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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37화 (37/50)

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37

조성환 상무가 점심 식사를 위해 날 부른 곳은 고급 중식당이었다.

황당한 건 룸 앞에 도착하자 조성환 상무의 비서쯤으로 보이는 사람이 내 휴대폰을 압수해 갔다는 것이다.

‘녹음이라도 할까 봐 그러는 건가?’

듣던대로 매사에 철저하다.

어이없긴 하지만, 그건 곧 오늘 조성환 상무로부터 상당히 은밀한 얘기까지 들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기에 긴장이 되면서도 무슨 말이 나올지 은근 기대가 되기도 한다.

난 룸 앞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그런 내 눈에 15인용은 될 거 같은 커다란 회전 테이블과 홀로 덩그러니 앉아있는 조성환 상무가 보였다.

넙죽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상무님!”

“어. 어서 와. 거기 앉지.”

조 상무가 자신의 맞은편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내가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종업원들이 테이블 회전판 위로 음식들을 채워가기 시작한다.

이윽고, 그 큰 테이블이 빈 곳 하나 없이 가득 채워졌다.

그때까지도 아무 말 없이 기다리고 있던 조성환 상무가 깐풍새우를 하나 집어 우걱우걱 씹어 삼킨 후 말했다.

“난 이래서 중식당이 좋아. 깔짝깔짝, 그런 거 내 취향 아니거든. 다 먹을 수 있든 없든 이렇게 한 상 가득 차려놓고 배가 부르도록 먹어야 직성이 풀린단 말이지.”

KG브레이크 건도 그렇고, 이번 건도 그렇고, 일을 추진하는 스타일이 그대로 식사 스타일에도 드러난다.

“하 과장 자네는 어떤가?”

“전······ 어느 쪽도 다 좋은 것 같습니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느긋이 즐기는 코스요리도 좋고, 이렇게 한상 가득도 좋고.”

“그렇군. 나와는 다르군.”

묘하게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다르다’라는 말.

“하지만 의외로 하 과장과 내가 닮은 점이 있더구만.”

“······?”

“KMT말이야.”

드디어 나올 것이 나왔다.

“놀랐어. 자네가 그런 대단한 자산가라니······ 그만한 지분을 가지고 있을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네. 처음에는 동명이인인 줄 알았다니까.”

“······.”

“알아보니 그 많은 지분을 다 최근에 매입한 거던데, 어떻게 안 건가?”

어떻게 안 건가라는 게 어디까지를 말하는 건지 애매하다.

가온RNC의 지분 인수인지, 그 뒤의 2천억 대 장비 수주 호재인지, 아니면 그보다 더 뒤의 우회 상장인지.

난 되물었다.

“제가 KMT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세상 모든 회사의 지분을 다 살피고 있지는 않으실 텐데’라는 뒷말은 생략했다.

“나도 거기 투자를 좀 하고 있거든.”

투자······ 하지만 주주명부에 조 상무의 이름은 없었다.

주주명부에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의 소액 투자는 당연히 아닐 것이다.

차명일 수도 있고, 아니면 유상증자를 위해 들어간 90억 중 일부일 수도 있다. 물론 그마저도 자신의 이름으로 넣진 않았을 것이다.

한 차장 때처럼 언제든 잘라낼 꼬리 정도는 준비해뒀거나 자신에게 위해가 될 요소는 철저히 배제하고 움직이는 스타일이니까.

“그래서, 어떻게 알았나?”

같은 질문.

알고서 하는 질문이 아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내가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는지 떠보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어디까지 아는 지는 내가 정하면 된다.

“전 상무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발뺌했다.

“제가 KMT에 투자를 한 건 미래 가치를 보고 투자처로서 나쁘지 않다고 판단한 것뿐입니다. 근데 상무님 말씀을 들어보니 뭔가가 더 있나 보네요?”

내 그 천연덕스러운 말에 조 상무가 어이없어한다.

“미래 가치만 보고 수십억을 태웠다고? 그것도 KMT에?”

“그럼 상무님은 KMT에 투자한 게 다른 이유라도 있어서입니까?”

계속된 뻔한 능청에 슬슬 짜증이 날 법도 하건만, 그 순간 조 상무의 반응은 ‘큭’이다.

곽다문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오는 탁한 웃음 소리.

“이 보라니까. 자네 나를 닮았다 했잖아.”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하 과장에 대해서 좀 상세히 알아봤는데 말이야. 그래서 좀 오해를 했어. 난 자네가 은행원 주제에 어줍잖게 낭만파인 줄 알았거든. 그런데······ 내 과더군.”

“······.”

뭔가 모를 불쾌함.

“자네······ 가온RNC의 수주 계약 건, 알고 있지?”

드디어 치고 들어온다.

휴대폰까지 회수했던 이유.

“KMT가 가온RNC를 인수하려는 것도 알고 있을 테고.”

“······.”

“가온RNC를 다녀온 후 KMT 지분부터 산 자네야. 두 기업간 인수 계획을 알고 있지 않다면 설명이 안 되는 일이지. 그럼 거기 부사장이 수주 계약을 숨긴 채 뒤로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 테고.”

그런 와중에도 자신의 이름은 쏙 뺀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의 계획도 철저히 숨긴다.

가온 RNC의 인수까지는 나한테 말해줘도 된다 판단을 내린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자네는 그 부사장의 수작을 거기 대표한테 알리지 않았어. 오히려 아주 공격적으로 KMT의 지분을 매입했지.”

“그건······.”

“아니 아니. 탓하려는 게 아냐. 아주 마음에 들어. 그 강단, 그 포부, 거기다 돈 되는 곳을 감지하는 센스와 집중력까지.”

아주 마음에 든다면서도 그 눈빛은 차갑다.

먹이를 노리는 뱀의 눈.

“우리 종종 이렇게 만나서 밥이나 한 끼씩 하지. 아님 술도 좋고. 마음이 통하고 말이 통하다보면 같이 큰 일도 해볼 수 있을 테고 말이야.”

불러서 지분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이라도 하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나오면 어떻게 대처해야하나 고민도 했었다.

그런데 내 지분에 대한 욕심을 드러내긴커녕 마음이 맞는다느니 말이 통한다느니, 심지어 같이 큰일을 해보잔다.

순간 스치는 생각.

‘날 제2의 한 차장으로 만들 생각인가?’

그렇다고 저 말이 가식처럼 들리지도 않는다.

이 인간 정말 날 마음에 들어하고 있다.

지금 난 좀 충격이었다.

이 인간이 날 마음에 들어하는 이유가 같은 쓰레기를 만난 동질감이었기 때문이다.

조 상무의 눈에 내가 자신과 같은 부류로 보였다는 것도 그렇지만, 내가 그걸 부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충격이다.

조상무의 말대로 나는 부사장의 배신을 김한철 대표에게 알리는 대신 KMT의 지분을 매입했다.

우회 상장이 가온RNC에도 나쁠 것이 없다는 핑계로.

그들에겐 그들만의 사정이 있을 것이니 내가 끼어들 일이 아니라는 변명으로.

하지만 돌이켜보면 다 구차한 자기 정당화일 뿐이었다.

우회 상장에 대해 알게 되자 그 순간 돈 욕심에 눈이 돌아간 것이다.

‘아니, 시작은 훨씬 전인가?’

영화 대박으로 인해 엄청난 투자 수익을 보게 된 후, 그 짜릿함에 완전히 매몰되어 그때부터 내 관심사는 그 60억을 어떻게 굴려야 할지, 어디에 투자를 해야 얼마의 수익을 얻을 수 있을지 온통 그 생각 뿐이었다.

제대로 돈귀신이 씌여 수백억 수천억 자산가를 꿈꾸며 안달을 내고 있었다.

그런 차에 가온RNC의 인수 정보에 돈냄새를 맡았다.

마치 목마른 자에게 한 방울의 빛방울처럼, 그 순간 내 모든 오감이 그 하나로 모여졌다.

그래. 그때부터였다.

그때부터 이미 난 눈이 돌아간 상태였었다.

※※※

식사를 어떻게 마쳤는지도 모르겠다.

조 상무에게 어떻게 인사하고 어떻게 보냈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거의 얼이 빠져서는 중식당을 나오는 길.

걸을 기운도 나지 않아 잠시 멈췄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무심코 올려다보는 하늘.

우중충하다.

지난번에 보았던 맑은 하늘과 대조 되며, 마치 권영섭 사장이 화라도 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

-내가 이러라고 자네한테 능력을 준 게 아닌 데 말이야. 허참. 돈귀신이라니······ 실망이야 하 과장.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잘못했다니까요!”

그래도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든다.

‘이제 뭘 어떻게 한다?’

돈독이 올라 외면했던 것.

김한철 대표의 경영자로서의 무능을 구실로, 어차피 경영보다는 연구가 더 좋은 사람이니 차라리 잘 된 일이라는 자기기만으로 그렇게 모른 척 외면해버렸던 가온RNC의 경영권. 우선 거기서부터 시작해봐야겠다.

난 폰을 꺼냈다.

그리고 가온RNC 재무회계 부장 김성주에게 전화를 걸았다.

“김 부장님. 저 한성 하성운 과장입니다. 혹시 대표님좀 뵐 수 있을까요? 제가 꼭 좀 뵙고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만나서 반갑네. 대출 받는데 도움을 많이 받았다더군.”

“아닙니다. 제 일인데요 뭐.

마른 체형에 반백의 머리, 공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청자켓을 입은 김한철 대표는 그럼에도 학자 같은 느낌의 인상이었다.

“나한테 꼭 할 말이 있다고?”

김한철 대표의 말에 옆에 앉은 김성주 부장도 의아히 나를 본다.

“다짜고짜 이렇게 찾아뵈어서 죄송합니다. 바쁘신 분인데 급한 마음에 너무 실례를 범한 거나 아닌지······”

“아니네. 괜찮아. 그런데 급한 마음이라니?”

“사실 이걸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배신이란 누구에게나 아프기 마련이다.

하물며 수십년을 동거동락하며 기업을 같이 키워온 평생의 동반자라면 말해 무엇할까.

하지만 그럼에도 알아야 할 일이다.

“대출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아닙니다. 그건 아니고······ 심사 업무상 가온RNC에 대한 정보들을 확인하다 알게 된 사실입니다만, 혹시 최근 지분 인수를 문의하는 곳이 없었습니까?

내 말에 김한철 대표와 김성주 부장이 동시에 흠칫한다.

“그걸 하 과장님이 어떻게······?”

“있습니까?”

“예. 부사장님께서 출장을 다녀오시며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 지분을 인수하고 싶어 하는 회사가 있다고. 회사 자금 사정을 생각해서 부사장님이랑 대표님 지분 각 15%씩 양도하는 게 어떻겠냐고 말씀도 하셨구요.”

“두 분은 그 지분 인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장 회사 사정이 너무 안 좋아서 저야 그렇게라도 해서 숨통을 좀 트고 싶은데, 대표님은 영 내켜 하지 않으시죠.”

김성주 부장이 슬쩍 김한철 대표를 보며 쓴 웃음을 짓는다.

아마도 부사장의 수작에 넘어간 김성주가 합심해서 부친을 설득하는 게 아닐까 싶다.

결국 거기에 넘어가 헐값에 경영권을 뺏기게 되는 것일 테고.

“근데 무슨 문제라도······?”

“단순한 투자 개념이 아닙니다. 지분을 인수하려는 회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경영권입니다.”

“예? 그게 무슨······ 에이, 말도 안 돼요. 고작 25%로 무슨······ 게다가 부사장님이 어련히 잘 알아보시고······,”

“경영권 인수를 부사장님이 주도하고 있는 일이라면요?”

“······?”

“아마 25%가 다가 아닐 겁니다. 부사장이 가진 지분만 해도 25%니까요. 거기에 대표님이 가지신 지분 중 15%를 더하면 총 40%. 아마 거래신고만 안했다 뿐, 모자란 10%의 지분도 이미 확보했을 가능성이 크겠죠.”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지금까지 듣고만 있던 김한철 대표가 살짝 짜증을 드러낸다.

“그럼 하성운 과장 말은, 부사장이 우리 회사를 다른 회사에 팔아넘기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예. 그것도 아주 헐값에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부사장님이 말씀하신 지분 인수가격도 적절한 수준이었구요. 하 과장님이 잘못 알고 계시는 게······.”

“지금 회사의 가치라면 적절하다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두 달만 지나도 지금 가격은 헐값이 될 겁니다. 두 달 후면 2천억 대 대형 수주 계약을 맺게 될 테니까요.”

“······?”

내 말에 두사람 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다.

“부사장이 현재 2천억 대 수주 계약을 진행중입니다. 그걸 두분한테 숨기고 있는 거구요. 물론 이유는 가온RNC를 헐값에 인수 회사에 떠넘기기 위함입니다.”

두 사람에게서 충격과 불신이 교차한다.

아니, 불신 쪽이 훨씬 크다.

“터무니없는 소리! 대체 어디서 무슨 말을 듣고 와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부사장은 이 회사를 여기까지 키워온 장본인이야. 우리 셋이 청춘을 바친 회사라고. 그런 회사를 부사장이 뭐하러 다른 데다 헐값에 넘겨?”

“돈이죠. 아주 큰 돈. 사람이 돈에 한 번 눈이 돌아가면 아무것도 안 보이기도 하니까요.”

자기 반성.

돈에 미치니까 주변이고 사람이고 아무것도 안 보였다.

그렇게 돈에 미쳐서 장서연과 데이트도 제대로 못한 게 새삼 후회가 된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아직도 불신을 붙들고 있는 김한철 대표의 얼굴이 너무 안쓰럽다.

아마 어제 내가 저 얼굴을 보았다면 그 안쓰러움조차 눈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배신을 확인한 후에 무너질 김한철 대표의 참담한 모습을 상상하며 이렇게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래. 그렇게 외면했었다.

생판 남이라는 핑계로.

당연히 마주해야 할 것들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다.

부사장을 잡아다 놓고 추궁을 하든 드잡이질을 하든 이젠 정말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대로 KMT의 인수가 틀어져 자회사가 되지 못한다면 처음으로 변동정보가 틀리게 된다.

내 결정에 따라 변동정보와는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건 꽤 설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내 개입에도 불구하고 변동정보는 틀리지 않았다.

< 그 안쓰러움조차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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