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34
“하 과장!”
차규완 본부장이 반갑게 나를 부른다.
오늘도 어김없이 여신심사부 사무실 앞에까지 나와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또 무슨 일인데요?”
내 반응은 퉁명스럽다.
감히 본부장 앞에서 보일 태도는 아니었지만, 그동안 워낙에 뻔질나게 불러대는 데다, 내 능력에 대한 신뢰도 커졌고, 또 차 본부장의 성격 자체가 그렇게 격식을 따지는 편은 아니라 내 그런 반응 정도는 어리광으로 받아넘긴다.
그간 차 본부장의 호출에 고생한 일들을 생각하면 사실 이 정도 어리광은 부려도 된다.
“가온RNC라는 회사 일인데······.”
사무실 문을 열며 흘려내는 말.
차 본부장을 따라 여신심사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선 나는 이젠 익숙해진 얼굴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수고하십니다.”
“하 과장님. 안녕하세요.”
“또 오셨네요.”
“이쯤 되면 그냥 심사역으로 오시는 게 덜 번거롭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반갑게 건네오는 인사들.
어찌 보면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불청객일 수도 있는데, 다들 스스럼없이 받아들인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 건 아니었다.
몇몇은 불쾌함까지는 아니더라도 불편한 내색을 숨기지 않았고, 은근한 경계로 나를 대하기도 했었다.
이런 분위기를 만들 수 있었던 것 또한 그간의 내 개고생이 한몫을 한 것이었다.
“곽 대리. 가온RNC 자료 좀 띄워봐.”
곽한기 대리의 모니터 화면에 가온RNC에 대한 정보가 떴다.
“이게 2차 전지 관련 장비를 만드는 회산데 말이야. 독자적인 기술을 보유하고 있긴 한데, 연구비에 돈을 너무 들이부어서 자금 사정이 안 좋아. 그래서 이번에 우리 쪽으로 후순위 대출로 20억을 신청해 왔거든.”
난 모니터에 뜬 자료들을 차분히 확인해 보았다.
“확실히 자금 사정이 안 좋아 보이긴 하네요. 그래도 기술 평가는 상당히 높군요. 2차 전지면 요즘 주목 받고 있는 신성장 사업이기도 하고······ 대출 진행에는 별로 무리가 없어 보이는데요? 게다가 이미 그쪽 지점장 전결로 대출 결정이 난 건인데 왜······.”
그래서 의아했다.
왜 본부장까지 나서서 이렇게 신경을 쓰는 것일까?
게다가 나까지 불렀다.
“그게······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지.”
아무래도 직원들 앞에서 하긴 곤란한 말인 듯 본부장이 나를 데리고 본부장실로 들어갔다.
“하 과장의 말대로 이게 굳이 하 과장까지 부를 일이 아니긴 한데, 위에서 따로 지시가 내려온 건이라서 말이야.”
순간 난 눈살을 찌푸렸다.
“대출을 막으라는 압력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경쟁사의 윗선을 통한 청탁, 그렇게 내려오는 직급을 이용한 압력.
예전엔 드러내 놓고 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드물지 않게 종종 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유종원 행장이 취임한 이후, 완전히 뿌리 뽑힌 관행이다.
“압력일 리가 없잖아. 지금이 어떤 시댄데. 그저 대출금 지급 전에 한 번 더 꼼꼼하게 살펴보라는 지시였어. 무슨 걸리는 게 있으셨는지······ 그래서 하 과장을 부른 거고.”
“지시를 한 게 누군데요?”
“조성환 상무.”
“······.”
조성환 상무라는 말에 눈살부터 찌푸리게 된다.
조금 전 로비에서 만났던 그 사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거의 반사적으로 일진기업의 일이 떠오른다.
일진기업을 죽여 KG브레이크를 상장시키려고 했던 일, 그 과정에서 발생한 한 차장의 셀프대출까지.
‘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가?’
의심부터 들지만 역시 엮이고 싶지 않은 마음.
그러나 어차피 내겐 선택권이 없다.
“방금 보았던 자료들이 우리 심사부에서 조사한 것들이긴 한데, 상무님 지시도 있는 건이라 그냥 이대로 넘기기에는 영 찝찝해서 말이야. 하 과장이 한 번 더 검토해줘.”
말투는 어디까지나 부탁이다.
하지만 무려 본부장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부탁이 아니라 연인 간에나 오갈 법한 달콤한 밀어라고 해도 본부장의 입에서 나온 이상 불복종이 불가능한 명령이다.
“이번엔 어느 영업점인데요?”
“또 영업점까지 가야 하는 거야? 대체 매번 영업점까지 가서 대출 서류를 확인하는 이유가 뭐야?”
“저만의 영업비밀입니다.”
“그것 참······.”
심히 곤란하다는 표정.
멀다는 거다.
‘젠장! 이번엔 또 어딘 거야?’
“경북 구미야.”
“하······.”
나도 모르게 한숨도 아니고 탄식도 아닌 소리를 토했다.
역시나 멀다.
내 여신심사 알바, 그 개고생의 원천.
뻑하면 출장이다.
그래도 지난번보다는 낫다.
지난 번에는 저 멀리 통영까지 찍고 왔으니까.
“지금 내려갈 거야?”
“그래야죠! 통영도 아니고, 해남도 아니고, 고작 구미 정도면 당일치기도 가능하니까요!”
내가 원망조로 강하게 말하자 차 본부장이 미안한 표정을 하는 와중에도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럼 내가 시간 외 수당이랑 출장비는 확실히 챙겨 줄 테니까 맘 편히 다녀와.”
그런 걸로 마음이 편해질 리도 없거니와, 몸이 안 편하다고 이 양반아. 몸이.
난 그길로 구미로 내려갔다.
이렇게 몸을 혹사시켜야 하는 이유는 대출 서류를 직접 보기 위해서다.
좀 더 스마트하고 디지털 한 방법을 찾아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서류 봉투를 폰으로 촬영해 전송한다든지, 하다 못해 팩스를 사용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등급표가 매겨진 원본 그대로가 아니면 변동정보는 뜨지 않았다.
그렇다고 은행 내규를 무시하고 대출 서류를 택배나 우편으로 보내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이렇게 대출 서류를 찾아 전국 각지의 영업점을 누비고 다니며 개고생을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 애초에 처음부터 특별 심사역 따위 거절했어야 했어!”
뒤늦게 후회를 해본들 부질없는 푸념일 뿐이다.
※※※
“본점 여신심사부에서 나온 과장 하성운입니다.”
차 본부장이 파준 내 명함을 받아든 것은 송정 지점의 이강수 과장이었다.
“아, 그렇잖아도 조금 전 차규완 본부장님으로부터 연락 받았습니다.”
“가온RNC 담당이시라구요?”
“예.”
“어떤 회삽니까?”
“평가 자료에 적은 그대로입니다. 기술은 좋고 돈은 없고. 거기 대표가 워낙 고지식한 면이 있는 사람이라서 회사가 쪼들리든 말든 기술에 대한 투자에는 돈을 아끼지 않거든요. 그게 너무 도가 지나쳐서 문제구요.”
“회사 전망은요?”
“당장의 재정 위기만 넘길 수 있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회사입니다.”
심사부 자료에서 보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는 말.
“대출 서류를 좀 볼 수 있을까요?”
“그렇잖아도 본부장님께 말씀은 들었습니다만, 대출 서류는 왜 보시려는 건지?”
“그냥 좀 확인할 게 있어서요.”
“음······ 이쪽으로. 서류 보관실은 2층 창고에 있습니다.”
이강수 과장이 먼저 앞장을 서고 내가 뒤를 따랐다.
계단을 통해 오르는 길, 이강수 과장이 말을 건넨다.
“하 과장님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하 과장님께서 저희 지점을 찾아 주신다는 말에 지점 직원들 다 많이 궁금해들 했습니다. 소문의 주인공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
아닌 게 아니라, 객장에서 내 이름을 밝히자 그 순간 지점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었다.
아주 유명인 다됐다.
하지만 그런 관심과 주목이 처음은 아니었다.
기사까지 그렇게 거창하게 난 마당이라 이미 전국 각지의 지점들이 다 내 활약상을 알고 있었다.
쉽게 말해 한성은행의 아이돌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오죽했으면 유 행장이 날 모델로 세워 입간판까지 만들겠다고 했을까.
고객의 돈을 지키는 믿음과 수호의 상징이라나 뭐라나.
제발 그것만은 싫다고 질색팔색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쯤 내 억지스럽고 어색한 미소가 전국 각지에서 고객님들을 맞이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정말이지 씻지 못할 흑역사를 남길 뻔했다.
“여깁니다.”
그 사이 보관실에 도착했다.
아무리 장원 지점보다 작은 지점이라고 해도, 그래서 잠시 자리를 비운 지점장을 대신해 과장이 나를 상대하고 있다고 해도 고객의 개인정보가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진 않다.
보안키와 여덟 자리의 비밀번호, 그리고 내부의 철장문까지 열고서야 대출 서류들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겁니다.”
이강수 과장이 가온RNC의 대출 서류를 찾아 내게 건넨다.
받아들었다.
타닥 타닥
변동정보가 떴다.
애매한 건들은 상당히 높은 확률로 변동정보가 떠서 이젠 이게 안 보이면 섭섭할 지경이다.
타닥 타닥 타닥 타닥······.
[판정보류]
[등급상승요건 발생]
[등급상승요건: KMT의 지분 인수로 인한 재정 상태 개선]
[기업신용평가등급 B→A 확정날짜: 202X년 3월 15일]
‘지분 인수?’
지분 인수.
자금 사정은 안 좋고 기술력은 좋은 회사라면 아주 의외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거의 반사적으로 내 머릿속을 스치는 얼굴 하나가 그 의외의 일이 아닌 정보조차 심상치 않음을 느끼게 한다.
‘혹시 지분 인수 사실을 미리 알고 있있던 건가?’
그렇다면 차 본부장에게 꼼꼼히 살피라 명령한 것도 이해가 된다.
쉽게 확인할 수 없는 정보들을 여신심사부를 통해 확인하겠다는 뜻일 테니까.
그건 곧 이 지분 인수에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단순한 투자 참여가 아닐지도 모른다.
KG브레이크를 상장시킬 계획까지 세웠던 조성환 상무가, 그걸 위해 가차 없이 한 차장을 지옥으로 밀어 넣었던 사람이 과연 이런 작은 기업의 일에 고작 한 다리 걸치는 걸로 만족할까?
‘어쩌면 조 상무가 이 지분 인수를 주도하는 주체일지도 모르겠는데?’
그건 곧 인수하는 지분의 규모가 상당할 거라는 뜻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게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다.
은행 내규가 어떻든, 그게 설혹 문제의 소지가 있다 한들 누군가에게 해가 되는 일도 아니거니와, 일진기업의 일 때처럼 내가 발 벗고 나서야 할 만한 상황도 아니기에 감히 은행 실세가 하는 일에 딴죽을 걸 마음 전혀 없다.
지금 내 관심은 조성환 상무가 아니었다.
KMT였다.
가온RNC의 지분을 인수하는 기업.
사실 지금 난 꽤 흥분해 있는 상태였다.
지분 인수란 단어에 제대로 돈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만일 KMT가 상장사라면?
가온RNC의 지분이 황금 덩어리가 될 수도 있다.
온몸이 저릿할 정도의 떨림.
어차피 나야 양쪽 법인에 몸담고 있는 내부자도 아니고, 한성은행이야 법인 간 계약을 직접 교섭하는 투자은행도 아니다. 그러니 난 준내부자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당연히 누군가로부터 인수 정보를 전달받은 정보수령자도 아니다.
즉, 내가 가온RNC의 지분을 매입한다고 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 난 무려 60억이라는 시드머니까지 가지고 있다.
난 바로 폰을 꺼내 KMT를 검색했다.
하지만······ 상장기업이 아니었다.
심지어 규모도 크지 않고, 설립된 지도 얼마 안 된 신생 회사다.
그렇다면 가온RNC가 그 지분 양도로 인해 재정 상태가 좋아진다고 해도, 그래서 신용등급이 올라간다고 해도, 그게 수익으로 이어질지는 장담할 수 없다는 뜻이다.
‘뭐야? 맥빠지게.’
잔뜩 기대로 부풀었던 마음이 풍선 바람 빠지듯 빠져나간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재무재표를 확인하니 KMT 또한 자금 사정이 그렇게 넉넉해 보이지가 않았다.
아니, 조성환 상무가 끼어들 만큼의 큰 판을 만들만한 체격 자체가 안 된다.
‘뭐지 이거?’
뭔가 더 있는 건가?
아무래도 KMT의 변동정보도 확인해봐야 할 것 같다.
< 뭔가 더 있는 건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