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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30화 (30/50)

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30

나와 장서연은 파스타로 식사를 끝낸 후 근처 카페로 왔다.

그제야 내가 물었다.

“그런데 가게 일로 은행에 들렀다니, 무슨 일입니까?”

“아, 저 복학할 때까지 가게일 좀 도와드리기로 했거든요. 엄마도 많이 회복되셨고. 그래서 앞으로 은행에 자주 오게 될 것 같아요.”

“이런······ 어쩌죠? 괜히 저 때문에 일 보시는데 불편해지시는 거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수신계 텔러들과는 업무적으로 계속 마주쳐야 할 텐데 직장 상사의 여친이라고 알려버렸으니 은행 일을 보는 게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괜찮아요. 전······ 좋았는데요?”

장서연이 크지 않은 미소를 입가에 걸며 지그시 나를 본다.

늘 느끼는 거지만 이렇게 바라볼 때의 눈빛이 참 묘해서 기분 좋은 설렘과 적당한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그렇게 장서연과의 즐거운 점심을 끝내고 은행으로 돌아왔다.

직원 통로를 통해 뒷문으로 들어와서 텔러들과 마주칠 일은 없었다.

지은 죄가 있다 보니 온종일 신경이 쓰였지만 딱히 특별할 것 없는 하루가 그냥 지나갔다.

그건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씩 오고 가다 강희수 주임과 마주칠 때면 흘겨오는 눈빛에 괜히 뻘쭘해져서는 애써 시선을 피하는 정도가 내가 지은 죄의 형벌이었다.

역시 우리 아리따우신 텔러님들은 어찌 그렇게 또 대인배들이신지.

이래서 내가 참 존경한다.

물론 더 이상 공짜 커피는 없다.

내 책상 위에도 이창주가 놓고 간 드립 커피 한잔이 전부.

이번엔 텔러들의 민심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도 않았다.

사실 옮겨갈 곳도 없다.

장원지점의 젊은 남자 행원들 중에 이제 남은 것은 이은섭뿐이지만, 이은섭은 정혼자도, 여자 친구도 아닌, 무려 애 딸린 유부남이니까.

그렇게 민심의 잣대가 되었던 텔러들의 커피 조공 문화는 사라졌다.

그러고 보면 이 이상한 문화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도 나 때문이다.

한 차장에게 발차기를 한 후 창구로 쫓겨난 나를 위로했던 그 친절하고 따뜻했던 커피들이 이 조공 문화의 시작이었다. 그게 어느 순간부터는 습관이 되고, 따분한 은행 생활의 유희가 되어 여기까지 온 것이다.

즉, 나로 인해 생겨난 이 건강에도 심히 좋지 않은 이상한 문화가, 또한 나로 인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런 걸 결자해지라 하는 건가?’

어쨌든 그렇게 다시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일상에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일들도 있다.

※※※

“왜 추가 대출이 안 되냐고! 담보도 그만큼 잡아갔으면 양심적으로 5억 정도는 더 해줄 수도 있잖아! 지금 회사 사정이 안 좋다니까! 세금이다 뭐다 죄다 쥐어 뜯어가는 놈들 뿐이고, 이대로 우리 회사 죽일 거냐고!”

응접실 안, 내 앞에서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 대고 있는 노인은 지난번 회사에 들러 재무재표를 확인했던 마원섬유의 김창희 사장이다.

변동정보 대로 가지급금 문제로 세무조사를 당해 추징금 17억을 때려 맞았다. 그나마 배임 횡령으로 기소를 안 당한 게 천만다행일 정도.

마음 같아서는 계약을 종료하고 싶었다.

하지만 위에서 내린 결론은 만기 연장.

세무조사로 타격이 크다고 해도 그게 마원섬유가 망할 정도의 타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변동정보에도 하락등급이 D가 아닌 회생 가능한 C로 떴었기에 나로서도 더 반대할 수가 없었다.

대신 신용등급이 떨어진 만큼 담보 비율을 확 높였다.

금리를 인상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담보 비율을 높이는 쪽으로 밀어붙였다. 내가 미리 봐둔 아직 괜찮은 담보물이 하나 있기도 했고, 전날 마원섬유에 직접 내방 해서 느낀 바, 이 마원섬유의 김창희란 대표가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당장의 이익보다 안전을 택한 것이다.

“아시다시피 이번 가지급금 문제로 마원섬유의 기업신용등급이 많이 떨어진 상태입니다. 이대로는 추가 대출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가지급금 문제로 일이 터지면, 나중에 갚는다든가, 추징금을 낸다든가 하는 걸로 다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자금 조달에도 문제가 생길 뿐만 아니라, 법인세며 소득세며, 총체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손해를 입게 된다.

당장 손대기 쉽다고, ‘어차피 회사 돈이 다 내 돈인데 뭐’라는 마인드로 함부로 생각했다가는 지금 마원섬유처럼 전반적인 회사 운영에 곤란을 겪게 되는 것이다.

김창희 사장은 그러고도 한참을 더 어깃장을 놓은 후에야 성질에 못 이겨 씩씩대며 돌아갔다.

그만큼 나도 피곤하다.

김창희 대표를 돌려보내고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자, 이은섭이 생수를 건넨다.

“고생하셨습니다.”

이런 일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사람을 지치게 하는지는 서로가 잘 안다.

“근데 마원섬유는 자금 사정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잖아요?”

“사업하는 사람들한텐 당장 주머니의 쌈짓돈 보다 은행 돈이 쓰기 편한 법이니까.”

“아무리 그래도 수중에 여유가 있으면서도 이렇게까지 난리를 친다는 게 참······.”

처음엔 객장에서부터 큰소리로 소동을 부리는 걸 겨우 응접실로 데리고 들어온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좀 찝찝하긴 하다.

김창희 사장의 인성이 원래 그런 거라 생각은 들지만.

난 자리에서 일어서며 슈트를 걸쳤다.

“난 보고할 게 있어서 일진기업에 들렀다가 마원섬유가서 재무 상황도 좀 확인해 볼 테니까, 차장님 들어오시면 그렇게 전해줘.”

“예. 고생하십시오.”

“이 새끼야! 이게 다 네가 똑바로 안 해서 이렇게 된 거잖아! 이 밥만 축 내는 밥버러지 같은 새끼야!”

일진기업에서 볼 일을 마치고 마원섬유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재무과 사무실 문밖으로 욕설이 새어 나왔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런 내 눈에 마침 김창희 대표가 이재신 재무 과장의 정강이를 걷어차는 것이 보였다.

빡!

이어서 터지는 욕설.

“야이 새끼야! 재무 과장이라는 놈이 가지급금 하나 관리를 못 해서 세무조사에 추징금에, 이젠 하다 하다 내가 그깟 은행원 놈들한테까지 이런 치욕을 당하게 만들어? 이러고도 월급은 따박따박 받아가지. 너 내가 사람이 좋아서 참는 거지, 아니었으면 벌써 잘랐어! 수틀렸으면 손해배상까지 들어갔을 거라고 이 밥버러지 같은 새끼야!”

정강이를 깐 것으로도 모자라 잡히는 서류철로 얼굴을 수차례나 때려 댄다.

그런 광경에도 재무과 직원들은 외면만 할 뿐 크게 동요가 없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뜻이다.

나도 그 갑질 속으로 직접 끼어들지는 않았다.

내가 말리면 지금이야 잘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상시 대기하며 계속해서 말려줄 수도 없는 입장. 자칫 괜한 앙금만 남겨 나중에 더 심한 갑질을 당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냥 지켜만 볼 수가 없어서 지금 들어온 척 사무실 문을 다시 열었다가 쾅 닫았다.

그제야 김창희 사장이 욕설과 폭행을 멈추고 나를 본다.

“어? 하 과장. 하 과장이 여긴 무슨 일로 왔어?”

창피한 장면을 들켰는데도 전혀 창피해 하는 기색이 없다.

회삿돈은 자기 돈이고, 회사 직원은 무슨 개인 사노비 정도로 생각하는 인성 수준.

정말이지 말도 섞고 싶지 않지만 꾹 참고 대답했다.

“재무 상태 좀 확인하려고요.”

순간, 방금까지만 해도 악귀처럼 갑질 폭행을 자행하던 김창희 사장의 얼굴이 금방 환해진다.

“왜? 추가 대출 가능한지 확인하게?”

“뭐······.”

“그래. 그래. 얼른 해봐. 우리 회사 재정 상태야 아무 문제 없지. 어이, 이 과장. 얼른 하 과장이 원하는 자료들 준비해드려.”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르지만, 덕분에 내가 원하는 자료들은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자료를 확인하는 동안에도 슬쩍 이재신 과장의 표정을 살폈다.

지난번에 왔을 때도 그다지 밝은 느낌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얼굴이 어둡다.

살도 좀 빠진 것 같다.

조금 전의 상황만 봐도 세무조사 후 어떠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잘못은 자신이 해 놓고, 재무 과장의 보고를 다 무시한 것도 김창희 사장 본인일 텐데도, 막상 사고가 터지자 애꿎은 재무 과장에게 죄다 책임을 떠넘기고는 방금처럼 화풀이나 해 댔을 게 뻔하다.

남일 같지 않다.

물론 이재신 과장이 당한 것에 비하면 내가 당한 직장 내 갑질은 갑질 축에도 못 끼겠지만.

그래서 더 발길이 떨어지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과장님.”

축 처진 어깨에 하염 없이 땅으로 내려 꽂힌 고개.

터덜터덜 힘없이 회사를 나서던 이재신 과장이 내 부름에 의아해하며 고개를 든다.

흠칫.

“하 과장님이 무슨 일로······?”

“그냥 이 과장님이랑 술이나 한잔 하고 싶어서요.”

내 말에 약간의 경계를 드러낸다.

회사입장에서 보면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니 경계하는 게 당연하다.

난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정말 그냥 이 과장님이랑 술 한잔하고 싶은 것 뿐입니다. 지금이야 좀 나아졌지만 제 은행 생활도 그렇게 순탄치 만은 않았거든요. 이참에 허심탄회하게 얘기도 좀 하고, 어디 노래방 같은데 가서 같이 스트레스도 풀고 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내가 그렇게 말하며 그를 데리고 근처 포장마차로 향하자, 마지못한 듯 따라왔다.

하지만 허심탄회한 술자리는 되지 못했다.

내가 한 차장에 대한 얘기며 서후남에 대한 얘기로 쉴 새 없이 주절거리는 동안에도 그저 술만 홀짝홀짝 마실 뿐이었다.

그래도 술기운 때문인지 처음보다는 어두웠던 얼굴도 많이 밝아졌고, 내 실없는 말에 한 번씩 웃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말을 하기도 한다.

“하 과장님. 너무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저 괜찮아요. 남의 돈 버는 게 어디 쉽나요? 직장 생활이 다 그렇죠 뭐. 토끼 같은 새끼들 보며 버티는 거고, 또 토끼 같은 새끼들 커가는 거 보는 낙으로 사는 거지. 여기가 그래도 돈은 많이 주니까. 고졸 출신인 내가 어딜 가서 이만큼 벌겠습니까?”

원래 갑질하는 회사가 돈은 많이 준다.

그래야 더 실컷, 더 마음껏 갑질을 해댈 수 있으니까.

더구나 상대가 다른 데로 도망가지도 못하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갑질은 심해지기 마련이고.

그런데도 참는다.

가족들을 위해.

그 헌신에 코끝이 다 찡해온다.

세상에는 참 존경할만한 사람들이 많다.

“그렇죠. 다 그렇게 버티는 거죠. 저야 아직 토끼 같은 새끼들이 없긴 하지만요. 하하.”

그래도 생각보다는 상태가 나쁘진 않은 것 같아서 안심이었다.

※※※

“아······ 속쓰려.”

어제 괜히 오바해서 마셨나보다.

숙취가 가시지 않는다.

저번 1,200억 사기 대출 사건 이후, 이창진 대표와의 약속 대로 한 달간 종이 되어 술 시중을 들었건만, 어떻게 된 게 이놈의 술은 도무지 늘지가 않는다.

그렇게 숙취를 달고 업무를 보기 시작한 하루.

내내 좀 이상했다.

어제 그렇게 대출에 대한 기대로 신나 하던 김창희 사장이 너무 감감무소식이다.

어제 그 난리를 치던 기세를 생각하면 영업점 문이 열리자마자 부리나케 들이닥칠 줄 알았더니, 하루 종일 전화 한통 없었다.

왠지 모를 찝찝함.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그렇다고 먼저 전화를 하기는 싫고.

순간 변동정보에 생각이 미쳤다.

이번에 만기연장을 하며 담보 설정을 새로 했기에 대출 서류도 새로 받았다.

그땐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지금까지 개인이든 기업이든 하나의 대출 건에서 두 번의 변동정보가 뜬 적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진 굳이 다시 찾아볼 생각을 안 했던 거지만, 못 내 찝찝한 이 기분을 털어버리기 위해서라도 한 번 확인은 해봐야 할 것 같았다.

보관실로 향했다.

그런데,

타닥 타닥 타닥 타닥······.

마원섬유의 대출 서류에서 두 번째 변동정보가 떴다.

[판정보류]

[등급하락요건 발생]

[등급하락요건: 횡령으로 인한 재정 상태 악화]

[기업신용평가등급 C→D 확정날짜: 202X년 9월 18일]

횡령이라니? 재정 상태 악화라니?

설마, 김창희 이 인간이 또 회삿돈에 손을 됐다고?

심지어 신용 등급을 D로 강등 시켜버릴 정도의 거액을?

가만, 9월 18일이면······ 오늘이잖아?

“이런 미친 노인네가!”

입에서 욕부터 터져 나오는 그때였다.

벌컥 보관실 문이 열리며 이은섭이 달려 들어왔다.

“과장님! 큰일났습니다! 마원섬유에서 횡령 사건이 발생했답니다!”

아니나 다를까, 변동정보 그대로다.

“김창희 이 미친 인간이 결국······.”

“김창희 사장이 아닙니다!”

“뭐?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그럼 누가 횡령을 했다는 거야?”

“재무 과장이랍니다! 재무 과장이 오늘 하루동안 은행 13곳을 돌며 회삿돈 총 40억을 횡령하고 날랐답니다!”

< 김창희 사장이 아닙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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