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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32화 (32/50)

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32

“그렇게 큰돈을 투자하시고, 어떻게 촬영장엘 한 번을 안 오실 수가 있죠?”

김사나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나를 본다.

지난 번에 보았을 때와는 조금 달라진 느낌.

어딘지 홀가분해진 것 같다고나 할까?

왠지 모르게 그동안 드리워져 있던 그늘이 지워진 느낌이다.

“어떤 투자자분들은 정말 하루가 멀다 하고 촬영장으로 찾아오시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하물며 그런 거액을 투자하시고서는 촬영이 다 끝나도록 얼굴 한번 안 비추시니까 다들 신기해했어요.”

하긴, 15억이면 웬만한 영화 투자자들에게는 무심할 수가 없는 액수일 것이다.

물론 나야 영화 결과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만큼 불안해할 일이 전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변동정보에 대한 확신이다. 처음 그 변동정보로 주식투자를 했을 때만 해도 하루하루가 피가 다 마를 지경이었는데, 변동정보에 대한 검증을 끝낸 지금은 그 열 배에 가까운 돈에도 무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내 무심함이 영화 관계자들의 눈에는 15억을 푼돈 취급하는 대단한 갑부쯤으로 보였겠지만.

“촬영 들어갈 때 제작사 대표님한테서 소식도 전해 들었고 중간에 보고도 받았고, 게다가 제가 간다고 영화가 더 좋아질 것도 아니구요. 스태프들 귀찮게만 하고, 오히려 방해만 됐겠죠.”

“성운씨 같은 투자자만 있으면 배우고 스태프고 촬영에만 더 집중할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김사나가 싱긋 웃는다.

그늘이 지워져서 그런지 그 웃음마저 전보다 화사해 보인다.

“혹시 그간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왜요?”

“아니, 전에 뵀을 때보다 많이 밝아지신 것 같아서······.”

“그런가요?”

돌연 그 화사한 웃음이 씁쓸함으로 변했다.

“그렇군요. 제가 밝아진 거군요······.”

“······.”

“두 달 전에 엄마가······ 병환으로 돌아가셨어요.”

“아······.”

듣지 못했다.

예전 같으면 부고 기사라도 접할 수 있었을 테지만, 이젠 이런 소식에는 그녀를 위해 작은 기사 한 칸조차 할애하지 않는다.

게다가 아직 출소일 전이다.

병환으로 인한 형집행정지였을 테니, 아직 빚도, 죗값도 다 치르지 않은 죄인의 장례식이 제대로 치러졌을 리도 없다.

그렇게 조용히 떠나보낸 것이다.

그녀의 인생에서 수렁 같고 늪 같았던 존재를.

그럼에도 모친의 죽음으로 자신이 밝아졌다는 사실이 못내 씁쓸하고 아픈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모친과는 일면식도 없는 내 입장에선 그저 잘 됐다는 생각만 든다.

사람 쉽게 안 바뀐다고, 만일 건강히 출소했더라면 또 무슨 짓으로 그녀를 힘들게 했을지 모르니까.

‘아! 그러고 보니 변동정보에 나와 있던 게 이거였나?’

김사나의 대출 서류에서 보았던 변동정보.

[등급상승요건: 잠재적 불안 요소 해소. 이미지 개선. 수익 개선]

잠재적 불안 요소 해소가 어머니의 죽음을 의미하는 거였나 보다.

변동정보 대로 이것으로 정말 거칠 것 없이 날아오를 일만 생겼다.

배우 김사나의 제2의 전성기가 어떤 모습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암튼······ 저도 시사회에 참석하니까 꼭 와주세요.”

“그럼요. 무조건 보러 가겠습니다!”

※※※

“흠······.”

집으로 돌아온 난 거실 테이블 위에 두 장의 초대장을 놓아두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누구랑 간다······.”

영화란 게 기본적으로 커플을 위한 문화다.

다른 영화였다면 당연히 고민할 필요도 없이 장서연에게 전화를 걸었을 테지만, 문제는 이 영화가 김사나의 복귀작이라는 것이다.

나와 이관우의 젊은 날을 뜨겁게 달구었던 우리 청춘의 아이콘.

영화는 물론이고 그녀의 드라마가 방영을 하는 날에는 어김없이 내 자취방에 모여 그녀가 울면 같이 울고 그녀가 웃으면 같이 웃었던 열혈 시청자였다.

팬 사인회에 참석하기 위해 아르바이트해서 힘들게 모은 돈으로 그녀가 낸 이벤트 앨범을 열 장이나 사기도 했었고, 그런데도 둘 다 추첨에서 탈락해 남은 돈으로 진탕 술을 마신 후 ‘씨바! 이렇게 술 마실 돈으로 앨범 한 장 더 샀으면 당첨됐을지도 모르잖아!’ 라며 술주정을 해대기도 했었다.

‘그때 샀던 앨범이 어디 있긴 있을 텐데······.’

아무튼 그때의 추억이 생생하다.

“역시 관우랑 같이 가야겠지? 지난번 일진기업 일로 신세 진 것도 있고.”

무엇보다 나중에 자기를 안 데려간 걸 알게 된다면 그 뒷감당이 난감하다.

‘서연씨랑은 다음에 달달한 로맨스나 보러 가든가 하고.’

전화를 걸었다.

“왜?”

“너 내일 시간 있냐?”

“내일? 토요일이잖아? 쌍둥이 아빠가 주말에 시간이 있을 리가 있냐? 집안일 할 게 태산인데. 밖으로 나돌았다간 선아한테 나 죽어.”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다른 사람이랑 가는 수밖에. 영화 시사회 초대권이 생겼는데······.”

“영화 시사회라니?”

“제목이 ‘나는 킬러다’라는 건데······.”

“자, 잠깐, 지금 뭐라 그랬어? 나는 킬러다? 그거 우리 갤주님 영화잖아?”

“출연진에 그 이름이 적혀있긴 하네. 배우들 무대 인사도 있는 것 같고.”

“가! 나 가! 나 간다고! 몇시야?”

“쌍둥이 아빠는 주말에 시간이 없다매?”

“쌍둥이 아빠도 숨은 쉬어야지!”

“선아한테 죽는다며?”

“까짓 죽지 뭐! 어디 한두 번 죽어보나. 나 한 달에도 열댓 번은 죽어. 까짓 한번 더 죽는다고 뭐 별거겠어?”

순간, 이게 목숨을 걸만한 일인가 싶기도 하고, 내가 애꿎은 목숨 하나 골로 보내는 거나 아닌지 내 결정에 의문이 생기기도 했지만, 어쨌든 다음날 우리는 김사나의 영화 ‘나는 킬러다’ 영화 시사회를 보러 코엑스로 갔다.

“근데 시사회 표는 어떻게 구한 거야?”

“내가 인맥이 좀 있지.”

“하긴, 영업점에서 사람 상대하는 게 일이니······ 역시 나도 영업점으로 옮겼어야 했나?”

“선아한테 죽는다며?”

“어차피 오늘도 목숨 걸고 나왔는데 뭐.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김사나의 영화를 보러 둘이 이렇게 나와 있으니 총각 시절로 돌아온 느낌인지 많이 용감해졌다. 물론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선아 앞에 바짝 엎드려 목숨부터 구걸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한두 번 본 게 아니니까.

우리는 근처에서 가볍게 식사를 마친 후 시간에 맞춰서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좌석이 어디야?”

표를 줬다.

“이거 너무 앞이잖아? 목이 좀 아프겠는데?”

“싫으면 그냥 나가고.”

“무슨 소리! 어떻게 얻은 푠데, 모가지가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리 사수해야지!”

어떻게 얻은 표인지 알고나 하는 소린지.

아무튼 그렇게 상영 시간이 다가오자 사람들이 속속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절반 정도가 찼다.

일반적인 시사회 풍경.

다만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에게선 대체로 영화에 대한 기대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다 보니 이벤트에 당첨이 되어서.

혹은 무슨 영화든 상관없이 시사회만 찾아다니는 사람들 이거나.

대본을 워낙에 재미있게 읽었고, 영화의 성공을 확신하고 있는 나로서는 이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그리고 이 영화가 끝이 났을 때의 반응들이 사뭇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한다.

그러고 있는데, 무대 뒷문을 통해 진행을 맡은 사회자와 주연 배우들, 그리고 감독이 들어왔다.

물론 거기에는 김사나도 있었다.

짝짝짝짝짝

관객들이 박수를 보낸다.

옆자리의 이관우는 아예 손바닥에서 불이 난다.

특히 김사나의 차례가 오자 아주 교주님 납셨다.

손바닥이 찢어져라 박수를 치는 중에도, 그간 김사나의 고생이 떠오르는지 혼자 감격해서는 눈물까지 찔끔거린다.

이 광경을 선아가 보았다면, 어쩌면 한 달 열댓 번의 죽음이 아니라 이게 마지막 죽음이 되지 않을까?

난 폰을 꺼냈다.

다른 사람들은 배우들 찍기에 여념이 없는 동안 난 몰래 이관우를 찍었다.

‘나중에 두고두고 요긴하게 써먹겠네. 흐흐흐흐.’

아마 내 입가에는 지금 아주 사악한 웃음이 걸려있지 않을까?

"어?"

그런데, 내가 자신의 목줄을 움켜쥘 무시무시한 자료를 확보한 줄도 모른 채 마냥 신나 있던 이관우가 돌연 놀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놀란 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무대 인사를 마친 배우들과 감독이 그대로 나가지 않고 관객석으로 오더니 하나둘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이었다.

심지어 김사나는 바로 내 옆자리였다.

“성운씨. 오셨네요. 안 오셨으면 많이 서운했을 거예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짐짓 안도의 숨을 폭 내쉰다.

“약속했으니까요. 근데 무대 인사만 하는 게 아니고 영화도 같이 보는 거였습니까?”

“예. 이게 첫 시사회거든요. 저도 완성본을 보는 건 이게 처음이에요. 그래서 지금 너무 떨리고 긴장돼요. 관객들 반응도 걱정되고.”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분명 아주 재미있을 거고, 관객들 반응도 최고일 겁니다. 아니면 제가 뭣 하러 이 영화에 투자했겠습니까?”

“성운씨가 그렇게 말해주니 마음이 좀 놓이네요. 아, 근데 이분은······ 혹시 성운씨 친구분이세요?”

김사나가 그제야 내 옆자리의 이관우를 발견하고는 묻는다.

지금 이관우는 완전히 대혼란 중이다.

꿈이라도 꾸고 있는 느낌인 모양이다.

아주 넋이 빠져서는 정신없이 나와 김사나를 번갈아 본다.

“예. 대학 동창입니다. 지금도 같은 은행에 근무하고 있구요.”

“아, 성운씨 절친이시구나. 안녕하세요. 김사나예요.”

김사나가 살짝 고갯짓을 하며 인사를 건네자 그때까지도 정신을 못 차리던 이관우가 화들짝 놀라서는 머리가 아예 땅에 닿을 것처럼 허리를 숙인다.

“바, 반갑습니다! 저 갤주, 아니, 김사나 배우님 완전 팬입니다!”

그 과한 인사에 순간 놀라는 김사나지만, 이내 환하게 웃는다.

“감사해요.”

그러는 사이 영화가 시작되었다.

내 옆에서 계속해서 옆구리를 찔러 대며 해명을 요구하던 이관우도 금세 영화에 빠져들어 정신없이 웃어댄다.

그건 단순히 팬심 때문이 아니었다.

별 기대 없이 보던 다른 관객들도 어느 순간부터는 완전히 몰입해서는 이관우가 웃을 때 같이 웃었고, 안타까운 장면에서는 같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으며, 주인공들의 애절한 사연이 나올 때는 같이 울었다.

잘 만들었다.

내가 대본을 읽으며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었고, 김사나가 맡은 배역 또한 훨씬 더 생동감 넘치고 매력 있었다.

그렇게 영화가 끝나고,

짝짝짝짝짝짝짝짝짝―

배우들이 무대 인사를 하러 나왔을 때보다 훨씬 더 큰 박수가 이어졌다.

그 박수소리와 환호가 상영관 안을 메아리치고 메아리쳐, 마치 오케스트라처럼 웅장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그 울림을 뚫고 터져 나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와! 이 영화 대박이다!”

가식 없이, 격식도 없이 터져 나온 진심.

그리고 그 속에서 얼굴을 무릎에 파묻다시피 한 김사나의 등이 크게 들썩인다.

울고 있었다.

그 진심에, 그 환호에, 그 축하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펑펑 울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는 내 가슴속에서도 뜨거운 것이 휘몰아친다.

그녀의 감정에 교감을 한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지극히 물질적인 탐욕이다.

‘이건 무조건 된다!’

변동정보들 통해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막상 영화를 보고 나니 확신은 그보다 더 강한 맹신이 된다.

어쩌면 정말······ 천만을 찍어버릴지도 모르겠다.

< 이건 무조건 된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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