 슬쩍 눈길 한 번 주고는 귀찮다는 듯 미간을 찡그린다.
“또 왜 왔어?”
“왜 긴요. 영업하러 왔죠. 그리고 여긴 이번에 새로 오신 하성운 차장님.”
“한성은행 기업금융지점 하성운 차장입니다.”
“아, 예.”
내가 정중히 인사하며 명함을 내밀자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명함을 받아 든다. 그러고는 보는 듯 마는 듯 하며 자신의 책상 한 켠에 아무렇게나 툭 던져놓는다.
차장인 나한테도 이 정도면 도 대리한테야 오죽했을까.
도 대리가 슬쩍 내 눈치를 살핀다.
이런 일이야 익숙하다.
이런 회사라면 찾아오는 은행원이 우리 뿐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은행원들이 자기 앞에서 굽신굽신하니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착각하는 것이다.
신경 쓰지 말라는 의미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차장님까지 대동하고 무슨 일이야?”
“그냥 인사도 드릴 겸, 일전에 말씀드린 대출 건에 대해서 브리핑도 다시 할 겸······.”
“거참, 안 된다니까.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해?”
“그래도 이자비율을 생각하면 지금부터라도 회사 재정 상태를 개선해야······.”
“야! 네가 뭔데 남의 회사 재정 상태를 들먹거려? 이게 좋게 좋게 봐주니까······ 너 자꾸 선 넘을래? 내가 전에도 말했지? 자꾸 이러면 다음부턴 경비실에 말해서 아예 회사엔 발도 못 붙이게 할 거라고.”
‘야’, ‘이게’, 거기다 같잖은 협박까지.
아무리 자기보다 나이가 어리고, 또 잡상인처럼 보인다지만 아주 선 세게 넘는다. 이 정도면 손에 꼽히는 싸가지다.
내가 끼어들었다.
“진정하세요. 김 과장님. 이 친구가 내 앞이라 좀 오버를 한 것 같은데, 그냥 제가 새로 부임한 김에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해드릴 생각으로 찾아뵌 것뿐입니다. 마침 점심시간이기도 하고, 같이 가시죠? 좋은 곳 알아봐 뒀는데, 아마 마음에 드실 겁니다.”
도 대리를 보며 씩씩대고 있던 김준우가 내 말에 그제야 못이긴 척 진정을 한다. 그런 와중에도 도 대리를 사납게 노려보는 건 잊지 않는다.
“하 차장님이 그렇게 말씀하니까 이번엔 참는데, 한 번만 더 주제넘게 회사 재정 상태 운운하면 진짜 그땐 나, 도 대리 안 봐. 알았어?”
그러고는 의자에 걸쳐놓은 슈트를 신경질적으로 걸쳐 입는다.
아무리 화가 나도 밥을 거절할 리는 없다.
은행원을 잡상인 취급하며 귀찮아하면서도 은행원들의 방문을 굳이 막지 않는 이유.
점심 한 끼, 저녁 한 기, 때로는 술 접대.
빡빡한 박봉에 누리기 힘든 사치를 즐길 수 있는 기회니까.
“후유······.”
도 대리가 한숨을 푹 내쉰다.
숱하게 겪는 일인데도 조금도 익숙해 지지가 않는 일.
그런 도대리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고는 김준우 과장의 뒤를 쫓았다.
“제 차로 모시겠습니다.”
그런데 막 재무회계과 사무실을 나가려던 참이었다.
50대의 풍채 좋은 사내가 재무회계과 사무실로 들어왔다.
“아, 상무님 나오셨습니까! 근데 여긴 어쩐 일로······.”
“아, 확인할 게 하나 있어서. 근데 이분들은······?”
상무.
형우의 상무라면 상무보를 포함해 세 명이다.
그중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런 기회가 결코 흔한 것이 아니다.
난 그 즉시 그 상무라는 사람에게 다가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명함부터 내밀었다.
“한성은행 기업금융지점 하성운 차장입니다!”
내 그런 행동에 김준우 과장이 미간을 찌푸리지만, 이미 막기는 늦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내 재빠른 인사에 명함을 받아든 상무라는 사람이 순간 흠칫한다.
“하성운 차장이면······ 혹시 그 하성운 과장?”
“······?”
“한성은행 조성환 상무가 말한 그 하성운 과장 아닌가?”
“예? 조성환 상무님을 아십니까?”
“알지. 나랑은 동창인데. 얼마 전에도 그 친구한테서 자네 얘기를 들었지. 그 친구가 그렇게 남의 얘기를 하는 친구가 아니거든. 그래서 나도 좀 궁금해 하긴 했었는데, 이렇게 보게 되는군. 근데 그새 차장까지 달았어?”
“어제 기업금융지점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래? 참 대단하구만. 이러다간 아주 조 상무 머리 위에 앉겠어. 근데 여긴 무슨 일로? 아, 난 여기 재무본부 한기태 상무네. 혹시 그 친구한테 내 이름은 못 들어봤나?”
“······.”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있나.
아무래도 굳이 내 귀한 차에 저 진상을 태울 필요까진 없을 것 같다.
<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있나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