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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31화 (31/50)

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31

“대체······.”

이재신 과장이라니?

어제 나와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던 그 순하던 사람이 횡령이라니?

‘아니, 토끼 같은 새끼들 보는 낙으로 산다며?’

이은섭이 전한 소식 만으로는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 즉시 마원섬유로 달려갔다.

거기에서 듣게 된 소식은 더 충격이었다.

“오늘 아침 과장님께서 충남 공장에 원단 납품 비리가 있는 것 같다고 보고를 올렸습니다. 그 바람에 사장님께서 노발대발하셔서 충남 공장으로 내려가셨구요. 그 사이 과장님께서 회삿돈 40억을 자기 계좌로 계좌 이체를 하신 겁니다.”

그렇게 이체 한 돈을 여러 은행 점포에서 소분해 인출했다.

한 곳당 3억씩, 열세 곳을 돌며 주도면밀하게.

40억이라는 돈을 한 곳에서 다 빼게 되면 괜한 주목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김창희 사장을 납품비리니 뭐니 하며 충남 공장으로 내려보낸 것도 당연히 다 거짓말일 것이다.

“이 과장님 집은요? 가족들은 지금 어딨습니까?”

“가족이라고 해봤자, 얼마 전에 이혼하셨는데요 뭐. 집이랑 애들 양육권도 전 와이프 분이 다 가져가셨고. 이혼하시고는 근처 모텔에서 지내고 계셨습니다.”

"하······."

토끼 같은 새끼 어쩌구 한 것마저 거짓말이었다.

이쯤 되니 허탈한 웃음만 나온다.

나름 영업점에서 많은 사람을 상대하며 사람 좀 볼 줄 안다고 자부해왔건만,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아니, 뒤통수는 내가 아니라 김창희 사장이 맞은 건가?

“사장님은요?”

“경찰서에 들렀다가 인쇄소로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전단지를 만드실 거라고······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참······.”

경찰의 느려터진 대응을 생각하면 조급할 만도 할 것이다.

경찰이야 이재신 과장이 돈을 얼마를 탕진하던 언제고 잡기만 하면 그만이지만, 김창희 사장에겐 그야말로 1분 1초가 피가 마르는 시간일 테니까.

하지만 과연 그런다고 쉽게 잡힐까?

확신할 순 없지만, 아무래도 즉흥적으로 저지른 범행 같지가 않다.

납품비리니 뭐니 한 것도 김창희 사장이 어느 포인트에서 발작 버튼이 발동하는지 정확하게 계산하고 올린 보고일 것이다.

당연히 사전에 필요한 준비들도 다 마쳤을 터.

그런데도 D-Day 전날, 태연하게 나와 술을 마셨다.

토끼 같은 자식이니 뭐니 하면서.

'아, 생각하니 또 어이없네.'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근래 들어 힘든 일을 겪으면서 그런 쪽으로 각성을 해버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도 훨씬 더 냉정하게 범행을 저지른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쉽게 잡히지도 않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재신 과장은 횡령 사건이 터진 후 한 달이 넘도록 잡히지 않았다.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으로는, 그렇게 도주를 하는 중에도 고급 호텔에 묵었다느니 호화 쇼핑을 했다느니, 심지어 평소 로망이었던 벤츠까지 구입해 도주 생활을 즐기고 있다고 한다.

더욱 압권인 것은 수사망이 좁혀오자 성형을 한 정황까지 포착이 되었다는 것.

‘무슨 범죄 영화의 주인공이냐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대범하고 훨씬 더 대담하다.

과연 그때 나와 술을 마셨던 그 소심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당연하게도 횡령의 여파로 마원섬유가 입은 타격은 심각했다.

재정 위기에 몰려 직원들 월급 챙겨주기도 힘들어졌고, 사장이 그 모양이니 애사심 따위가 있을 리 없어 직원들 태반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사람이 없으니 공장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그러니 재정 상태는 더 나빠지고, 거기에 한성은 이미 담보 회수 절차에 들어간 상황.

악순환에 악순환.

그야말로 파산 직전이다.

그런 와중에도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며칠 전 담보물 점검을 위해 마원섬유에 들렀더니 술이 떡이 된 김창진 사장이 그나마 남아 있는 직원들에게까지 행패를 부려대고 있었다.

자업자득.

저런 인간이 사장인데 회사가 안 망하는 게 더 이상하다.

그저 아직도 저런 인간 밑에 남아 있어야 하는 직원들의 사정이 안타까울 뿐.

덕분에 알게 된 것도 있다.

첫 번째는 사람 속은 참 알 수가 없다는 것.

'정말 사람 참 어렵다.'

그리고 두 번째는 겨우 석 달도 되지 않는 시간에 변동정보가 두 번이나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건 곧, 각각의 개별적인 사건이라면 신용등급은 짧은 기간에도 몇 번이든 바뀔 수가 있다는 뜻이다.

더 부지런히 살펴야 한다.

이번 일처럼 뒤통수 맞지 않으려면.

이번에야 첫 번째 변동정보 덕에 손해 없이 넘길 수 있었지만 다음에도 이번처럼 운이 좋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그렇게 보름이 더 지났을 무렵이었다.

외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내 책상 위에 우편 하나가 놓여 있었다.

필리핀에서 온 해외 우편이었다.

필리핀에는 딱히 우편을 주고받을 만한 지인도 없기에 의아해하며 열어보니 편지는 없고 달랑 사진 한 장만 들어있었다.

어느 한적한 해변이었다.

길게 늘어선 야자수들과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푸른 바다, 높고 맑은 하늘, 그리고 그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참 팔자 좋게 해변가 선베드에 누워있는 한 사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그냥 알 수 있었다.

‘이 인간도 참······.’

분명 중 범죄자인데, 나도 뒤통수를 맞았다면 맞았는데, 이상하게 밉지가 않은 건 왜일까?

※※※

그 사이 신라은행 이화지점에 투척했던 여섯 건의 대출 중 남은 두 건마저 똥으로 확정이 되었다. 그리고 신 과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하 과장. 우리 술이나 한잔할까? 약속했잖아. 결말이 어떻게 나든 단술에서 다시 한잔하자고.”

순간, 징계가 결정났다는 예감이 뇌리를 스쳐 지났다.

그리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나 다음 주에 진주로 내려가.”

단술에 도착해 자리에 앉자마자 씁쓸히 웃으며 신 과장이 그렇게 말했다.

내가 똥을 투척하고 두 달이 채 안 되는 시간, 이래저래 맘고생이 심했는지 많이 초췌해진 모습이다.

“결국 그렇게 되었군요.”

“그런 거지 뭐. 은행에 그렇게 큰 피해를 입혔으니······.”

딱히 위로의 말은 하지 않았다.

“거기 공기가 서울보단 좋을 테니, 거기서 살다 보면 우리 딸 아토피는 좀 좋아지려나······.”

서울로 다시 복귀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걸 그도 잘 알고 있다.

희망을 품기엔 손실 금액이 너무 크다.

“근데 말이야. 혹시······ 그 여섯 건, 일부러 우리한테 떠넘긴 건가? 거기 대표들한테 물으니까 뒤늦게 실토를 하더라고. 우리랑 계약 맺기 전에 이미 한성에서 만기연장 거절당했다고. 아, 물론 따지려는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총 칼만 안 들었다 뿐이지 서로 생존을 건 경쟁이었는데, 친절하게 수단 방법 가려가며 싸울 상황은 아니었잖아?”

신 과장이 그렇게 말하니 나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예. 떠넘긴 거 맞습니다.”

“역시 그럴 것 같더라니······ 근데 어떻게? 그 여섯 건이 다 부실 대출이 될 건 어떻게 알고? 우리 심사부에서도 조사를 다 마친 건이었는데······.”

“그야 신라의 여신심사부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실력이 부족했든 노력이 부족했든.”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어떻게 여섯 건을 다······ 하긴, 그게 팩트긴 하군. 결과가 그러니까. 그럼 결국 이게 다 우리 여신심사부의 잘못이라는 건데, 그 벌은 우리가 다 받는 거로군.”

조금 억울하다는 표정.

하지만 억울해 할 일은 아니다.

영업점이 입은 피해는 어디까지나 영업점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고, 모르긴 몰라도 신라의 여신심사부 또한 그리 무사하지는 못할 테니까.

어쨌든 난 이것으로 한성은행 사람을 여럿 살리는 대신, 동시에 신라은행 사람을 여럿 죽였다.

혁혁한 전공을 세운 셈이지만 전혀 유쾌하지 않다.

이곳이 정말 전쟁터는 아니니까.

당장 눈앞에 목이 잘려나간 장수의 모습을 보며 희희낙락할 만큼 냉혈한도 아니고, 그 장수와의 친분도 아주 가볍다고 만은 할 수가 없으니까.

그저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초래한 신라은행의 수뇌진들에 대한 짜증만 치솟는다.

‘진짜 똥물에 튀겨야 하는 건 그놈들인데.’

“아무튼 이렇게 내려가면 다시 볼 수나 있을까 싶어서 불렀어.”

“예. 저도 신 과장님과는 꼭 한 번 더 뵙고 싶었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라 그게 쉽지가 않을 것 같았는데,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후로도 속 깊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거래처 사장들에 대한 뒷담화부터, 지금 돌이켜보면 거래처를 따내기 위해 했던 창피한 일화들까지,

경쟁 관계이다 보니 평소에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도 오늘 만큼은 허심탄회하게 주고받았다.

“그럼 신 과장님. 다시 뵐 때까지 건강하십시오!”

택시에 올라타는 신 과장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래. 하 과장도 건강하고. 언제 꼭 다시 보자고!”

신 과장을 태운 택시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나는 택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택시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허전함이 급격하게 밀려들었다.

은행원이라는 것이 이런 식의 상벌이 아니더라도, 본점이나 다른 영업점 등으로 항시 전출이 이루어지는 직업이지만, 그래서 만남과 이별이 딱히 대수로울 것도 없지만, 그럼에도 막상 이별의 때가 되면 섭섭하고 허전한 기분이 든다.

무엇보다 오늘 난 내 몇 안 되는 술 친구 하나를 잃었다.

잠시 더 택시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걸음을 돌렸다.

그때였다.

지이이이잉―

내 그 몇 안 되는 친구 중에 한 놈의 전화였다.

“어이, 하씨야! 너 그 소식 들었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이관우의 목소리가 꽤나 격앙돼 있다.

“무슨 일인데?”

“우리 갤주님 말이야. 다담주에 영화 개봉한단다!”

갤주님······ 정말이지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다.

그리고 그 갤주님의 정체란 바로 배우 김사나다.

그러고 보면 이관우, 한때 디씨 갤러리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김사나의 열혈 팬이었다. 사실 나도 이관우의 그 끈질긴 영업질에 넘어간 케이스라 할 수 있었다.

‘벌써 그렇게 됐나?’

촬영을 시작한 지 반년 조금 안 됐다.

그래서 한 달 정도 뒤에나 개봉할 거라 생각하고 아예 잊고 지냈었는데, 생각보다 개봉일이 빠르다.

“입사하고 정신이 없어서 갤질을 끊었더니 우리 갤주님 영화 들어간 것도 모르고 있었네.”

“넌 결혼까지 한 놈이 아직도 우리 갤주님이냐?”

“당연하지! 결혼이 대수냐! 내가 죽어서 관 속에 들어갈 때까지도 우리 갤주님은 우리 갤주님인 거다! 젠장! 갤주님 영화 개봉하는 거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도 시사회 티케팅이라도 한번 해보는 건데, 완전 망했어! 그래도 2주 후에는 개봉이니까 너도 개봉 일에 맞춰서 시간이나 비워 놔.”

“나까지?”

“당연하지! 이게 몇 년 만의 영환데, 우리가 좌석 하나라도 더 채워드려야 할 거 아냐!”

김사나의 영화 개봉에 들떠 있는 중에도, 그 말 속에는 영화가 성공하지는 못할 거라는 현실적인 판단이 담겨 있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티케팅 파워가 제로에 가까운 여배우, 거기에 저예산이고 감독도 매니아 층은 좀 있다지만 스타 감독은 아니다.

성공할 만한 조건이 하나도 없다.

물론 나는 성공확률 100%의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서 새삼 기대된다.

과연 흥행성적이 얼마나 될지.

‘최소 500만은 넘겠지?’

그 정도만 돼도 관객 수익으로만 나한테 떨어지는 돈이 투자금 포함 30억.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최소 기준이다.

김사나의 변동정보 대로라면 분명 그것보다는 훨씬 더 좋은 성적을 거둘 것이다.

그러니 나라고 영화를 안 보러 갈 수가 있나.

더구나 대본도 그렇게 재밌게 읽었는데.

“알았어. 같이 가. 영화 개봉 일이 언제라고?”

하지만, 나는 굳이 개봉일에 맞춰 영화를 보러 갈 필요가 없었다.

다음날, 김사나가 직접 은행으로 찾아와 초대권 두 장을 내 앞에 내민 것이다.

“내일 우리 영화 프리미어 시사회가 있는데, 와주실 거죠?”

< 최소 500만은 넘겠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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