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28화 (28/50)

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28

“이틀 동안 장원지점에서 신라 이화지점으로 옮겨간 대출 건수는 6건입니다. 대출 규모는 총액이 230억입니다.”

리스크관리 본부장 황경수의 보고에 유종원 행장이 눈살을 찌푸린다.

“갑자기 그렇게나 늘었다고?”

“예. 앞서 다섯 건까지 합치면 총액은 470억입니다. 규모도 규모지만 다른 거래처들 동요도 크고······ 이대로 두면 다른 지점들까지 영향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치킨게임이라도 하자고? ”

“임원들 사이에서도 이대로 두고만 보면 안 된다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안 돼. 쯧, 은행원이라는 사람들이······ 이게 감정적으로 처리할 일이야? 거래처야 다시 잡으면 돼. 오히려 이런 파행이 계속되면 결국에 그 리스크를 떠안게 되는 건 우리가 아니라 신라 쪽이지. 스스로 자멸해주겠다는데 뭐하러 같이 진흙탕에 뒹굴어?”

유종원은 오히려 신라의 이런 치졸한 대응이 반가웠다.

이십 년을 업계 1위로 군림해온 신라가 여유가 사라졌다는 뜻이고, 그만큼 한성이 신라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쌍팔년도에나 할 법한 그런 파행을 지시했다는 것 자체가 신라은행의 요직에 앉은 인간들이 고이다 못해 썩었다는 방증이다.

‘업계의 판도가 바뀔 때가 되었다는 거지.’

다만, 이틀 만에 여섯 건이나 빠져나갔다는 건 의외였다.

아무리 신라에서 공격적으로 나온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관리가 안 될 줄은 몰랐다.

어느 정도는 버텨 줄 거라 생각했다.

그건 박순호 지점장, 아니, 하성운 과장에 대한 기대이기도 했었다.

“6건에 230억이라······ 이해가 안 되는군. 어째서 한꺼번에 그렇게나 많이 빠져나간 거지?”

“박순호 지점장의 말에 따르면 6건 모두 이미 만기 연장 부결을 통보한 건이라 했습니다.”

“부결? 왜?”

“부도 위험을 감지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여신심사부를 통해 확인했습니다만, 계약을 해지할 만한 사유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애초에 그런 사유가 있었다면 신라 쪽에서 달려들지도 않았겠죠. 그저 면피를 위한 변명이라 생각합니다.”

“면피를 위한 변명이라······.”

박순호 지점장에 대해서는 사실 잘 모른다.

하지만, 셀프대출 사건부터 1,200억 사기 대출까지, 자신의 공으로 돌리려고 했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니, 사건이 워낙 중했던 만큼 면피를 하려고 했으면 그때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공을 하성운 과장에게 돌렸다.

그건 곧, 적어도 면피를 위해 그런 변명이나 늘어놓을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 부도 위험을 감지했다는 게 사실이라는 건데······.’

여신심사부에서도 그 사유를 발견하지 못한 것을 어떻게?

순간, 그의 머릿속에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역시 이번에도 하성운 과장인가?’

인맥을 동원한 걸까? 아니면 또 그 감이라는 것일까?

‘그건 너무 말이 안 되는데?’

한두 건도 아니고 무려 여섯 건이다.

여신심사부에서 그걸 다 놓쳤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신라 쪽에서도 그걸 다 놓쳤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심지어 신라와 한성의 여신심사부가 다 놓친 걸 하성운 과장이 그걸 혼자 다 찾아냈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일에 이 기대감은 대체 뭘까?

‘만일 이번에도 그 판단이 맞는 것이라면?’

여신심사에 관해선 그야말로 천재라 할 수 있다.

아니, 천재라는 말조차 부족할 지경.

그리고 만일 정말로 그 여섯 건의 대출이 부실 대출이라면······.

‘신라 이화지점은 핵폭탄을 떠안은 거겠군.’

그런 그의 생각이 절로 표정에 담겼나 보다.

“왜······ 그러십니까?”

황경수가 의아히 묻는다.

“응?”

“아니, 방금 웃으시길래······.”

“내가 그랬나?”

“예.”

심각한 피해 보고를 올리고 있는 상황에 히죽 웃으니 의아할밖에.

“그렇군. 내가 웃고 있었단 말이지······.”

희박한 가능성이다. 아니, 상식을 기준으로 보면 아예 제로 퍼센트다.

그런데도 이 기분 좋은 두근거림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 대출 건들 말이야. 잘 지켜봐. 그리고 신라 이화지점도 당분간 잘 살펴보고.”

※※※

그렇게 유종원 행장이 하성운 과장이 떠넘긴 똥들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을 무렵, 그 똥들을 기꺼이 다 떠안은 신라은행 이화지점은 거의 축제 분위기였다.

“좋아! 230억이라고! 230억! 잘했어! 잘했어! 여러분들이 일을 잘해 준 덕분에 생각보다 조건도 썩 나쁘지 않게 계약을 맺었어!”

이화지점 임광식 지점장이 대부계 직원들을 모아 놓고 침을 튀겨가며 칭찬을 거듭한다.

"우리가 잘한 게 아니라, 한성 장원지점 애들이 덜 떨어진 겁니다. 대체 거래처 관리를 어떻게 하면 이렇게 손쉽게 뺏기냔 말이죠."

"거긴 은행 생활이 참 편한가 봐요. 앉아서 놀고 먹어도 아무도 뭐라 안 하는 건지 참······.”

"하하. 다 신라가 업계 1위인 이유가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지점장님. 230억이 아닙니다. 한도를 추가로 늘린 곳들도 있어서 모두 270억입니다.”

“아, 그렇지. 270억이지. 하하하하. 그래서 윗선에서도 이번 성과를 상당히 흡족해하고 있단 말이지. 이거 보여? 금일봉까지 받았다니까. 그 말은, 오늘은 뭐다?”

“회식이요!”

모두가 상당히 격앙되고 고무된 분위기.

왜 아니 그럴까.

이틀 만에 한성은행의 만기 대출 6건을 인터셉트 해온 데다 죄다 굵직굵직한 건들이었고, 심지어 그간 워낙에 뻗대던 곳들이라 조금 더 무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던 참인데, 그렇게 뻗대던 거래처 대표들이 어쩐 일인지 1차로 찔렀던 조건에 죄다 별 군말 없이 계약을 체결해버린 것이다.

‘하긴, 그 정도 조건이면 계약을 안 할 수가 없지.’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거기에 더해서 ‘역시 우리가 일은 잘해’라는 자뻑까지 더해진 수긍.

다만 신학규 과장만은 이게 이렇게 들뜰 일인가 싶다.

정상적인 계약도 아니고, 손해까지 감수하면서 따온 거래들이다. 지점의 수익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앞으로 두고두고 짐덩이가 될지도 모르는 계약들.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까라면 까야 하는 입장에서 윗사람이 지시한 미션을 금일봉을 받을 만큼 제대로 해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니까.

더구나 한성은행에 비해 신라은행은 한 곳에서의 근속 연수가 상당히 짧은 편이다. 임광식 지점장만 해도 내년에는 다른 지점으로 전출을 가게 될 가능성이 높다.

즉, 남겨진 짐덩이를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지점장님. 한우 투뿔도 가능합니까?”

“가능해. 충분히 가능하지! 오늘은 돼지고기랑은 겸상도 안 할 거야! 소만 잡는다!”

“와아!”

문득 하성운 과장이 걸리긴 한다.

‘아마 지금쯤이면 완전 초상집 분위기겠네.’

하지만 어쩌겠는가. 공정한 경쟁은 아니었다고 해도, 결국 전쟁의 모든 영광은 승자의 몫인 것을.

‘오늘은 소 좀 뜯고, 나중에 술이나 한잔 사주지 뭐.’

그런데······ 끝난 줄만 알았던 전쟁이 사실은 끝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불과 3주도 걸리지 않았다.

“과, 과장님! 큰일 났습니다! 일해개발이······ 원청으로부터 기성금 70억을 빼돌려서는 회사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조강진 대표 어딨어?”

“잠적했습니다. 아무래도 이거······ 고의부도 같습니다.”

“무슨······.”

순간 정신이 다 아찔할 정도의 충격.

한성에 묶여 있는 대출금 35억을 대환하고도 15억을 더 추가로 대출했다.

즉, 일해개발에 지급된 총액이 50억이다.

그런데 고작 3주 만에 고의부도라니?

“차, 찾아! 무조건 찾으라고! 아니, 그전에 회사든 자택이든 가서 압류할 수 있는 것부터 죄다 압류하고······ 이게 대체······ 계약을 한 지 얼마나 됐다고······ 고의부도가 말이 되냐고!”

그랬다.

그건 새로운 전쟁의 시작이었다.

고의부도라는, 은행원이라면 정말이지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은 똥 덩어리와의 전쟁.

하지만 그마저도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과장님······ 송진 종합상사에서 파산신청을······.”

줄줄이 터지기 시작했다.

대책이란 것을 세울 수가 없을 정도로.

아니, 아예 업무라는 걸 볼 수가 없을 정도로.

하성운 과장이 떠넘긴 그 똥 덩어리들은 누구 말대로 핵폭탄이었다.

그 핵폭탄이 이화지점을 초토화시키는 것으로 모자라 신라은행 본점마자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일개 지점이 감당할 수 있는 손해가 아니었다.

일개 지점에서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의 사고도 아니었다.

만만한 일개 행원을 상대로 엿 한번 제대로 먹여보겠다고 시작한 치졸한 복수였건만, 그 일개 행원으로 인해 제대로 빅똥을 드신 것이다.

무려 업계 1위의 신라은행이 말이다.

※※※

“하하하하! 이거 똥 잔치로구만! 똥 잔치야!”

유종원 행장의 입에서 대소가 터졌다.

리스크관리 본부장 황경수의 보고 때문이었다.

“정말로 그렇게 되어버렸단 말이지? 하하하하하하!”

정말이지 상큼할 정도로 시원스러운 웃음이다.

“현재는 여섯 건 중 세 곳입니다.”

그 세 곳만으로도 지금 신라은행은 초비상 상태다.

“황 본부장 생각은 어때? 과연 세 곳으로 끝일까?”

“······.”

황경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직 다른 세 곳은 여전히 조짐이 없다.

그러니 다른 때 같았으면 분명 더 이상은 없을 거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터진 세 건도 다 아무 징조 없이 갑자기 터진 일이었다.

지금은 어떤 것도 장담할 수가 없다.

그저 무슨 귀신에라도 홀린 듯한 기분.

사실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긴 했어도 유종원 행장의 지금 기분도 황경수 본부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얼떨떨하다.

분명 제로 퍼센트의 확률이었다.

한 건 정도는 운이 좋아 맞힐 수 있다 쳐도, 무려 세 건이다.

심지어 그 세 건으로도 끝날 것 같지가 않다. 아니, 말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왠지 여섯 건 다 맞춰버릴 것 같은 예감.

“하성운 과장. 이 정도면 정말 신기라도 있는 거 아냐?”

심지어 두 사람의 대화가 채 다 끝나기도 전, MK기업의 고의부도 소식이 들려왔다.

건설 원자재 납품 업체인 MK기업이 분식회계로 그동안 재정 상황을 속여온 것으로도 모자라, 며칠 전 무려 55억 상당의 구리를 넘겨 받은 후 고의부도를 냈다는 것이다.

여섯 건의 대출 중 네 번째였다.

※※※

“내가 승인을 하긴 했지만 말이야.”

박순호 지점장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본다.

MK기업의 부도 소식을 듣고 난 다음이었다.

“대체 어떻게 맞힌 거야?”

나는 ‘뭘 새삼스럽게’라는 표정으로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여튼 하 과장은 은근 의뭉스러운데가 있단 말이지.”

그러고 보면 같은 말을 장서연한테도 들었었다.

“어쨌든 덕분에 똥 한번 거하게 치웠네. 그것들 다 만기 연장했으면 어쩔 뻔했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니까. 그걸 또 신라놈들이 다 받아먹었으니······ 크크크크큭.”

참을 수 없는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거칠게 새어 나온다.

“이제 더는 우리한테 그런 짓거린 못하겠죠.”

“당연하지. 그런 똥을 받아 처먹었는데 또 어떻게 그러겠어? 뭐, 지금은 그럴 정신도 없을 테고. 아마 이화지점 애들, 죄다 살아남기 힘들걸?”

부실 대출의 책임은 무겁다.

아무리 위에서 강요를 한 것이라고 해도, 여신심사부도 걸러내지 못한 것이라고 해도, 이 정도 규모의 사고라면 사태가 진정 되는 대로 지점장은 해고 처분될 테고, 그 아랫사람들도 한직으로 쫓겨날 것이다.

‘신 과장도 단술에서 다시 보긴 힘들 테고.’

그걸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긴 하지만, 누군가 하나는 죽어야 끝나는 싸움이었다.

그 누군가가 내가 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더구나 먼저 싸움을 걸어온 쪽도 신라였고.

그러니 죄책감은 없다.

그저 먼 길 떠나기 전에 술이라도 한잔 할 수 있기를 바랄 뿐.

물론 신 과장이 내 얼굴을 보고 싶어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후 지점장실을 나왔다.

조금은 무거운 마음.

출근 도장도 찍기 전에 지점장실에 들렀다가 나오는 길, 나는 내 자리에서 눈에 익지만 그럼에도 너무도 반가운 광경을 목격했다.

무거웠던 마음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존재.

커피다.

그것도 일곱 잔이나 되는.

심지어 그 중 한잔은 막 강희수 주임이 놓고 가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까지만 해도 가득 찼던 이창주 자리에는 단 한잔도 없다.

이게 얼마 만이던가.

이 영광!

이 우월감!

누를 수 없는 반가움에 절로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다.

그런 날 보며 강희수가 입술을 삐죽이 내밀며 말했다.

“창주씨는 임자 있대요. 정혼자라나 뭐라나······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정혼자가 뭐야, 정혼자가. 우린 임자 있는 사람한텐 돈 안 쓰거든요. 설마······ 하 과장님도 그새 여자친구 생긴 건 아니죠?”

순간, 책상 위에 놓인 일곱 잔의 커피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위를 스쳐 가는 장서연의 사랑스러운 얼굴······.

잠깐의 고민이 있었지만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럼요! 어휴, 여자친구라니, 저 그런 거 없습니다!”

그래. 굳이 여자친구 있다고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닐 필요는 없잖은가?

팔푼이도 아니고.

< 이 영광! 이 우월감!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