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40
“웬일로 이 시간에 술을 다 하재? 일요일 저녁이면 보통 가족과 함께가 국룰 아니냐?”
“나 가출했다.”
저녁 9시쯤이었다.
이관우가 술 한잔하자는 말에 호프집으로 달려가 보니 한다는 말이 그거였다.
“가출이 맞긴 해? 쫓겨난 건 아니고?”
“쫓겨났으면 문 앞에서 빌고 있지 여기서 이러고 있겠냐?”
하긴, 그건 그렇다.
“그래서? 무슨 일로 가출을 다 한 건데?”
“선아가 드라마도 못 보게 하잖아.”
“드라마? 너 드라마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하······ 아, 혹시 김사나 신작?”
저번 주부터 김사나 주연의 16부작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캐스팅이며 작가며 연출이며, 그야말로 초호화 라인업에 편성도 주말 황금시간대.
제작 단계부터 이미 화제를 모으기 시작해 첫 주에 시청률 10%를 돌파했다. 반응도 대단해서 연일 화제만발이었다.
당연히 나도 잘 보고 있다.
“지는 박보검만 나오면 꺅꺅 정신을 못 차리면서 남 드라마 보는데 왜 자꾸 채널을 돌려대냔 말이지.”
“그래서 뛰쳐나온 거다?”
“아니. 티비는 깔끔하게 포기하고 PC로 봤지. 그랬더니 오늘 보니까 PC가 안 되는 거야. 이게 락을 걸어 놨더라고. 말이 돼? 내 하루의 낙이 애들 재워놓고 하는 배그 한 판인데?”
“그러니까 김사나 때문이 아니라 배그를 못 하게 해서 뛰쳐나온 거다?”
“아니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냐. 이건 어디까지나 인간으로서 존엄과 남편으로서의 자존감에 관한 문제라고.”
“배그 때문이구만.”
“······.”
“어제 배그 몇 시까지 했어?”
“새벽······ 3시쯤?”
“엊그제는 몇 시간 했는데?”
“뭐, 엇그제는 불금이었으니······.”
“날 밤 깠네. 이게 배그 때문에 혼나놓고 어디서 감히 김 배우님을 팔아!”
“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배그란 게 하다 보면 그렇게 딱 끊을 수가······.”
“지랄 그만 떨고 집에 들어가서 무조건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 한창 잘나가던 애 덜컥 쌍둥이 임신시켜서 집에 눌러 앉혀 놓고, 육아 스트레스만 해도 충분히 힘든 애 팽개쳐두고 밤새 배그나 하고 앉았냐? 나 같았으면 락이 아니라 아예 그 PC 고물상에 팔았어!”
오히려 이렇게 멀쩡히 살아 숨 쉬고 있는 거에 감사해야 할 판이다.
“······ 하긴, 요즘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실세 중의 실세께서 이런 비천한 자의 비애 따위를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건 또 뭔 말이야? 나는 새는 뭐고 실세는 또 뭐야?”
“나도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대체 누구 줄이 진짜야?”
“누구 줄?”
“본점 사람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다고. 너 누구 줄인지. 김강철 전무 라인인 줄 알았더니 행장이랑 붙어먹고, 그래서 행장 라인으로 갈아탔나 했더니 요즘은 또 조성환 상무랑 붙어 다니고. 대체 누구 라인이야? 나까지 헷갈린다고.”
붙어먹는다는 말이 거슬리긴 하지만 딱히 반박은 못 하겠다.
김강철 전무는 처음부터 날 자기 사람으로 못 박은 사람이고, 은행장은 날 자신의 4연임 도전의 홍보용으로 썼다. 그리고 조성환 상무는 요즘 들어 부쩍 친한 척이다.
이걸 절묘한 줄타기라고 해야 하나?
물론 날 시기하는 사람들은 박쥐 같은 인간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근데 나 정말 누구 사람이지?’
아니, 누구 사람이냐가 중요한 게 아닌 것 같다.
중요한 건 내가 누구 사람이길 원하느냐인데, 사실 별로 관심없다.
내가 뭐하러?
수중에 200억이나 있는데?
“그렇게 애매하게 굴 때가 아냐. 이젠 노선을 확실히 해야 할 때라고. 곧 7월이잖아.”
7월.
여름과 함께 한성은행의 차기 행장 선출 절차가 시작된다.
특히 올해는 더 특별하다.
작년에는 유종원 행장 단독 후보로 싱겁게 끝나버렸지만, 올해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4연임이란 게 한성은행 사상 초유이기도 해서 반발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은 데다, 그래서 이번엔 김강철 전무와 조성환 상무도 만만치 않을 거라는 말도 나오고 있었다.
지이이이이잉―
“민감한 시기인 만큼 애매하게 굴다간 그 셋한테 다 찍힐 수도 있어.”
“반대로 지금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게 나을 수도 있지. 내 걱정은 그만하고 전화나 받지?”
지이이이이잉―
아까부터 계속 울리고 있다.
“이렇다니까. 사람이든 물건이든 없어져 봐야 아쉬운 걸 안다니까.”
짐짓 거만을 떨어본다.
하지만 벨이 울릴 때마다 이관우의 어깨는 움찔움찔 거리고 눈은 불안으로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녀석의 말마따나 존엄과 자존감으로 버티고는 있는 모양이지만 이미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인데 오래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세 번의 전화가 끊기고 메신져의 문자 알림음이 들린 순간, 정말이지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를 스마트폰을 낚아챈다.
그리고 문자를 확인하고는 대번에 얼굴이 환해져서는 벌떡 몸을 일으킨다.
“락 풀었다고, 하루 두 시간은 하게 해주겠대!”
무슨 대단한 승리라도 한 것 같다.
그래봤자 아무 제약도 없이 하다가 고작 두 시간 허락받은 건데.
고작 배그 두 시간에 넘어가는 존엄과 자존감이라니.
‘친구. 자네의 존엄과 자존감은 너무 싸구려인 듯 싶네만.’
“그래서, 갈려고?”
“들어오는 길에 애들 기저귀 사 오래. 애들도 인권이 있는데 아무 데나 똥 싸지르게 둘 수는 없잖아!”
들어올 명분까지 주고, 선아가 생각보다 더 현명한 것 같다.
아니, 이관우를 다룰 줄 안다고 하는 게 맞나?
아니, 그냥 이관우가 단순한 건가?
그렇게 냅다 달려 나가는 이관우를 보고 있자니 파블로프의 개가 생각나는 건 왜 일까?
※※※
7월이 되었다.
한성은행에 역사적인 4연임 행장의 탄생이냐, 새로운 신성의 등장이냐.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모두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행장추천위원회가 발표한 숏리스트, 그러니까 최종후보군에 김강철 전무와 조성환 상무가 모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조성환 상무는 노조에서 반대가 심했거든.”
지점장의 말이다.
“노조에서 무슨 이유로요?”
“워낙에 이런저런 일로 구설이 많은 사람이라 투서가 많이 들어왔어. 한 차장 셀프대출 건도 그렇고. 그 일에 조성환 상무가 관련되어 있을 거라는 건 하 과장도 알고 있었잖아?”
“그래도 그게 언제 적 일인데······.”
문득 셀프대출 사건이 터졌을 때 김강철 전무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던 것이 생각났다.
“혹시 그럼 김강철 전무님이······.”
지금을 위해 쟁여놓은 것들을 노조에 푼 것일까?
아니다. 김강철 전무 자신도 후보로 등록을 안 했는데 굳이 쟁여놓은 걸 풀 이유가 없다.
“전무님이 아니라 행장님 쪽일걸?”
“예?”
“그 양반이 그래서 무서운 거지. 겉으로는 사람 좋아 보여도 작정하면 수단 방법 안 가리고 결과를 만들어 내거든. 괜히 그 자리에 계시는 게 아니란 말이지.”
듣기로는 금감원에 한국은행, 그리고 한성금융지주까지, 조성환 상무의 인맥이 상당하다고 들었다. 그런데도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유종원 행장에겐 아직 상대가 안 되나 보다.
절로 안도가 된다.
돈놀이에 관해서 만큼은 소시오패스 같은 조성환 상무가 한성은행의 행장이 된다면 한성이 어떻게 돌아갈지 상상만 해도 아찔해진다.
“그럼 전무님은 왜 후보 신청을 안 하신 겁니까?”
“행장님과는 결이 같거든. 같은 결로는 애초에 행장님을 밀어내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고 계시는 거야. 차라리 삼파전이라면 둘은 신진이니 분위기를 새로운 바람 쪽으로 몰고 갈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런 여지를 주지 않으려고 행장님이 조성환 상무를 먼저 빠르게 쳐낸 거겠지.”
“······.”
“그래도 아예 백기 투항은 아냐.”
“백기 투항은 아니라면요?”
“아무리 행장님이 우세한 상황이라고 해도 4연임에 대한 반대 여론도 무시할 수는 없거든. 연임에 성공을 하더라도 그건 두고두고 목 안에 가시처럼 굴 테고. 그래서 전무님과 손을 잡기로 하신 거야. 그게 반대 여론의 목소리를 단번에 잠재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
“손을 잡기로 했다면 어떤······?”
“차기 행장 선출이 끝나면 바로 임원들 인사이동이 있을 거야. 이번에 부행장들 네 명이 임기가 만료되거든. 그 네 자리 중 전무님은 수석부행장으로 영전을 하실 거야.”
“이번 행장 후보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수석부행장 자리를 얻기로 하신 겁니까?”
“그렇지.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
“······?”
“한성의 부행장 임기는 2+1이야. 3년이지. 하지만 보통 부행장이 행장 인선에 출마하는 경우는 2년 임기가 채워졌을 때쯤이야. 즉, 앞으로 2년 동안은 후보로 나서지 않을 거라는 거지.”
“그럼 행장님이 5연임까지 하실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하실 수도 있다는 게 아니라 하시려는 거야. 그걸 전무님도 용인을 하신 거고. 그 말은 2년 후엔 전무님 차례라는 거지. 분명 행장님의 지원을 약속받으셨을 테니까.”
김강철 전무의 은행 내 입지에 유종원 행장의 입김까지 더해진다면 차기 행장 자리는 김강철 전무의 것이 될 확률이 높다.
‘조성환 상무는 이렇게 나가리가 되는 건가?’
하긴, 조성환 상무야 급할 것도 없다.
김강철 전무에 비하면 10년은 젊으니까.
※※※
예상대로 차기 은행장은 결국 한성은행 최초로 4연임에 성공한 유종원 행장이었다.
난 적절한 타이밍을 봐서 행장을 찾아가 축하 인사를 드렸다.
“행장님! 4연임에 성공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아무리 축하 인사라고 해도, 일개 지점 과장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행장을 찾아가 인사를 드린다는 게 사실 말이 안 되는 거지만, 이런 경사에 이젠 인사를 안 드리면 무례가 아닐까 싶어 안 찾아뵐 수가 없었다.
“그래. 하 과장. 고마워. 이게 다 하 과장 덕분이네.”
“무슨······ 제 덕분이라뇨. 말도 안 됩니다.”
“아냐. 자네 지분이 적지가 않지. 아무 대비도 못 한 상태로 셀프대출 사건이 터졌으면 한성은 신뢰도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을 거고, 거기다 1200억 사기 대출만 해도 자네가 아니었으면 속절없이 당했을 테고······ 그게 다 내 임기 중 일어난 내 과실이고 허물인 만큼 지금처럼 연임이 쉽진 않았겠지. 내 잊지 않고 있다는 것만 알아두게.”
뭐, 잊지 않아 준다면 나야 고마운 일.
마음이 아주 든든하다.
아무튼 이사회 승인 후, 그렇게 유종원 행장의 네 번째 임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박순호 지점장의 말대로 임원진을 향한 대대적인 인사개편이 단행되었다.
물론 그 핵심은 김강철 전무의 수석부행장 승진이었다.
한편으로, 유독 조성환 상무만은 그 인사 개편에서 빠져 있어서 다들 의아해하기도 하고, 유행장이 조성환 상무를 쳐내기로 한 것이 아니냐는 말들도 나왔다.
그런데 임원진을 향한 그 대대적인 인사 개편에 황당하게도 나까지 끼어 있었다.
[인사발령장]
[박순호 장원 지점 지점장 → 서초동 기업금융지점 지점장]
[하성운 장원 지점 대부계 과장 → 서초동 기업금융지점 기업금융팀(RM) 차장]
기업금융지점.
일정 규모 이상의 중소기업들을 상대하는 곳.
일반 영업점과는 다루는 돈의 액수도, 상대하는 사람의 사회적 지위도, 개개인이 가진 권한과 책임도 다른 은행원의 꽃.
거래처 중에는 상장 회사들도 수두룩하다.
작년 가람필방의 주식투자 때 고려제당의 변동정보를 얻었던 곳도 바로 여기였다.
그곳 기업금융팀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기업금융전담역인 RM(Relationship Management)으로.
심지어 차장으로 승진까지 되어서.
< 기업금융지점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