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42
“박순호 지점장입니다.”
뒤이어 지점장의 인사가 이어졌다.
“한성은행 최고의 RM들이 모여 있다는 이곳으로 부임하게 되어서 영광임과 동시에 아주 막중한 책임을 느낍니다. 조직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각자 소임을 다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나와는 달리 박순호 지점장의 인사는 거의 교장 선생님 조례 연설 수준이다.
그런데도 아무도 지겨운 티 싫은 티를 내지 않는다.
예비 임원의 위력이다.
미래의 임원이 말씀을 하시는데 감히 뉘라서 그 앞에서 싫은 내색을 할까.
‘저 양반, 아주 신나셨구만.’
그런 분위기에 더 신이 나서 침을 튀기는 게 아닌가 싶다.
그렇게 지점장의 일장 연설이 끝난 후, 기업금융팀 손정학 팀장이 나와 도정우 대리를 따로 불렀다.
“하 차장은 RM은 처음이라고?”
“예.”
“그럼 당분간은 업무 익히면서 분위기 적응부터 하자고. 도 대리가 옆에서 잘 도와주고.”
“예.”
이미 이야기가 되어있었는지 도정우가 담담히 대답하고는 나를 보며 웃는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입꼬리가 길어 웃는 얼굴이 유난히 환한 느낌이다
“그럼 차장님. 일단 거래처에 인사부터 하러 가실까요?”
웃는 얼굴.
하지만 그 얼굴에는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도정우 대리만이 아니다.
기업금융팀 모두가 어깨는 축 처져있고 눈 아래 다크서클은 아주 팬더가 따로 없다.
개중에는 회사에서 밤을 샜는지 셔츠는 구겨지고 머리는 까치집인 사람도 있다.
새삼 내가 기업금융지점에 왔다는 게 실감이 난다.
아무튼 그렇게 도정우 대리를 따라 지점을 나섰는데, 앞장서 가던 도정우 대리가 물었다.
“차 가져오셨어요? 전 어제 정비 들어가서······.”
“응. 내 차로 가지.”
그런데, 주차장으로 가서 차 문을 열자 도 대리가 약간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묻는다.
“이게 차장님 차예요?”
“어. 근데 왜?”
“아니, 그냥······ 하 차장님 소문이 워낙에 대단하셔서······ 그 엘리트 이미지가 있거든요.”
“그 엘리트 이미지에 비해 차가 너무 구닥다리다?”
“아뇨, 아뇨. 그게 아니고······ 죄송합니다.”
내 말에 뭔가 무례라도 저지른 게 아닌가 싶은지 당황해서는 급히 손사래를 친다.
그 모습이 좀 귀엽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다.
그래봤자 나와는 두 살 차이밖에 안 나는 서른 살.
귀엽게 느껴질 정도는 아닌데도 한참 어리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직급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그건 도정우 대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마 한창 윗 연배로 느껴지지 않을까?
나이차도 거의 안 나던 군대 왕고참들이 그렇게 늙어보일 수가 없었던 것처럼.
“사과할 거 없어. 화난 거 아니니까.”
“아, 그럼 혹시 지점 일 때문에 일부러 이런 차를······ 하긴, 일반 영업점에서는 소상공인들이 주 고객들이니 좋은 차 타기도 애매하긴 했겠네요. 근데 여기서는 그러실 필요 없으세요. 능력 되시면 좀 플렉스하고 다녀도 되는 곳이거든요. RM들 중에는 일부러 무리해서라도 좋은 차를 뽑기도 해요.”
“그래?”
“예. 사실 그게 오히려 일하는 데 더 도움이 되기도 하거든요. 기존 기업들 관리도 관리지만 우리 주요 업무는 새로운 거래처 개척이잖아요. 재무재표상 돈 갚을 능력이 된다 판단만 되면 어디든 쑤시고 들어가야 하고.”
그 정도야 알고 있다.
“근데 어딜 가든 잡상인 취급부터 받아요. 재무재표상 돈 갚을 능력이 되는 회사는 대부분 돈이 아쉬운 곳은 아니니까요. 차장님도 아실 테지만, 돈이 아쉬운 기업한테 은행원은 신이지만 돈이 안 아쉬운 기업한테는 귀찮게 옆에서 앵앵거리는 날파리나 다름없잖아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잡상인 취급은 물론이고 개중 인성 썩은 진상들은 사람을 정말 벌레 취급하기도 한다.
“한 번은 거기서 알바를 하던 녀석이 저한테 만원짜리 던져주면서 담배 심부름을 시킨 적도 있는데, 와! 그땐 정말 현타 제대로 오더라구요. 이 짓을 계속해야 하나······.”
그날 일이 다시 떠오르는지 새삼 다시 현타가 오는 표정.
영업일 하면서 그런 일 한두 번 안 겪어 본 사람이 있을까?
더구나 돈에 관련되면 사람의 밑바닥을 적나라하게 보게 되는 경우가 많은 만큼, 은행원이 여러 직업군들 중에 정신노동으로는 탑급이라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다.
하물며 RM이라면 오죽할까.
“근데 일단 좋은 차로 밀고 들어가면 경비원들 태도부터 달라지거든요. 곽운기 과장님이라고 작년까지 계셨던 분인데, 워낙에 집안에 돈이 좀 있으신 분이라 BMW7시리즈를 타고 다니셨거든요. 근데 그분이랑 영업하러 가면 완전 꿀 빠는 느낌? 콧대가 하늘을 찌르던 재무 담당 대리도 그 차 타고 점심 한 끼 대접하고 오니까 갑자기 형형거리는데 참······.”
“사람을 급으로 나누는 세상이니까. 없는 사람들이 그런 거에는 또 더 민감하기도 하고. 확실히 이 차로는 RM일 하기에는 무리가 있긴 하겠네.”
“아무래도 좀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차장 직함이면 어디서 무시당하지는 않을 거예요. 저 같은 말단 대리랑은 다르잖아요.”
“차장 직함이나 달고도 이런 차를 굴리는 게 더 한심해 보일 수도 있지. 괜찮아. 그렇잖아도 곧 새 차 출고되거든.”
“아, 차 바꾸시는 거예요?”
“응.”
“어떤 찬데요?”
도정우 대리의 눈이 반짝반짝한다.
차에 한이 참 많은 친구인가 싶다.
난 도정우의 질문을 가벼운 미소로 흘려넘긴 후 차에 탔다.
내 그런 반응에 별로 자랑할 정도로 좋은 차는 아니다 싶었는지, 더 묻지 않고 나를 따라 내 옆자리에 앉는 도정우 대리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낸다.
립스틱모양의 화장품.
하지만 입술에 바르는 게 아니라 눈에 바른다.
턱밑까지 내려온 다크서클을 지우려는 거다.
머리를 정돈하고 미스트를 뿌리고······ 어딘지 숭고해보이기까지 하는 작업들.
“꾸질꾸질한 모습으로 고객들을 만날 수는 없잖아요.”
프로페셔널하다고 해야 하나?
RM이란 게 다방면에 스페셜 리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분야에까지 능숙해져야 하는 건 줄은 미처 몰랐다.
“그리고 이거.”
내게 내미는, 방금 도정우가 눈에 바른 아직 개봉하지 않은 화장품.
“아마 차장님도 곧 필요하게 될 거에요.”
씨익 웃는 얼굴이 의미심장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그런 한편으로 어디서 본듯한 익숙함.
뭐지? 이 PPL같은 시츄에이션은?
그러고 보니 며칠 전 본 김사나 드라마에서도 이 비슷한 장면을 본 것 같은데?
아무튼 그렇게 나는 도정우 대리를 따라 거래처를 돌았다.
어차피 그저 업무 분위기 파악 차원일 뿐, 앞으로 내가 담당하게 될 회사들은 아니었다.
RM차장인 내가 앞으로 상대해야 하는 것은 자본금 1천억 이상 기업의 오너들, 혹은 수조 원 자산의 중견기업 임원들이다.
당연히 도정우 대리가 담당하고 있는 기업들은 그보다 규모가 떨어진다.
그럼에도 자산 규모가 기본 수백억이다.
새삼 내가 RM이 되었다는 걸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
퇴근 후.
첫 출근이라 회식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손 팀장이 거래처에 일이 생기는 바람에 환영회는 다음으로 미뤄졌다.
그렇잖아도 어떻게든 양해를 구하고 회식을 미룰 계획이었다.
오늘 난 아주 중요하게 할 일이 있다.
무려 9개월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내 로망이 실현되기 때문이다.
난 퇴근하자마자 벤츠 전시장으로 달려갔다.
유리 창문 너머로 걸려있는 커다란 로고만 봐도 마음이 설렌다.
그 가득한 설렘을 안고 매장 안으로 들어서자 깔끔한 차림의 남자 직원이 다가왔다.
미리 연락을 받고 대기하고 있던 내 담당 유진환 대리다.
“어딨습니까?”
다짜고짜 던지는 말에 유진환 대리가 웃으며 말했다.
“일단 간단히 확인절차부터 도와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유진환 대리가 매장 안에 놓여 있는 책상으로 나를 안내했다.
이런저런 조회가 이루어진다.
확인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난 안절부절이다.
의자 아래 내 두 다리도 정신없이 떨고 있다.
아마 어머니가 보았다면 복 나간다고 등짝 스매싱을 날리지 않았을까.
“다 됐습니다. 바로 출고 진행할까요?”
드디어 확인절차가 끝났다.
“예!”
내 조급한 대답에 풋 웃음을 흘린 유진환 대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이 순간 나는 그야말로 어미 오리를 따르는 새끼 오리다.
그리고 드디어 녀석을 만났다.
검은색 천에 쌓여 있는 중에도 그 실루엣이 그렇게 웅장하고 아름다울 수가 없다.
숨이 턱 막힌다.
천을 걷어냈다.
드러나는 자태.
순백의 지바겐.
아! 나의 로망이여!
무려 9개월의 기다림이었다.
그마저도 운이 좋은 거라고 했다.
그렇게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만나게 된 것이다.
사실 영화 대박이 터지고, 처음 차를 신청할 때만 해도 주위의 시선이 걱정이 되었었다.
도 대리의 말대로 비싼 차가 거래처 고객들에게 위화감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영업용 차를 따로 굴려야 하나 고민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도정우 대리가 RM은 플렉스 해도 된다고 했으니까.
아니, 할 수 있으면 하는 게 좋다고 했으니까.
사실 지금 내 자산에 비하면 지바겐도 조금 소박한 감이 있긴 하지만, 내겐 꿈의 차다.
람보르기니니 페라리니 맥라렌이니, 그런 슈퍼카들 보다 내겐 지바겐이 최고다.
지금 이렇게 그 자태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히죽히죽 실없는 웃음이 계속해서 새어 나올 정도로 나 지금 너무 행복하다.
“한번 타 보세요.”
내부 비닐을 걷어내는 동안 차량의 전반적인 기능과 편의 사양을 설명하던 직원이 이내 웃으며 키를 건넨다.
올라탔다.
아! 이 고급짐, 이 아름다움, 잡은 스티어링 휠에서 느껴지는 이 갬성!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그저 당장 엑셀을 밟고 우렁차게 요동치는 그 뜨거운 심장의 전율을 만끽하고 싶을 뿐.
그래! 나 지금 너무 행복한 것이야!
※※※
도정우 대리의 아침은 오늘 유난히 일찍 시작했다.
출근 전에 정비한 차량을 찾아와야했기 때문이다.
중형 세단.
강남 소나타라는 BMW5시리즈에도 못 미치는 차종.
그마저도 재작년에 무리를 해서 지른 거였지만 늘 마음에는 차지 않았다.
곽운기 과장의 BMW7시리즈로 누렸던 그 찬란했던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하니까.
하지만 오늘은 기분이 조금 달랐다.
늘 마음에 차지 않던 차가 왠지 더 예뻐보이고 멋져보인다.
어제 본 하성운 차장의 차 때문이다.
‘그 잘나가는 하성운 차장님도 그런 차를 몰고 다니는데, 이 정도면 나한텐 과분한 거지.’
물론 곧 새 차를 출고하신다지만, 지금 타고 있는 차를 보니 자신의 차보다 더 좋을 것 같지도 않다.
차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신 모양이다.
그래서 만족하기로 했다.
‘은행 말단 대리에게 이정도 차면 과분한 거지 뭐. 옵션도 빵빵하고.’
그래. 곽운기 과장이 유독 지나쳤던 것뿐, 다들 그렇게 분수에 맞게 살아가는 거 아니겠는가.
욕심을 버린 자의 홀가분함.
해탈과도 같은 어떤 해방감.
눈 높이를 낮추니 마음이 이보다도 편할 수가 없다.
그렇게 기분좋게 차를 찾아 출근한 참이었다.
차를 주차장에 세워두고 내리는데, 웬 흰색 지바겐 한 대가 지점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강남에서 지바겐 보는 거야 대수로울 것도 없는 일이지만, 영업시간도 전에 지점 주차장에서 저런 비쥬얼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누구 차지?”
그렇게 의아해 하고 있는 그의 시야로 지바겐에서 낯익은 얼굴의 한 사내가 내린다.
“하 차장님······?”
“어? 도 대리. 이제 출근하는 거야?”
차에서 내린 하성운 차장이 그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 온다.
“하 차장님. 저 차는······.”
“아, 이거? 어제 말했잖아. 차 곧 바꿀 예정이라고. 거의 1년 가까이 기다렸는데 어제 겨우 출고가 된 거지.”
“······.”
“이 정도면 그 재무 담당 대리가 나한테도 형형 거리려나? 하하.”
“······.”
도정우가 거의 반사적으로 자신의 차를 돌아본다.
무슨 저주에라도 걸린 것일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꽤 근사해 보였던 자신의 차가 지금은 오징어가 되어있었다.
“······.”
< 아! 나의 로망이여!(수정-윤 과장 삭제)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