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26
“과장님. 여기 커피.”
이창주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내가 출근하는 시간에 맞춰 내게 커피를 대령했다
열심히 배우겠다는 각오와 많이 가르쳐달라는 의미의 뇌물이란다.
‘하긴, 커피가 뭔 죄라고······.’
커피에 귀천을 따지는 것도 우습다.
난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기로 하고 이창주의 커피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제공자는 달라졌지만 여전히 한 잔의 커피와 함께 시작되는 하루.
두 명의 충원으로 한동안 어수선했던 대부계도 안정을 찾았다.
강승준 차장은 성실함을 무기로 빠르게 장원 지점에 적응했고, 귀족가 도련님이라 뻣뻣하고 까칠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이창주도 지점 업무를 빠르게 익혀갔다.
그리고 그 사이, 서후남은 강원도 경포 지점으로 떠났다.
따로 인사는 없었다.
아마 다시 볼 일도 없겠지.
그렇게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니,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지만 장원 지점을 몰아쳤던 폭풍우의 후유증까지 다 사라진 건 아니었다.
“예? 대출을 정리하시겠다구요?”
통화를 하고 있는 이은섭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갑자기 왜······ 잠깐만요, 사장님! 제가 지금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통화를 끊은 이은섭이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이야?”
“그게······ 명신코퍼레이션에서 대출을 정리하겠다고······.”
나는 그 즉시 눈살을 찌푸렸다.
명신코퍼레이션이면 타이어 주요 원료를 구입해 해외로 수출하는 곳이었다. 대출 규모는 120억.
대출 규모도 적지 않지만 더 중요한 건 수출을 기반으로 하는 곳이다 보니 명신코퍼를 통해 이루어지는 외환거래가 연간 수백억이었다.
“대체 왜?”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일단 명신으로 가서 대표님을 만나 뵈려구요.”
짐작이 가는 게 하나가 있긴 하다.
명신코퍼는 서후남이 담당하던 곳이었다.
서후남이 그렇게 되고 이은섭이 임시로 맡고 있었던 만큼, 뭔가 서운한 게 생겼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이젠 책임자가 된 입장에서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은섭씨. 나도 같이 가.”
나는 이은섭과 함께 명신코퍼레이션으로 향했다.
그렇게 급히 차를 몰아 명신에 도착했을 때였다. 마침 회사를 나오고 있는 낯익은 사람과 마주쳤다.
“신 과장님?”
“어? 하 대리, 아니, 이제 하 과장이라 불러야 하나? 하하.”
순간, 난 이번 일이 단순히 관리 소홀로 인한 서운함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내 앞에서 약간의 당황과 조금은 과한 억지웃음을 짓고 있는 사내는, 우리와는 경쟁 관계에 있는 신라은행 이화지점의 신학규 과장이었던 것이다.
“신 과장님이 여긴 왜······?”
“왜긴? 영업 뛰러 왔지.”
당황과 억지웃음도 잠깐, 이내 당당해진다.
엿보이는 자신감.
“아무튼 난 좀 바빠서. 하 대리, 아니, 하 과장, 우리 다음에 한잔하자고. 승진 턱도 쏴야지? 하하.”
그러고는 쌩하니 가버렸다.
그렇게 신학규 과장이 떠나고 난 명신코퍼레이션의 사무실건물을 올려다봤다.
벌써 마음이 무겁다.
아무래도 오늘 일, 잘 풀리지 않을 것 같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 없다니까. 이런다고 달라질 결심이 아니라니까, 글쎄.”
마주 앉은 명신 코퍼레이션의 김명신 대표가 소파에 삐딱하게 걸쳐 앉은 채 천장 모서리를 또 삐딱하게 올려다본다.
“대표님. 혹시 제가 서운하게 해드린 게 있습니까? 그런 거라면 말씀해주세요.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이은섭의 말에 김명신 대표가 천장 모서리를 향했던 시선을 내린다.
팔꿈치는 무릎에 대고, 손등으로 턱을 괸 채 고개는 삐딱하게.
이런 태도를 취하는 건 딱 두 가지 경우다.
돈이 많아졌거나, 돈이 필요 없어졌거나.
“서운한 거? 당연히 있지. 작년에 장원 지점이 우수 외환 거래처로 선정된 거, 그거 누구 때문이야? 우리 명신 덕 안 봤다고 할 수 있어?”
“물론 명신 코퍼레이션 덕분입니다. 작년 명신으로 인한 외환거래가 5천만 불이 넘었으니까요. 그래서 금리도 조정해 드렸고······.”
“금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태도라고 태도. 처음 우리를 담당했던 게 누구야? 전 지점장이야. 근데 한 차장으로 바뀌더니 금방 또 서 대리로 바뀌고. 게다가 이번엔 아예······.”
차마 면전에다 대고 말하긴 뭣했는지 ‘말단 행원’이라는 뒷말은 흐린다.
내가 나섰다.
“이번에 한 차장이랑 서 대리에게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 임시로 은섭씨에게 맡겨진 것뿐입니다. 이제 지점 인원도 충원됐고, 지점장님께 말씀드려 명신코퍼는 앞으로 제가 담당하도록 하겠습니다. 대표님 말씀대로 저희 지점의 외환 실적은 거의 명신이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런 명신을 소홀히 생각할 리가 있겠습니까. 모쪼록 대표님께서 이번만 너그러우신 마음으로 이해해주시면······.”
“됐어. 인간들이 말이야. 꼭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움직이지. 그런 인간들을 어떻게 믿고 같이 일을 해?”
핑계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같이 일을 잘 해왔다.
사실 우리로서도 김명신 대표의 저런 태도에 배신감이 든다.
물론 회사의 잠재력은 컸지만 8년 전 처음 장원지점이랑 거래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회사 규모도 작고 대외 신인도도 낮아 해외 중개 파트너를 통해서야 겨우 거래를 진행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거래조차 남의 이름을 빌려서 해야 했고, 심지어 수익의 절반 가까이를 엄한 데다 가져다 바치는 상황이었다.
그걸 전 지점장이 발 벗고 나서서 나오지 않는 담보대출을 담당 심사역들이랑 거의 싸우다시피 하며 얻어내 주었다. 거기다 회사가 중개업자 거치지 않고 바이어랑 직접 거래를 진행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기까지 했다.
즉, 명신 코퍼레이션이 이만큼이나 성장한 데에는 장원지점의 역할이 결코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무리 고릿적 얘기고 지점장도 그 지점장이 아니라고 해도, 이런 태도는 너무 양아치다.
처음부터 이랬는지, 아니면 성공하고 나서 사람이 바뀐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명신코퍼가 내 담당이 아니었던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
그동안 얼마나 갑질을 당했을지, 서후남이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다.
“대표님. 제가 많이 부족했습니다. 제가······.”
“은섭씨. 그만해.”
이은섭이 어떻게든 마음을 바꿔보려고 매달리려는 것을 막았다.
사정하고, 인정에 호소하고······ 이미 그럴 단계는 지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신라에선 금리를 얼마나 깎아주겠다고 하던가요?”
내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김명신 대표가 움찔한다.
아니나 다를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적어도 양심이라는 건 아직 남아 있는지 발뺌 정도는 한다.
“조금 전에 회사 들어오는 길에 신라은행 신학규 과장을 만났습니다.”
물론 그저 얼굴만 스친 정도일 뿐이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김명신 대표에겐 다르게 들렸을 것이다.
“신라로 옮기기로 얘기가 끝난 모양이더군요.”
넘겨짚기.
“······ 맞아. 그게 뭐?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한성이랑 거래를 끊기로 한 건 어디까지나 당신들 태도 문제라고 태도 문제.”
“알고 있습니다. 저희 지점 사정은 지점 사정일 뿐인데, 대표님을 서운하게 해드린 건 정말 죄송하고 면목이 없습니다. 하지만······ 신라에서 명신코퍼 같은 좋은 회사와 거래를 트는데, 빈손으로 오진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신라에서 어떤 조건을 제시한 지를 알면, 저희도 사죄의 의미를 어느 정도로 생각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기분 같아서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고 싶지만, 적어도 신라 측에서 제시한 조건은 알아내야 한다.
신라보다 더 좋은 조건을 해줄 수도 있다는 내 말뜻을 바로 알아듣고는 솔깃한지 지금까지 내내 시큰둥한 표정이던 김명신 대표가 눈을 반짝인다.
“물론 뭐, 빈손으로 오진 않았지. 0.9% 인하를 제시하긴 하더구만.”
0.9%······ 명신과의 관계, 그리고 그간의 실적 등으로 명신의 대출 금리는 이미 한계점까지 낮춰진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0.9%면 거의 수익을 포기하는 수준.
하지만 김명신 대표의 표정을 보니 그게 다가 아니다.
“금리 말고도 다른 조건이 더 없었습니까? 가령······ 외환거래 수수료를 할인해 준다든지, 환율 우대라든지······.”
이미 한 번 얘기를 해버린 마당이라 김명신 대표는 더 이상 거리낌이 없었다.
“40%를 얘기하더군. 외화 예금 이자도······.”
순간, 난 아예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이건 뭐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대체 이것들 뭐하자는 수작이야?’
이런 식의 경쟁은 제살깎아먹기 식일 뿐이다.
아니, 이건 제살깎아먹기 수준이 아니라 아예 다 같이 죽자는 거다.
지금까지 신라와의 영업 경쟁이 치열하긴 했지만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애초에 이건 실무자의 재량을 완전히 넘어선 수준인 것이다.
“저희 쪽에서도 한 번 더 신중하게 검토해보겠습니다.”
그 말밖에는 하지 못했다.
기다려 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지점장의 결정에 달린 것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될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명신코퍼의 사무실을 나온 나는 곧바로 지점장에게 보고를 올렸다.
당연히 지점장도 황당해하며 화를 냈다.
“이것들 제정신이야?”
그리고 지점장의 결정도 내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안 돼. 한번 계약하면 1, 2년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그 누적된 손해를 다 어떻게 감당하라고? 지점의 외환거래 실적이 반토막 나겠지만, 이건 포기하는 게 맞아.”
그렇게 우리는 8년을 거래해온 명신 코퍼레이션을 포기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사이에 명신과 비슷한 경우가 무려 세 건이 더 발생했다.
명신까지 합쳐 총합이 무려 220억.
긴급하게 책임자 회의가 열렸다.
※※※
“이쯤 되면 작정을 했다고 봐야지?”
지점장이 부지점장과 나, 그리고 강승준 차장을 본다.
내가 물었다.
“다른 지점은 어떻다고 합니까?”
“다른 지점은 괜찮아. 피해를 본 건 우리뿐이야. 하긴, 판을 키우는 건 신라 쪽에서도 감당이 안 될 테니까. 금감원에서도 가만있을 리 없고.”
“돌려막기 건에 대한 보복 차원이겠죠?”
“다른 이유가 없잖아? 나참, 어이가 없어서······ 명색이 리딩뱅크란 것들이 이렇게까지 치졸하게 나오는 게 말이 돼? 게다가 잘못은 지들이 먼저 해놓고 얻다가 화풀이야!”
그 치졸함이 정말이지 나까지 울컥하게 만든다.
부지점장이 물었다.
“위에선 뭐라고 합니까?”
“일단 따로 지시가 있을 때까지 지켜만 보라는군. 거래처들 관리 더 철저히 하고.”
이번에 빠져나간 세 건도 서 대리랑 공 과장이 담당하던 거래처였다.
흔들기 가장 쉬운 곳을 먼저 파고든 것이지만, 다르게 말하면, 나와 이은섭이 줄곧 담당해온 곳은 그만큼 파고들 여지가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상대가 아무리 공격적으로 나와도 관리만 잘 하면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본점에서 다른 지시가 떨어질 때까지, 오늘부터는 비상근무야. 다들 거래처 관리에 총력을 기울이라고. 강 차장도 오늘부터는 거래처 관리에 더 신경 쓰고, 이은섭이랑 이창주한테도 여기 출근 도장 안 찍어도 되니까 부지런히 거래처 돌라 그러고.”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이다.
책임자 회의를 마치고 나온 나는 폰부터 꺼냈다.
그렇게 내가 전화를 거는 곳은 신라은행 이화지점의 신학규 과장이었다.
< 이쯤 되면 작정을 했다고 봐야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