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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35화 (35/50)

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35

보다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려면 KMT의 대출 서류가 필요하다.

‘문제는 KMT가 한성과 거래를 하고 있냐는 건데······.’

만일 한성과의 대출 거래가 없다면 나로서는 방법이 없다.

그렇게 변동정보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문득 이강수 과장의 시선을 느끼고는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단지 이강수 과장의 시선에 내용물을 확인하는 척 시늉만 하는 건 아니었다.

그 내용물에서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법인 주주명부.

주주명부를 확인하니 크게 세 명의 대주주가 눈에 들어왔다.

대표인 김한철과 조정인, 그리고 이수현이라는 사람이었다.

“여기 이 두 분에 대해 아십니까?”

“김한철 대표님과 함께 가온RNC를 창립한 창립 멤버들입니다. 조정인 부사장님은 아직 현역에 계시고, 이수현 전 부사장님은 작년에 은퇴하셨죠.”

내가 이들 세 명을 주목한 것은 가온RNC의 지분을 매입하게 된다면 회사의 규모와 내 자금의 규모를 생각할 때 결국 이들 세 명으로부터 매입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주명부 확인을 마친 나는 이강수에게 물었다.

“지금 가온RNC에 한 번 가봤으면 하는데, 안내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예. 물론이죠.”

※※※

나는 이강수 과장의 안내를 받아 가온RNC로 향했다.

회사 건물은 꽤 컸다.

검은 유리와 대리석이 적절히 섞인 외벽의 3층 본관 건물과 그 뒤로 공장이 보였다. 그때,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30대 중반의 사내가 본관 건물에서 걸어 나와 우리를 맞았다.

“이 과장님. 어떻게 된 겁니까? 승인이 났다면서 왜 아직 입금이 안 돼요?”

따지는 것은 아니었다.

말투며 표정이며 거의 하소연이다.

“그것 때문에 이렇게 서울 본점에서도 내려오신 거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여긴 김성주 재무회계 부장님, 그리고 여긴 본점 여신심사부에서 내려오신 하성운 과장님.”

이강수 과장이 그렇게 소개하며 슬쩍 내 귀에다 대고 속삭인다.

“김한철 대표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특별할 것은 없는 일이다.

이런 작은 회사에 족벌이 끼지 않을 리도 없거니와 돈 관리를 맡기기에 혈육만큼 믿을 수 있는 존재도 없으니까.

“한성은행 여신심사부 하성운입니다.”

“여기 재무회계를 맡고 있는 김성줍니다. 그렇잖아도 답답했는데 본점에서 나오셨다니 하나 물어봅시다. 본점에서 대출금 결재가 이렇게 늦어지는 이유가 뭡니까? 운영자금이 거의 바닥나서 저희 정말 급하단 말입니다. 하루하루가 아주 피가 말라요.”

말투는 다소 거칠었지만 이번에도 하소연에 가깝다.

“제가 올라가는 대로 최대한 빠르게 처리될 수 있도록 본부장님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마 특별한 문제만 없다면 2, 3일 내로는 지급이 될 겁니다.”

“정말입니까?”

김성주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진다.

“예. 근데 자금 사정이 그렇게 안 좋습니까? 살펴보니 연구개발비만 좀 줄여도 사정이 많이 나아질 것 같던데······.”

“어휴! 말도 마십시오. 우리 대표님 고집을 누가 꺾으려고요. 그래도 그런 고집 덕분에 기술력 하나만큼은 자부하니까요. 슬슬 우리 장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곳들도 늘어나고 있고.”

“대표님을 한번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아니면 부사장님이라도······.”

“부사장님은 해외 출장 중이시고 대표님은 좀 알아볼 게 있다고 카이스트에 가셨습니다. 연구하다 막히는 게 생기면 카이스트부터 찾으시는 분이라. 이럴 거면 그냥 연구원이나 계속 하실 것이지 회사는 왜 차린 건지······ 덕분에 나만 애가 타지 아주.”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며 늘어놓는 푸념.

회사 경영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아버지 밑에서 회사 돈 관리하느라 힘들긴 한 모양이다.

그나저나 나중을 위해 두 명의 주주들과 안면이라도 터놓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다.

굳이 회사까지 찾아온 것도 그 두 사람을 만나보려는 의도였었다.

“일단 공장부터 한 번 둘러보시겠습니까?”

“예. 그러죠.”

아쉽긴 하지만 나중에 지분을 매입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현장답사를 해둬서 나쁠 거야 없다.

“2차 전지라는 게 쉽게 말해 충전해서 쓸 수 있는 전지죠. 크게 양극, 음극, 분리막, 전해질 4가지의 핵심 소재로 이루어지는데 우리 회사가 주력으로 만들고 있는 게 바로 이 음극활물질이랑 분리막 물질에 필요한 장비거든요. 특히 음극활물질은 국산화율이 거의 제로 수준이라······.”

김성주가 공장을 안내하며 열심히 설명을 한다.

돌아가는 분위기상 20억 대출이 내 손에 달렸다 판단했는지 아주 열정을 다한다.

그렇게 현장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문득 궁금해져서 이강수 과장에게 물었다.

“회사 내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장인정신이든 뭐든 김한철 대표의 고집에 자금 사정이 그렇게까지 어려워질 정도면 불만들이 없을 것 같진 않은데?”

“말도 마십시오. 조정인 부사장이랑 늘 싸웁니다. 이수현 전 부사장님이 계실 때는 그래도 중간에서 중재가 되었었는데, 그분이 은퇴한 후로는 뭐······ 일전에 저도 본 적이 있는데 아주 원수가 따로 없더라구요. 애초에 성향 자체가 정반대인 분들이기도 하고.”

“흠······.”

김한철 대표를 직접 보진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이미지로는 돈 때문에 지분 인수에 찬성할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그런 그를 누군가 설득할 거라는 뜻이고, 그럴 만한 사람으로는 현재 조정인 부사장 정도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조정인 부사장은 어떤 사람입니까?”

“야망이 크신 분이죠. 실력도 있으신 분이고. 회사에서는 영업 쪽을 담당하고 계신데, 사실상 회사 경영은 그분이 다 하신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죠.”

그 정도 영향력이라면 확실히 지분 인수는 조정인 부사장이 진행하는 거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새삼 그를 보지 못한 게 아쉽다.

나는 그렇게 구미에서의 일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다음날, 여신심사부에 들러 차 본부장을 만났다.

“어땠어?”

“대표를 직접 보진 못했지만, 그 아들인 재무회계부장도 만나보고 공장도 둘러봤는데 별문제 없더라구요. 미래 전망도 상당히 좋고. 바로 대출금 지급 결재 들어가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 아, 그리고 어제 조성환 상무님이 물으시길래 하 과장이 마지막으로 확인하러 내려갔다고 말씀드렸어.”

난 흠칫했다.

“반응이······ 어땠습니까?”

내 짐작이 맞는다면 가온RNC와 KMT간 지분 인수를 주도하는 사람이다.

은행과는 무관하게 진행하는 일인 만큼 그렇게 떳떳하진 못할 테고, 여러 부실 대출들을 밝혀낼 정도의 내 능력도 알고 있는 만큼 경계심을 드러내진 않았을지 궁금했다.

“별다른 반응은 없었는데? 뭐, 워낙에 속을 알기 어려운 분이기도 하고.”

하긴, 그렇게 간단히 속을 드러낼 사람일 리가 없지.

그러니 더 궁금해진다.

KMT라는 작은 신생 회사로 가온RNC를 삼키려는 이유.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이 비정상적인 지분 인수가 어떻게 가능해지는지도.

본부장실을 나온 나는 여신심사부의 곽한기 대리를 통해 KMT가 한성과 거래 중인지를 확인했다.

“소액이긴 하지만, 후순위 대출 하나가 잡히긴 하네요.”

“어딘데?”

“상계 지점이네요.”

다행히 서울이다.

난 바로 상계 지점으로 달려갔다.

특별 심사역이라는 게 내 개고생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다 안 좋은 데 딱 하나 좋은 게 있다.

마치 마패처럼, 어느 지점의 보관실도 무사통과라는 것.

그렇게 난 KMT의 대출 서류를 손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타닥 타닥

그리고 뜨는 변동정보.

타닥 타닥 타닥 타닥······

[판정보류]

[등급상승요건 발생]

[등급상승요건: 자회사의 2천억 규모 장비 수주]

[기업신용평가등급 B→A 확정날짜: 202X년 5월 20일]

자회사의 2천억 규모 장비 수주.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가온RNC다.

‘가온RNC가 2천억 규모의 장비 공급 계약을 맺는다고?’

아니, 그전에 자회사라니?

지분 인수라는 게 그럼 경영권까지 넘겨받을 정도의 규모라는 거야?

50% 이상의 지분.

가온RNC의 규모를 생각하면 최소로 잡아도 120억 이상이 필요하다.

당연히 KMT는 그만한 자본력이 없다.

‘이건······ 조성환 상무 뒤에 따로 돈줄이 있다는 건데?’

예상보다 규모가 더 크다.

조성환 상무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그 배후에 분명 누군가가 있다.

그 배후가 누군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한국엔 돈이 남아도는 부자들이야 널리고 널렸으니까.

단지 시기가 걸린다.

지분 인수는 3월이고 장비 수주는 5월이다.

너무 공교롭다.

설마, 2천억 장비 수주를 따낼 걸 미리 알고 지분 인수에 나선 건가?

지금 상황은 그렇게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

하지만 나처럼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대체 어떻게?

'내부자······.'

그것 말고는 달리 생각할 수 있는 게 없다.

게다가 50%의 지분이라면 김한철 대표의 용인 없이는 확보가 어려운 지분이다.

김한철 대표로부터 지분 양도를 설득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본인의 지분까지 내어 놓아야 50%를 채울 수 있는 가온RNC의 또 한 명의 대주주.

당장 떠오르는 건 한 사람뿐이다.

앞서도 생각했던 인물.

조정인 부사장.

그렇다면 2천억 수주 계약은 조정인 부사장의 주도 하에 이미 진행 중인 상황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KMT의, 아니, 그 배후의 돈줄에게 경영권을 넘기기 위해 김한철 대표에게 계약 진행을 숨기고 있다. 어쩌면 타이밍을 재면서 계약 자체를 미루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체 왜?’

혹시 경영권이라도 약속 받았나?

하지만 이강수 과장의 말대로라면 이미 가온RNC를 실질적으로 경영하고 있다고 했다.

경영권 정도로는 굳이 이런 무리수를 둘 이유가 되지 않는다.

‘결국 돈이로군.’

하긴, 그것 말고 또 뭐가 있을까?

그렇다면 또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2천억 장비 수주다.

그 정도면 가온RNC는 당장의 재정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물론이고 더 큰 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당연히 조정인 부사장도 상당한 배당금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판에 뛰어들었다는 건 배후로부터 그보다 훨씬 더 큰돈을 약속받았다는 뜻이다.

힘들게 키워온 기업을 기꺼이 가져다 바칠 만큼의 엄청난 거액을.

‘하지만 어떻게?’

KMT가 가온RNC를 자회사로 만든다고 해서 당장 그런 큰 돈이 생기지는 않는다.

오히려 가온RNC를 독자적으로 키우는 게 더 이득일 수도 있다.

뭔가 더 있다.

가온RNC를 KMT의 자회사로 만든 다음, 2천억 대 장비 공급 계약이라는 호재를 수익으로 전환해 엄청난 부를 챙길 수 있는 방법.

순간 뇌리를 스쳐 가는 소름 돋는 생각.

KMT의 상장.

조정인 부사장이 상장 주식을 양도 받기로 한 것이라면 그 배신도 충분히 납득이 된다. 먹을 수 있는 돈의 단위 자체가 달라질 테니까.

당연히 정상적인 루트는 아니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KMT 자체가 너무 신생이라 상장 요건에도 맞지 않다.

그래. 방법은 하나 뿐이다.

‘우회 상장!’

< 결국 돈이로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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