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33화 (33/50)

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33

“아휴, 정말 성운 씨 앞에서 창피하게······.”

한참을 울던 김사나가 이제야 좀 진정이 되는지 손으로 퉁퉁 부은 눈을 애써 가리며 부끄러워한다.

“사나 씨. 늦었어.”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주던 관계자들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며 재촉하고, 그녀도 급히 그들을 따라 일어서며 말한다.

“저기 성운 씨. 당분간은 무대 인사를 돌아야 해서 시간을 못 내지만, 나중에 시간 되면 꼭 우리 밥 한 끼 해요. 제가 살게요.”

“예. 기대하겠습니다. 얼른 가보세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사나는 이내 동료들을 쫓아 극장을 나갔다. 그 와중에도 관객들을 향해 몇 번이고 허리를 숙여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아마 나중에도 시간을 내진 못할 거다. 지금 전국 각지로 무대 인사를 다녔던 게 한가하게 느껴질 정도로 바빠질 테니까.

‘그나저나······ 이 녀석은 어쩌지?’

무대 인사만 하고 떠날 줄 알았던 김사나가 내 옆자리에서 관람까지 할 줄은 생각 못 했던 터라, 이관우의 이 반응도 미처 대처 방법을 준비하지 못했다.

“어떻게······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우리 갤주님이 왜 너 따위랑 밥을 먹자고 하는 거냐고!”

“너 따위라는 말은 좀 너무한데?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냐? 내 덕에 시사회도 봤고, 갤주님과 인사도 나눴고. 오히려 이 정도면 형님 소리가 나와야 정상아냐?”

“그래 뭐, 그건 고맙기는 한데······ 근데 나 왜 이렇게 열 받는 거지?”

“12시 종 쳤네 이 사람아. 호박 마차는 사라졌으니까 이제 그만 현실로 돌아와. 넌 이제 스무 살 그 시절의 이관우가 아니라 호랑이 같은 마누라에 늑대 같은 쌍둥이 딸을 둔 가장이라고. 음, 그러고 보니 너네 사귈 때도 이 문제로 꽤 싸우지 않았냐? 지금은 좀 괜찮아졌나?”

“괜찮아지긴 개뿔. 작년에 우연히 발견한 우리 갤주님 사진, 줍줍 하다가 걸려서 집에서 쫓겨날 뻔했거든?”

“그럼 오늘 여기 온 것도 들키면 안 되겠네.”

“당연하지!”

“그럼 여기 와서 갤주님 보면서 눈물까지 찔끔거린 걸 알면 아주 난리겠네?”

“일단 능지처참부터 당하겠지. 어쩌면 부관참시도······.”

“무슨 역적이냐?”

“주말에 애들 내팽개치고 여기 온 것부터가 이미 역적질이나 마찬가지였어. 근데 그건 왜 자꾸 물어?”

“뭐, 그냥······.”

물론 당연히 그냥은 아니다.

나는 지금 내 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아주 흡족해하고 있었다.

아까 찍은 관우의 동영상, 아무래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뭐야 그 웃음?”

“뭐가?”

“그 의미심장하고 사악한 웃음 대체 뭐냐고? 또 무슨 꿍꿍이 속인데?”

“내가 그랬냐?”

“그동안 날 좀 호구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나 이제 그렇게 호락호락 안 당해. 한 번만 더 나한테 개수작 부리면 이 시대의 쌍둥이 아빠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주 뼈저리게 깨닫게 될 거라는 것만 명심해둬.”

마치 아직 젖도 떼지 못한 강아지의 으르렁거림 같은 귀여움, 아니, 가소로움.

휴대폰 속 동영상을 보여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지만 나중의 더 큰 재미를 위해 오늘은 참았다.

“근데 정말 어떻게 된 거야? 투자는 또 뭐고? 너 이번 영화에 투자했었냐?”

“좀 했지.”

“돈이 어딨다고? 네 사정 내가 뻔히 다 아는데······ 아, 혹시 포상금 1억 그거 여기다 투자한 거야? 아니, 그래도 꼴랑 1억으로 우리 갤주님과 그렇게 친밀해진다는 게 말이 돼?”

“꼴랑 1억이라니? 너한텐 언제부터 1억이 꼴랑이었냐? 그리고 돈이 중요한 게 아냐. 사람이 중요한 거지. 김 배우님께서 다 이 형님의 인품을 알아보시고······.”

“인품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갤주님이 너 인품 알아볼 일이 뭐가 있다고?”

“영업점에는 여러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오지. 김 배우님도 그렇게 처음 만났고.”

아무리 김사나의 사정에 빠삭하다고 해도, 그리고 같은 은행에 다닌다고 해도 승인도 되지 않은 대출 얘기를 직접 할 순 없었다. 물론 그 정도만 말해도 대강의 사정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리겠지만.

“젠장! 이번엔 진짜 내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영업점으로 옮기고 만다!”

물론 쌍둥이 아빠보단 쌍둥이 엄마가 일만 배는 더 무섭기 때문에 그 울분에 찬 야망 따위가 이루어질 일은 전혀 없었다.

※※※

[입소문 탄 ‘나는 킬러다’ 개봉 3주 만에 200만 관객 동원, 손익분기점 돌파!]

[영화 ‘나는 킬러다’ 인기 고공행진, 5주차까지 누적 관객수 700만 돌파! 천만이 보인다!]

[‘나는 킬러다’ 팬데믹 이후 최고 흥행 기록 갱신! 꺾이지 않는 신화!]

[김사나에 울고 웃는 관객들, ‘나는 킬러다’ 올해 최고의 오락영화 투표 1위]

예상했던 대로 영화는 초대박이 났다.

어머니의 부고 소식조차 기사 한 줄 할애하지 않던 언론매체들이 이젠 그녀가 편의점 가는 것조차 기사로 크게 다룰 정도로 배우 김사나를 주목했다.

그 흥행세가 어찌나 대단했던지 그 바람에 약간 곤란을 겪기도 했다.

“성운 씨. 우리 오늘은 영화 보러 가요.”

“영화요?”

“예. 요즘 그거 되게 인기던데, 나는 킬러다.”

“······ 그런 거 좋아하세요?”

“딱히 장르를 가리지는 않은 편이긴 한데, 주연 여배우 있잖아요. 김사나. 며칠 전에 그분 스토리가 담긴 다큐를 봤는데 너무 짠하기도 하고, 대단하기도 하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영화에도 관심이 가지더라고요. 평도 워낙 좋고.”

김사나의 인기가 급격히 올라간 이유도 그것이다.

단지 영화의 흥행세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흥행세를 통해 억울하게 마녀사냥을 당했던 일부터, 모든 걸 다 잃고 힘들게 살아온 과정, 그럼에도 어머니가 진 빚을 모두 짊어지고 갚아나가고 있는 상황까지 다 알려지면서 사람들의 동정 여론과 응원이 더해져 가히 그 인기가 폭발하고 있었다.

각종 광고계의 러브콜이 이어졌고 메이저 예능에서도 출연 제의가 쏟아진다고 들었다.

바야흐로 제2의 전성기인 것이다.

“혹시 보셨어요?”

이윽고 던져오는 참으로 곤란하기 그지없는 질문.

당연하게도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가 그걸 누구랑 보겠습니까? 저도 마침 보고 싶었던 참인데 잘됐네요. 하하.”

이건 선의의 거짓말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김치찌개에 밥 두 공기를 싹싹 비우고도 ‘혹시 밥 먹었어요?’라는 여자 친구의 말에는 ‘아뇨. 배고파 죽겠어요.’라고 할 줄 알아야 하는 기본적인 에티켓?

그렇게 난 ‘나는 킬러다’를 두 번 보았다.

그것도 같은 상영관에서.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다정히 영화를 즐기는 그 순간의 분위기도, 그리고 두 번 봐도 여전히 재밌는 영화도.

그로부터 며칠 후, 영화는 드디어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나는 킬러다’ 최종 관객 수 1237만 기록. 팬데믹으로 침체되었던 영화계에 새바람을 몰고 오다.]

그리고······ 계약 당시 넣었던 특약에 따라 내 계좌로 가장 먼저 1차 정산 금액이 들어왔다.

[7,313,000,000원]

해외판권이나 OTT등의 2차 수익은 제외하고, 순수 영화 관객만으로 내게 배당된 수익은 투자금 15억 포함 총 73억 1천 3백만 원이었다.

※※※

73억.

주식으로 17억이 생겼을 때도 참 현실감 없다 생각했지만 73억이란 돈은 정말이지 그냥 숫자의 나열 같이만 느껴진다.

물론 머리로 느끼는 것과 몸이, 정신이 느끼는 체감은 다르다.

폰을 든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푸흐흐흐흐흐.”

마치 당나귀 같은 웃음소리가 나도 모르게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온다.

가슴에 휘몰아치는 격정을 견딜수가 없어 미친놈처럼 ‘우와아아아아!’ 소리까지 질러댔다.

그 정도의 차이였다.

17억과 73억.

무게감이 다르다.

단위는 같지만 서울에 혼자 살기 괜찮은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과 80평대 시그니엘에서 살 수 있는 돈의 차이.

아벤타도르 한 대 사고 나면 압박감이 밀려드는 금액과 그 아벤타도르를 성실한 택배기사가 실수로 긁고 지나가도 쿨하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 수 있는 돈의 차이.

아닌 게 아니라, 이참에 집이라도 한 채 사?

“푸흐흐흐흐흐흐흐.”

당나귀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있나.

※※※

난 73억 중 60억을 투자 계좌에 그대로 두고, 13억은 일반 계좌로 옮겼다.

주은이의 학자금과 아버지의 차를 사고 남은 3억을 포함해 16억.

그 정도면 혼자 살기 괜찮은 집 정도는 마련할 수 있는 돈이다.

부자된 기분.

아니, 나 이제 진짜 부자다.

물론 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내 생활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내 은행 생활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바쁘다.

아니, 요즘 들어 더 바쁘다.

“어, 하 과장. 이것 좀 와서 봐줘야겠는데?”

본점 여신심사부 차규완 본부장의 전화.

이 사람 때문이다.

-부르면 와 줄 거지? 아마 자주 부르게 될 것 같은데?

내가 그때 차 본부장의 말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정말 자주 부른다.

처음에는 그래도 아주 큰 건이거나 아주 어려운 건에만 날 불러 한번 더 확인했었는데, 부를 때마다 쏙쏙 맞혀대니 어느 순간부터는 조금만 애매해도 나한테 최종 심사를 맡기지 않으면 불안해서 안 되겠단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그때 차라리 여신심사부로 옮길 걸 그랬다.

‘그랬으면 차장도 달았을 테고.’

지금이라고 행장을 찾아가서 다시 딜을 해봐?

아서라.

바빠도 지금이 낫다.

지금이야 애매한 건만 보는 거지만 심사부에 들어가는 순간부터는 봐야 할 건수의 단위 자체가 달라질 테니까.

‘그래. 힘들어도 그냥 이대로가 낫지.’

나는 곧장 본점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막 본점 건물에 들어섰을 때였다. 사람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인다.

의아해하는 내 눈에 지금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로비를 걸어 나오고 있는 한 사내가 보였다.

키는 175 정도에 다부져 보이는 체격, 상당히 강한 인상에 나이는 대략 오십 대 초반 정도.

안다.

현 한성은행의 실세 중 하나인 조성환 상무다.

내가 한 차장의 68억 셀프대출 사건의 배후자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다.

조성환 상무를 본 나도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따닥 따닥 따닥 따닥

거침이 없고 기계처럼 일정하며 흐트러짐도 없는 발자국 소리.

그 소리만으로도 어떤 사람인지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돌연 걸음 소리가 멈췄다.

내 앞이다.

“······?”

의아해하는 그때, 조성환 상무가 내 사원증을 들어올린다.

“하성운 과장······.”

내가 조금 더 허리를 숙여 보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상무님! 장원 지점 과장 하성운입니다!”

“역시, 자네가 그 하성운 과장이로군.”

그 하성운······ 그 하성운이 어떤 하성운을 말하는지 모호하다.

한 차장의 비리를 밝혀 자신을 범죄자로 만들뻔했던 그 괘씸한 하성운인지, 신라은행으로부터 한성은행을 여러 번 살려낸 영웅 하성운인지······.

그보다 더 깊은 악연이라면 일진기업의 일에 삼원브레이크를 끌어들여 KG브레이크의 상장 계획을 망친 것이겠지만, 당연히 그것까진 알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그 목소리에서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그것만으로 안심할 만큼 순진하진 않다.

‘그 보다······ 날 어떻게 아는 거지?’

조성환 상무와는 제대로 인사를 나눈 적이 없다.

그런데도 이 잠깐의 스침으로 날 알아봤다는 것, 나에 대해 조사를 했다는 뜻이다.

생각이 거기에까지 이르자 더 긴장된다.

하지만 그런 내 긴장과는 달리, 가볍게 내 어깨를 두드리는 손에서도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요즘 하 과장의 활약상은 나도 전해 듣고 있었지. 그래서 일간 불러서 얼굴 한번 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 본점에는 어쩐 일인가?”

“여신심사부 차규완 본부장이 불러서 왔습니다.”

“아, 그렇군. 요즘 여신심사부 일을 돕고 있다는 말도 듣긴 했지. 역시 능력 있는 사람이라 쓰임이 많군. 아무튼 말이 나왔으니 말이네만, 일간 내 부를 테니 밥이나 한 끼 같이 하지.”

“예. 불러 주시면 바로 달려가겠습니다.”

그것으로 조성환 상무와의 대화는 끝이었다.

다시 한번 내 어깨를 툭툭 두들기고는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긴다.

따닥 따닥 따닥 따닥

그렇게 멀어지고 나서야 난 길게 숨을 토했다.

묵은 은원도 은원이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그저 존재감만으로 사람을 긴장하게 만든다

확실히 김강철 전무나 유종원 행장과는 결이 다른 사람이다.

‘적이 되고 싶지 않은 타입이긴 한데······.’

그렇다고 같은 편도 되고 싶지 않은 타입.

더 이상 엮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적이 되고 싶지 않은 타입이긴 한데······.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