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38
며칠 뒤였다.
김성주 부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하 과장님. 저희 그냥······ 지분 넘기기로 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결국 그렇게 되는 건가?’라는 생각이 스쳤다.
변동정보가 바뀌기를 내심 기대하긴 했지만, 또 그 변동정보가 그렇게 간단히 바뀌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난 그 길로 구미로 내려가 김한철 대표를 만났다.
“······.”
며칠 사이 김한철 대표는 많이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차분하면서도 맑은 기운이 느껴지던 눈빛도 탁하고 퀭했다.
지난 며칠이 그에게 얼마나 힘든 시간이었는지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한편으로 어딘지 홀가분해져 보이기도 한다.
“미안하네. 하 과장이 그렇게까지 마음을 써 주었는데 이런 결정밖에는 할 수 없어서······.”
나한테 미안할 일은 아니다.
“왜 그런 결정을 하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부사장이 그러더군. 지금까지 회사 경영엔 관심도 없어 놓고 이제 와서 넘긴다니까 아까운 거냐고. 틀린 말이 아니야. 회사가 2천억 수주 계약을 진행하고 있는데도 그런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경영자로선 실격이었던 거지.”
단지 그 말만 나눈 것은 아닐 것이다.
온갖 악다구니들이 서로의 마음을 할퀴고, 지난 세월을 부정하고,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겼을 것이다.
“내가 조금 더 돈이 있어서 대표 자리에 앉긴 했지만, 우리 셋 중 회사 일에 제일 관심이 없었던 것도 나였지. 아들놈이 여기저기 돈 꾸러 다니느라 그 고생을 하는 데도 난 나 좋은 일만 하고 다녔으니까. 그것도 다 회사를 위하는 일이라 핑계를 대긴 했지만, 솔직히 내가 하기 싫은 일은 그 친구들한테 다 떠넘겼던 거야.”
이 자기반성도 그 악다구니들 속에서 깨닫게 된 것이겠지.
“부사장 말대로 난 자격이 없어. 그리고 부사장 없이 나 혼자 회사를 꾸려갈 자신도 없고. 다행히 경영권이 그 회사에 넘어가더라도 경영은 부사장이 계속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고 하니까······ 나와 부사장 둘 중 하나가 남아야 한다면 회사를 위해서도 부사장이 남는 게 낫지.”
냉정한 계산 뒤에 내린 결론이 아니다.
의욕이 꺾인 것이다.
기술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것도 회사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게 자신이 회사를 위해, 자신을 따라와 준 친구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제 믿었던 사람의 배신으로 그 동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은퇴······를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집주인이 바뀌면 전 주인은 나가는 게 이치지.”
하긴 남아 있어봤자 모멸감만 느끼게 될 뿐이다.
난 김성주 부장을 보았다.
“부장님도 같이 그만두시는 겁니까?”
이번 일만 겪지 않았으면 언젠가 가온RNC의 주인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아닙니다. 전 남을 겁니다. 그 작자들이 아버지가 평생을 일궈 온 회사를 망가트리지 않도록 감시는 해야 하니까요.”
김한철 대표가 가진 지분이면 15%를 넘겨주고도 2대 주주다.
충분히 그럴 자격이 된다.
‘어쨌든 결국 내 개입과는 상관없이 KMT의 자회사가 되는 거로군.’
변동정보 대로.
다만, 조성환 상무와 그 뒤의 돈줄이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다르게 진행이 되었다.
그 시작도 또한 가온RNC였다.
“그래서······ 지분은 얼마에 매각하기로 하셨습니까? 설마 원래 책정된 가격대로 팔기로 한 건 아니겠죠?”
“물론 그건 아닙니다.”
김성주 부장의 대답.
“2천억 대 수주 계약을 알았는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얼마를?”
“처음의 300%를 불렀습니다.”
300%.
부사장이 제시한 금액은 회사 가치를 240억으로 책정하고 지분 15%에 해당하는 금액인 36억이었다.
300%면 108억이다.
무려 72억의 예산 초과.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일전에 하 과장님이 말씀하신 남은 10%, 아무리 생각해도 그만한 지분이 나올 만한 곳은 이수현 전 부사장님 뿐이라, 그분께도 여쭤봤더니 확실히 그런 얘기가 있었다고 하더라구요. 다행히 아직 계약이 진행된 상황은 아니라 그분께도 수주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 저희가 생각하는 지분의 가격도 같이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합쳐서 25%, 매각 금액은 180억이다.
조성환 상무 측이 처음 계획한 매입 액수는 60억.
무려 120억의 예산이 초과되는 것이다.
“부사장이······ 아니, 인수 회사 쪽에서도 동의를 한 일입니까?”
“아직은 답변이 없습니다. 하지만 2천억 수주 계약과 그로 인한 회사의 미래 가치를 생각하면 그 이하로는 어림도 없죠. 그리고······ 아쉬운 건 우리가 아니라 그쪽이잖습니까?”
“······.”
“단지 우리 회사 하나 먹자고 시작한 일은 아닐 테고, 분명 그 뒤에 뭔가 더 있을 텐데, 그리고 이미 판도 꽤 크게 벌여놨을 것 같은데, 120억 때문에 포기하진 않겠죠. 여기서 접으면 손해가 막심할 테니까. 포기한다고 해도 우리야 뭐, 딱히 손해 볼 건 없구요.”
“······.”
난 새삼스러운 눈으로 김성주 부장을 보았다.
족벌 경영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김성주 부장에 대해서 과소평가하고 있었나 보다.
‘하긴, 그 자금난 속에서도 꿋꿋이 회사의 살림을 꾸려온 사람인데······.’
이 정도 판을 못 읽을 리가 없다.
김성주 부장의 짐작대로 그들은 분명 지분을 사들일 것이다.
120억이라는 웃돈까지 얹어주며.
마지못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하지만 그렇게 되면 가온RNC를 헐값에 사들여 판을 키운다는 조성환 상무와 돈줄의 계획은 시작부터 틀어진다.
과연 그게 이 판에 어떻게 작용할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이 도박판이 성공한다고 해도 수익률은 현격히 떨어질 거라는 것.
“아, 그리고······ 하 과장님 이름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저번에 부사장님과 조성환 상무와의 관계를 물으신 게 이번 일과 관계가 있는 것 같아서.”
센스까지 좋다.
물론 이 일로 조성환 상무와 척을 지게 된다고 해도 이젠 별로 두렵지는 않다.
하지만 쓰레기적 동질감이든 어쨌든 은행 실세가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데, 굳이 그 관계를 깨트려서 좋을 것도 없다.
김성주 부장.
점점 마음에 든다.
나는 웃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하하.”
※※※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KMT의 지분 인수가 이루어졌다.
인수 가격은 240억.
같은 25%인데도 김현철 대표와 이수현 전 부사장의 지분 가격은 180억인데 반해 먼저 매입한 부사장의 지분 가격은 60억.
물론 우회 상장 회사의 주식 등, 더 큰 걸 약속받긴 했을 테지만 아마 속은 좀 쓰리지 않을까?
‘그런데······ 저 인간은 왜 저렇게 말짱한 거야?’
“상무님! 안녕하십니까!”
차규완 본부장의 부름을 받고 본점에 들렀던 차에 마침 로비를 나오고 있는 조성환 상무와 마주쳤다.
120억이면 될 걸 나 때문에 그 두 배가 더 들어갔다.
그럼 좀 흐트러진 모습이거나 저기압이기라도 해야 할 텐데,
따각 따각 따각 따각
걸음도 여전히 참 기계적이고,
“어. 하 과장. 오늘도 여신심사부 호출인가?”
저기압은커녕 이젠 완전 자기사람인양 반갑게도 맞아준다.
“예! 어디 가시는 길이십니까?”
“귀한 고객 만날 일이 좀 있지. 아마 나중에 하 과장에게도 소개시켜 줄 일이 있을 거야. 아무튼 지금은 바쁘고, 내 일간 다시 부르지. 그땐 같이 술도 한 잔 하자고.”
“예! 불러만 주십시오!”
“그래 그래.”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렇게 차갑던 사람이, 지금도 여전히 차갑긴 마찬가진데 나한테는 그래도 곁을 준다.
물론 그 또한 동질감일 것이다.
물론 이제 내 생각은 조금 다르지만.
어쨌든 그래서인지 주변에서 날 신기하다는 듯 바라 본다.
그런 시선은 무시하고 내 눈은 멀어져가는 조성환 상무를 쫓았다.
‘통이 큰 건지······.’
120억 예산 초과 쯤은 아무렇지 않다는 것일까?
아니면 그래봤자 120억도 남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것일까?
정말이지 어떤 사람인지 가늠할 수가 없는 인물.
확실한 건 어느 쪽이든 간에 그릇 하나는 오지게 크다는 것.
‘하긴, 저 정도는 되니까 시총 20조에 자산 규모 500조의 한성은행 차기 행장으로 거론되는 거겠지.’
그런 사람이 내게 동질감을 느낀 거면 영광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난 고개를 잘래잘래 저었다.
그릇이 간장 종지라도 저런 괴물은 되고 싶지 않다.
'저 인간이라면 왠지 돈 귀신도 수족으로 부릴 것 같단 말이지.'
그렇게 진저리를 치며 돌아서는데,
지이이이잉―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한성은행 하성운 과장인가?”
생소한 목소리.
“누구십니까?”
“나 가온RNC의 대표 조정인이네.”
“······.”
이 인간이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고?
주주명부라도 본 것일까?
아니, 주주명부에는 이름과 주소뿐이다.
‘혹시 조성환 상무가 가르쳐준 건가?’
“만나서 긴히 할 말이 있는데, 언제 시간 되시는가?”
잠시 고민했다.
그다지 유쾌한 자리가 될 것 같진 않다. 하지만 이 인간이 왜 날 보자고 하는지, 그리고 어떤 인간인지 한번 보고 싶기는 했다.
그래서 약속을 잡았다.
그날 저녁, 나는 한적한 카페에서 조정인 부사장과 만났다.
아니, 이젠 조정인 대표다.
“반갑네. 나 가온RNC의 조정인이라고 하네.”
내미는 명함.
[가온RNC 대표이사 조정인]
그새 명함까지 새로 팠다.
각진 턱에 2대8로 단정하게 빗은 머리. 금테 안경. 동년배인 김한철 대표보다 머리는 더 하얗게 셌지만 체격은 크고 당당하다.
전체적으로 든든함과 신뢰감이 느껴지는 모습.
하지만 그 눈에 보이는 것은 노골적인 탐욕이다.
‘얼마 전 내 눈도 저랬을까?’
돈귀신에 씌였던 시기.
그랬다면 권영섭 사장에게 혼날만 했다.
“자네에 대해선 조 상무에게 들었어. 아, 나랑 조상무는 이종형제 간이지.”
이종형제면 부계 쪽의 먼 촌수를 말한 게 아니라 모계 쪽 6촌 형제를 칭하는 것이다. 그만큼 가깝다는 걸 내세우는 것.
‘근데 언제 봤다고 자꾸 반말이야?’
연배고 뭐고 싫은 사람한테 반말을 들으니 괜히 언짢다.
“조 상무에게 많이 들어서 그런가? 처음 보는 데도 하 과장이랑은 왠지 오래 알고 지낸 것 같은 느낌이야. 허허허허.”
가식적인 말, 가식적인 웃음.
이 인간이 대체 나한테 뭘 원하는 건지 더 궁금해졌다.
“근데 저는 왜 보자고 하신 겁니까?”
“그게 말이지. 나도 둘러 말하는 스타일은 아니라서, 내 단도직업적으로 말함세. 자네가 가지고 있는 KMT 지분, 나한테 넘겨주게. 내가 값은 후하게 쳐줌세.”
“······.”
‘결국 이거였나?’
아예 짐작을 못하고 있었던 건 아니다.
내게서 뭔가를 원한다면 KMT의 지분밖에 없으니까.
‘조상무의 지시가 있었던 건가?’
아니, 저 노골적인 탐욕은 결코 하수인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무리수다.
“대표님이 KMT의 지분을 사는 건 명백한 내부자거래입니다.”
우회 상장까지 갈 것도 없이, KMT의 자회사가 된 상황에 2천억대 장비 수주를 따온 장본인이 그 호재를 앞두고 모회사의 지분을 산다는 건 그냥 백주대낮에 얼굴 까고 도둑질을 하는 거랑 다름없다.
‘미친 건가?’
“물론 내 이름으로 사겠다는 건 아니네. 다 방법이 있지. 아무렴 내가 아무 대책도 없이 자네를 찾아왔겠나?”
물론 그런 거야 조성환 상무의 전문분야이니 옆에서 배운 게 없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세상이 어디 마음처럼 다 된다던가?
게다가 내가 보기에 조정인 부사장은 조성환 상무에 비하면 수가 한참 아래다. 애초에 이렇게 날 찾아와서 지분을 팔라는 것 자체가 급이 너무 떨어진다.
제정신이 아니다.
왜 갑자기?
김한철 대표와 이수현 전 부사장에게 들어간 180억 때문에?
단지 배가 아픈 정도로 끝난 게 아니라, 정말 눈이라도 돌아버린 것일까?
아니, 가온RNC를 팔아넘기려 한 것부터가 이미 돈에 눈이 돌아간 상태.
거기에 자신의 동업자들이 생각지도 않게 거액을 챙기는 걸 보자 그 질투심이, 그 조급함이, 그 상실감이 더 큰 욕망으로 바뀌어 이젠 아예 이성의 끈마저 놓아버린 것일까?
그랬다.
돈귀신에 완전히 집어삼켜졌다.
돈에 제대로 미치면 이렇게까지 멍청해질 수도 있다.
만일 조 상무를 만나 정신을 차리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나도 저렇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언젠간 쇠고랑을 차게 되었겠지.’
아무리 봐도 저건 쇠고랑 차기 일보 직전의 상태다.
저게 내 미래의 모습일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등 허리에서 식은땀이 다 난다.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렇게 같이 마주 앉아 있는 것조차 무섭다.
“하 과장······?”
“이런 일이라면 다시는 저한테 연락하지 마십시오. 다시 한번 저한테 연락하시면 그땐 저도 조성환 상무님한테 말씀드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카페를 나왔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내가 만든 120억이라는 불씨.
조정인 부사장을 만나고 보니, 어쩌면 엄청난 화마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 들었다.
난 지금껏 계속 고민만 하고 있던 KMT의 지분을 그 길로 모두 팔아버렸다.
비상장 주식을 거래하는 앱을 이용했다.
KMT 지분을 매입할 때만 해도 아예 앱으로는 거래되는 물건 자체가 없었는데, 지금은 분위기를 감지한 사람들이 소량이라도 올라오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그렇게 상승한 가격이 매입 가격의 네 배 이상.
소분해서 내놓자 10%에 달하는 지분이 순식간에 다 팔려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빠르잖아? 무슨 상장 주식도 아니고······.’
어쨌든 덕분에 내 수중에 들어온 돈은 190억.
40억에 산 지분이 다섯 배에 가까운 돈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물론 기우일 수도 있다.
이대로 별 탈 없이 우회 상장까지 이루어진다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럼에도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미련이 아니었다.
무거운 짐 하나를 털어낸 듯한 시원함과 홀가분함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정해진 날짜에 가온RNC의 2천억 장비 수주 공시가 떴다.
[가온RNC, 2천억 규모 2차 전지 전극 공정 장비 수주]
난 그 즉시 상계 지점으로 달려가 KMT의 대출 서류를 확인했다.
아무것도 안 뜰 거라 생각했다.
우회 상장 회사가 어딘지 궁금해서 달려오긴 했지만, 자회사의 수주 공시로 이미 최고 등급 A가 된 만큼 아무리 큰 호재라도 등급 자체는 그대로일 테니까.
그런데,
타닥 타닥
변동정보가 떴다.
그러나 그건 우회 상장에 대한 정보가 아니었다.
타닥 타닥 타닥 타닥······.
[판정보류]
[등급하락요건 발생]
[등급하락요건: 내부자거래. 회계 부정]
[기업신용평가등급 A→C 확정날짜: 202X년 6월 26일]
< 쇠고랑 차기 일보 직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