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29
“······.”
이창주가 자신의 텅빈 책상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그 눈에 스치는 허전함.
‘평소 쿨한 척하더니······.’
그 심정 잘 안다.
응원 받는 느낌.
내가 잘 살고 있구나 라는 증거.
약간의 자뻑과 우월감.
이게 은근 중독성이 있어서 아예 그 맛을 모를 때는 상관없지만, 한번 그 맛을 보고 나면 그것이 사라졌을 때의 허전함이란 은근, 아니, 꽤 서운하다.
조금 과장을 섞어 말하면, 장구한 시대적 흐름에 속절없이 떠밀려져 나가는 느낌?
물론 이창주가 받는 느낌은 나와는 조금 다르겠지만.
이윽고, 이창주가 내 책상 위의 커피들을 본다.
그런데······ 그 눈빛은 뭐냐?
훔친 거 아니거든?
정당한 거짓말로 얻어낸 내 영광의······.
음, 정당한 거짓말은 좀 말이 안 되나?
새삼 서연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그때, 이창주가 사무실을 나갔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드립 커피를 한잔을 들고 들어와서는 평소처럼 내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디카페인입니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준다고 다 드시지 마세요. 이것들 다 먹으면 과장님······ 죽어요.”
“······.”
내가 오해했나 보다.
이창주 이 녀석은 쿨한 척하는 게 아니라 그냥 쿨하게 태어난 거다.
그 바람에 왠지 나만 찌질해진 느낌.
이런 걸 보면 리더가 되는 사람은 역시 따로 있나 보다.
난 아직 멀었다.
그렇게 자기반성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하 과장.”
지점장님이 날 부른다.
“지금 바로 본점으로 가 봐. 행장님 호출.”
“행장님이요? 왜······?”
“왜긴, 이번 일로 치하라도 하시려나 보지.”
“······.”
전혀 기쁘지 않다.
오히려 부담스럽다.
전에도 좋은 자리인 줄 알고 불려갔다가 인터뷰다 뭐다, 아주 곤욕을 치렀으니까.
결국 그 일로 인해 이런 사태까지 와버렸던 것이고.
하지만 어쩌랴.
행장님이 부르신다는데.
나는 곧장 본점 은행장실로 찾아갔다.
※※※
“오! 하 과장. 어서 와! 이야, 우리 하 과장, 나날이 신수가 훤해지는구만. 자, 얼른 이리로 와서 앉아.”
유종원 행장은 여전히 높은 텐션으로 나를 반겼다.
하지만 난 선뜻 유 행장이 권한 자리에 앉지 못했다.
거기에는 유 행장만이 아니라, 먼저 온 선객이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 정도는 본적이 있는 사람이다.
여신심사부 본부장 차규완.
“아, 차 본부장은 알지?”
“예.”
간단히 인사를 주고받은 후에야 나는 차규완 본부장과 마주해 앉았다.
그런데, 차 본부장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다.
‘내가 오기 전에 안 좋은 소리라도 들은 건가?’
하긴, 좋은 소리를 들을 이유가 없다.
요즘 연이어 심사에 구멍이 나다 보니 여신심사부가 아니라 여신기상청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었다.
맞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이번엔 정말 맞힌 게 하나도 없으니 욕먹어도 싸다.
아니, 오히려 애꿎은 기상청만 억울할 일이다.
기상청은 적어도 반타작은 하니까.
“그래. 하 과장 자네 이야기 좀 들어 보지. 대체 그걸 어떻게 다 맞힌 건가?”
“아직 다 맞힌 건 아니고, 여섯 건 중 네 건입니다.”
“그거나 그거나, 어차피 다 맞힐 거 아닌가?”
뭘까?
이 맹목적인 믿음은?
박순호 지점장도 본받아야 할 것 같은 이 깊은 신앙심은?
“그래서, 어떻게 맞힌 건가? 사전에 무슨 정보라도 얻은 건가? 아니면, 감? 그것도 아니면 둘 다?”
“그냥······ 만기가 도래한 대출들이라 확인 차원에서 살펴보던 중에 의심스러운 점들이 있어 지점장에게 보고를 올렸던 것뿐입니다.”
어차피 내가 설명할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최선이다.
“역시! 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니까. 하지만 말이 안 되잖아? 우리 한성의 여신심사부도, 신라의 여신심사부도 조사는 다 할 만큼 했을 텐데, 그 의심스러운 점들이 왜 하 과장 자네한테만 보이냐는 거지. 누구 말대로 국내 수위를 다투는 은행들의 여신심사부들이 죄다 기상청인 것은 아닐 텐데 말이지.”
“······.”
딱히 대꾸할 말이 없다.
게다가 유 행장의 말에 차 본부장의 고개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땅으로 떨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리.
“뭐, 그건 그렇고······ 내가 하 과장을 이렇게 부른 건 말이지.”
이제야 본론으로 들어간다.
딱히 대답할 말도 없는데 계속 파고들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던 나로서는 안도가 되는 순간이었다.
“자네 여신심사부에서 일해볼 생각 없나?”
“예?”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영업점에 그냥 두기엔 아깝단 말이지. 자네 재능이.”
“하지만 전 아직 심사역 자격증도 없습니다.”
내가 이런 제안을 생각지도 못했던 것도, 한성은행의 여신심사부는 여신심사역 자격증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자격증 그깟게 무슨 소용이라고. 자격증이 능력을 반영하는 거라면 애초에 이런 사태들이 발생하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필요하다면 따면 되잖아. 그렇게 어려운 시험도 아니고.”
어려운 시험은 아니지만 집합연수다 뭐다 한 달 이상은 고생을 해야 한다.
그게 아니더라도, 본점의 여신심사부는 내 능력을 발휘하기엔 조건이 너무 안 맞다.
내 능력이 발동되는 첫 번째 조건이 대출 신청 서류다. 그리고 한성의 대출 신청 서류는 본점이 아니라 지점에서 보관한다.
물론 심사역이니 마음만 먹으면 지점으로 가서 대출 신청 서류를 확인하는 건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하지만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그 많은 대출들을 어떻게 다 일일이 확인한단 말인가?
불가능이다.
가능하다 하더라도 삶의 질이 시궁창이 될 것이다.
슬쩍 차 본부장의 표정을 살펴보니 이미 둘 사이에는 이야기가 된 모양이다.
“저한테······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일입니까?”
은행장이 까라면 깔 수밖에 없다.
최고 결정권자가 인사권을 발휘하는데 감히 누군들 그걸 거부할 수 있을까.
“왜 싫은가? 여신심사부로 옮기겠다고 하면 그동안의 공을 생각해서 승진도 함께 이루어질 텐데? 마침 여신심사부에 차장 자리도 하나 비어 있고. 즉, 이건 명백하게 본점으로의 영전이라는 말이지.”
“그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만······ 저한테 선택권이 있는 거라면 저는 조금 더 장원지점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아니, 왜?”
“아직은 영업점 일이 좋습니다. 현장에서 사람들과 직접 부대끼는 재미도 있구요.”
변명이기도 했지만 또한 진심이기도 했다.
“현장 체질이라는 건가?”
“저한테 선택권이 있습니까?”
내가 조마조마하며 행장을 보자, 행장이 곤란하다는 듯 눈살을 찡그린다.
하지만 이내 체념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음······ 당연히 있지. 나도 자네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이니까.”
“······?”
“괜히 무리하게 밀어붙이다가 자네가 다른 곳으로 튀어버리기라도 하면 한성으로서는 꼭 필요한 귀한 인재를 잃게 되는데, 나라고 별수 있나? 눈치를 봐야지.”
서운함이 묻어 나긴 했지만 다행히 그렇게 불쾌한 뉘앙스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 재능을 이대로 썩히기는 너무 아깝고······ 우리 이렇게 하지. 여신심사 과정에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을 때는 자네가 좀 도와주는 걸로. 일종의 특별 심사역이라고 하면 되려나?”
다시 차 본부장의 표정을 살피니 이번에도 이미 이야기가 된 듯 별다른 동요가 보이지 않았다. 다시 말해, 즉흥적으로 생각해낸 것이 아니라, 내가 거절할 때를 대비해 준비한 카드였다는 것.
은행장이 이만큼 양보해줬는데 그것마저 거절하기도 뭣하고, 또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닌 것 같아서 흔쾌히 승낙했다.
“예. 우리 여신심사부에서 저를 필요로 할 일이 과연 있을까 싶지만,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 달려오겠습니다.”
그것으로 행장과의 면담은 끝났다.
이번 만기 대출 건에 대해 치하의 말도 있었지만, 지난번처럼 포상금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하긴, 본점으로의 영전만큼 큰 포상도 없었을 테니까.
그걸 거절한 건 나였는데 뭘 더 바랄까.
그렇게 행장실을 나오는 길이었다.
“하성운 과장.”
행장실을 뒤따라 나오며 차규완 본부장이 나를 불렀다.
조금 긴장했다.
여신심사부의 잘못된 판단이 나 때문인 건 아니지만, 그리고 내 덕분에 더 큰 징계를 피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어디 높으신 양반들 비비 꼬인 심사가 그렇게 시시비비 잘 가려가며 터지던가.
아무래도 행장에게 많이 깨진 모양이던데, 그걸 다 내 탓으로 돌리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런데,
턱―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깊게 안도의 숨을 내쉰다.
“휴우! 이번엔 정말 하 과장 덕분에 살았어.”
“······.”
“그 대출 건들 그대로 진행됐으면 진짜 어쩔 뻔했겠냐고. 상상만 해도 아주 아찔해. 하하하.”
진심으로 웃고 있다.
다른 의도라고는 1도 느껴지지 않는다.
“근데 너무 아쉽구만. 행장님께서 하 과장을 우리 심사부로 보내 줄 거라고 말씀을 하시길래 나 정말 기대가 컸거든. 아니, 그러지 말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건 어때? 우리 심사부 직원들도 사람들이 참 괜찮아.”
이 역시 다른 의도는 없다.
표정이며 말투에서 진심으로 나와 같이 일하고 싶어하는 게 느껴진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아, 아뇨. 행장님께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아직 영업점 일이 좋아서요.”
“그래? 아쉽군. 아쉬워. 뭐, 그래도 특별 심사역은 하기로 한 거니까. 부르면 와 줄 거지? 아마 자주 부르게 될 것 같은데?”
“물론입니다. 그 정도야 뭐······.”
“좋아. 조만간 아예 명함까지 파서 줄 테니까,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야.”
그러고는 다시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기분 좋게 앞장서 간다.
그러고 보면 본점의 젊은 임원들, 유 행장이 4년간 있으면서 직접 끌어올린 인사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고리타분한 임원들과는 달리 사고가 유연한 것 같다.
‘적어도 신라은행과는 확실히 비교가 되긴 하네.’
이번 사태만 보아도 신라은행의 높으신 양반들이 어떤 인간들일지 충분히 짐작이 된다.
바야흐로 한성의 시대가 가까워진 느낌.
그렇게 기분 좋게 본점을 나와 장원지점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장서연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연씨.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가게 일로 은행에 잠깐 들렀는데, 온 김에 밥이나 같이 먹으려고요.”
그러고 보니 마침 점심시간이다.
“아, 이런······ 저 지금 본점에 들렀다 가는 길이거든요. 15분 정도 걸리는데 괜찮으세요?”
“예. 괜찮아요.”
“그럼 그 근처 카페라도 들어가셔서······.”
“아니에요. 15분인데요 뭐. 그냥 은행 밖에서 기다릴게요.”
“예. 그럼 총알같이 달려가겠습니다.”
그렇게 전화를 끊은 나는 총알같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빨리 차를 몰았다.
첫 데이트 후 이래저래 바쁜 와중에도 주말마다 빠짐없이 그녀와 만났다.
그만큼 더 가까워졌고 마음도 더 깊어졌다.
그런데도 아직 그녀의 목소리엔 이렇게 또 들떠버린다.
진도는 서두르지 않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설렘을 최대한 느긋이, 그리고 듬뿍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차를 몰아가던 중이었다.
불현듯 떠오르는 불길한 생각 하나.
-어휴, 여자친구라니, 저 그런 거 없습니다.
고작 일곱 잔의 커피와 맞바꾸었던 내 싸구려 양심이 그제야 떠올라 버린 것이다.
은행 앞이다.
일전에 사례금을 주러 나를 찾아왔던 만큼 텔러들도 그녀의 얼굴을 알고 있다.
가능성이야 희박하지만, 혹시라도 그녀들이 엮이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이런 저런 얘기들이 오가는 중에 내 얘기라도 나와버린다면?
“······.”
식은땀이 다 난다.
난 더욱 급히 차를 몰았다.
이젠 정말 총알이다.
이래서 사람이 죄 짓고는 못 사나 보다.
그런 내 눈에 은행 앞에 서 있는 장서연이 보였다.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큰 토드백을 양손으로 든 채 단정한 차림으로 차분히 날 기다리고 있었다.
부시도록 환한 햇살 속에서 시간이 정지라도 한 듯이.
그녀를 보는 순간, 어떤 뭉클함이 밀려와 내 그런 조급함과 다급함을 다 부질없게 만들어버렸다.
그깟 커피가 다 뭐라고.
나는 차를 세우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성운씨.”
감싸고 있는 환한 햇살 만큼이나 환한 미소로 나를 맞는다.
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가늘고 보드라운 손이 내 손바닥 속에 폭 들어온다.
그때였다.
마침 점심 식사를 위해 지점을 나오던 텔러들이 그런 우리를 보고는 놀란 눈을 한다.
그중에는 강희수 주임도 있다.
"두 분······?"
그녀들의 의아해 하는 시선이 나와 장서연의 맞잡은 손을 향한다.
난 그 손을 들어 올려 보이며 웃었다.
"제 여자친굽니다."
< 제 여자친굽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