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25
“여긴 강승준 차장. 그리고 여긴 2년 차 이창주 행원. 오늘부터 우리 지점 대부계에서 일하게 됐으니까 우리 지점 업무에 익숙해질 때까지 다들 잘 도와주도록 하고, 강 차장. 부임 인사 한마디 해.”
지점장의 말에 강승준 차장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객장 안에 모여 있는 행원들을 둘러본다.
“대전 흑석동에서 근무하다 이곳으로 부임하게 된 차장 강승준입니다. 워낙에 실적이 좋은 지점이니 KPI니 실적증대니 하는 포부는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저는 원리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원리 원칙을 지키는 것이 종국에는 지점을 위하는 길이며 또한 가장 빠르게 목표한 바를 달성할 수 있는 길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여러분들이 보기에 다소 답답하고 느리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모쪼록 잘 따라와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장원 지점에서 여러분들과 같이 일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짝짝짝짝
박수가 이어졌다.
하지만 뜨거운 환호까지는 아니었다.
말투, 내용, 표정, 심지어 그 생김까지도 원리원칙주의자라는 느낌이 물씬 나는 바람에 새 사람을 맞아 들떴던 분위기가 살짝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지점장에게 듣기로는 그동안 한 차장 후임 인선이 늦어진 이유가 김강철 전무와 조성환 상무 간에 알력 때문이라고 했다.
요즘 워낙 핫한 장원 지점이다 보니 자기 사람을 앉히려는 자존심 대결이 치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유종원 행장이 직접 인선에 관여함으로써 어느 쪽 라인도 아닌, 원리 원칙의 강승준 차장이 선택된 것이다.
아무래도 셀프대출이라는 횡령 사건이 터진 만큼, 후임 인사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그 원리 원칙이 채택되지 않았나 싶다.
“이창주 행원도 인사 한마디 하고.”
“이창주입니다. 본점 영업전략본부에서 근무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짝짝짝짝짝짝짝
이번엔 박수 소리가 좀 컸다.
특히 텔러들 쪽에서 유독 크게 들려왔다.
단지 젊은 행원이라서가 아니다.
체격도 좋고 잘생긴 데다가 어딘지 귀태까지 흘렀다.
‘음, 이제 수신계의 아이돌 자리를 물려줘야 할 때가 온 건가?’
그건 상관없는데, 매일 아침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커피가 더 이상 안 보이게 되면 그건 조금 서운할 것 같다.
그런 와중에 시야에 들어오는 다른 그림 하나.
새 사람을 맞아 들떠 있는 객장 안 분위기와는 사뭇 대조적인 모습의 서후남이다.
인원이 충원되었다는 건 쫓겨나야 할 시간이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렇게 두 사람의 인사가 끝났을 때, 지점장이 날 지점장실로 따로 불렀다.
“이창주 말이야. 하 과장이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쳐봐.”
사수가 되라는 말이다.
“제가요?”
“서 대리도 그 모양이 됐고, 하 과장밖에 없잖아.”
하긴, 동기인 이은섭에게 사수를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긴 하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잘 가르쳐서 하 과장 사람으로 만들 수 있으면 더 좋고.”
“······?”
“이창주, 이성율 한은 전 부총재 손자야.”
“예?”
이성율 전 한국은행 부총재라면 그 자신의 이력도 대단하지만, 심지어 그의 부친은, 즉, 이창주의 증조부는 4년의 임기에 더해서 연임까지 성공해 무려 8년 간 한국은행 총재로 재임했던 이건기 전 한국은행 총재였다.
그야말로 대한민국 최고의 금융귀족가문.
“이창주 집안에 비하면 조성환 상무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지.”
“그런 대단한 귀족가 도련님이 왜 한성에······.”
아직 이력서를 확인하지 않았지만, 영업전략본부에 있었다면 분명 스펙도 상당할 것이다.
“원래는 조부를 따라 한국은행 조사국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했나 본데, 이성열 전 부총재가 먼저 시중은행에서 경험을 쌓는 걸 권했나 보더라고. 그래서 평소 친분이 두터운 우리 행장님한테 손주를 맡긴 거고. 그리고······ 강 차장만이 아니라 이창주의 이번 발령도 행장님 입김이 작용했다는 것 같아. 게다가 자네와 독대를 하고 난 그날 바로 지시가 있었다는 걸 보면, 행장님도 이창주를 자네에게 맡기겠다는 뜻 아니겠어?”
“······.”
“그만큼 행장님이 하 과장을 좋게 봤다는 뜻이기도 할 테고. 아무튼 그러니까 각별히 신경 좀 쓰라고.”
“각별히랄 게 뭐 있습니까? 그래봤자 은행일이 다 거기서 거긴데.”
물론 신경이 쓰이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상전 대접해줄 수는 없지 않은가.
잘못하면 혼내고, 가르칠 게 있으면 가르치면 그 뿐.
내 사람이 되면 확실히 내게도 좋은 일이긴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들 또 어떠랴.
지점장실을 나온 나는 슈트를 걸쳐 입으며 이창주에게 말했다.
“외근 갈 거니까 창주씨도 같이 가지.”
“외근요?”
“거래처 사장님들한테 인사도 드리고 얼굴도 트고 해야지. 그게 제일 먼저야.”
※※※
장원 지점으로 발령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이창주는 사실 기대가 컸다.
아니, 정확히는 하성운이라는 사람에 대한 기대였다.
그의 활약상이야 이제 은행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68억 셀프대출을 밝혀내고, 400억짜리 계약을 따내고, 이번엔 1200억 사기 대출을 막았다.
그런 활약들이 불과 3개월 사이에 모두 일어난 일이어서 화제성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기사가 나기 전부터 본점 내 어느 부서든 그 일들로 연일 떠들썩 했고, 그건 영업전략본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장원 지점으로의 발령 소식을 들었을 때, 하성운 과장이 어떻게 일을 하는지 직접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잔뜩 들떴었다.
그런데······.
‘이 인간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하 과장, 이번에 큰 딸네 집에 여윳돈이 좀 생겼다는데 말이야. 이게 좀 애매한 금액이라 예금으로 돌리기는 좀 그렇고, 뭐 수익률 좋은 상품 같은 거 없을까?”
오래된 동물병원 원장이었다.
“얼만데요?”
“2천 정도?”
“음······ P2P라는 게 있긴 한데요.”
“P2P?”
“쉽게 말해 사람들 돈을 모아서 그걸로 대출을 돌리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대개 은행권에서 대출을 받기 힘든 사람들을 상대로 대출을 진행하는 거라 심사 문턱도 낮고 이자도 높지만, 그만큼 위험성도 높죠. 하지만 요즘은 심사를 꽤 까다롭게 보는 P2P 업체들도 있어서 잘만 고르면 안전성과 수익률 모두 잡을 수도 있습니다.”
‘이 인간 대체 뭘 하는 걸까?’
“제가 보아둔 곳이 하나 있는데, 소개해드릴까요?”
“그래? 그럼 나야 고맙지.”
‘왜 우리 영업전략본부가 밤새 머리를 쥐어 짜내며 만들어 놓은 한성의 좋은 예적금 상품들을 다 내버려두고 P2P 업체를 소개하는 건데? 당신 한성의 은행원이잖아?’
더 어이없는 건 그렇게 거래처를 돌며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걸로도 모자라, 다음날은 다른 은행으로 들어가더니 대출 상품 설명을 듣고 앉았다.
‘예. 이건 우정대출이라는 상품인데요······.’ 라는 말로 시작되는 대출 상품을 신중히 들으며 이것저것 질문도 해대더니 대뜸 신청까지 해 버린다.
황당하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해서 물었다.
“대체 남의 은행 대출은 왜 신청하신 겁니까?”
“설명을 들어보니까 단기 기획상품이긴 한데 우리 것보다 좋더라고.”
“고작 이자 몇 푼 덜 내려고 다른 은행에서 대출을 신청했다구요?”
“대부계에 있다 보면 대출 관련해서 경험과 경륜이 우리보다 높은 사람들이 태반이야. 그런 사람들을 상대하려면 대출 용어 몇 개 더 아는 거로는 힘들어. 이건 어디까지나 내 경험이지만, 내가 직접 대출을 받아서 그 마음이 되어보는 게 그분들에게서 공감과 신뢰를 얻는데 훨씬 더 효과적이더라고. 창주씨도 괜찮은 대출 상품 하나 찾아서 한 번 받아봐. 물론 부담 안 되는 선에서. 아마 고객 응대도 응대지만, 대출 상품 발굴하는데도 꽤 도움이 될 걸?”
잘 모르겠다.
“그건 그렇다 쳐도, 어제 P2P 건은요? 좋은 우리 상품 다 냅두고 P2P 따위를 추천한 건 거의 직무유기 아닙니까?”
“뭘 직무유기씩이나······ 그저 솔직한 거지. 신뢰란 건 그 솔직함에서 비롯되는 거고. 당장 고객의 돈이 욕심나서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숨기고 기만하면, 내가 그 고객들한테 당당할 수 없고, 또 그런 건 표정에서도 다 드러나기 마련이거든. 돈이란 게 사람을 참 예민하게 만들어서 내가 켕기는 게 있으면 결국엔 그걸 또 고객들은 다 알아차린단 말이지. 그리고 그런 것에서부터 신뢰는 금이 가는 거고.”
이번에도 잘 모르겠다.
아니, 아예 납득이 안 된다.
어차피 거래처야 예금은 0.1프로라도 더 많이 주는 곳으로 가고, 대출은 0.1프로라도 적게 내는 곳으로 가는 것 아닌가?
그래서 그가 본점에서 그렇게 골머리를 싸매며 상품을 만들어온 것이고.
‘도대체가 솔직함이 밥 먹여주냔 말이지.’
그런데 그로부터 일주일 후였다.
그 솔직함이 정말 밥을 먹여줬다.
“하 과장. 이번에 큰아들네가 편의점 점포 하나를 정리했거든. 그래서 목돈이 좀 생겼는데, 당분간 쓸 일이 없을 것 같다고 하네. 어디 맡길만한 곳 없을까? P2P 같은 거 말고, 좀 안전한 데로.”
“액수가 얼마나 되는데요?”
“2억 쫌 넘어.”
“음······ 요즘 예금 이자율도 꽤 좋은 편이에요. 그 정도 금액이면 주은은행 예금 상품이 아마 이자가 제일 높을 겁니다.”
“예금? 예금이 이자가 높아 봐야 거기서 거기지. 그냥 하 과장이 한성에 괜찮은 걸로 예금 계좌 하나 열어줘. 그래야 나도 안심이 되고.”
2억짜리 예금하나가 그렇게 간단히 만들어졌다.
그 대수롭지 않게 오가는 대화가 이창주에겐 충격이었다.
고민 한 번 없었다.
얼마나 이자 차이가 나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듯이 2억이란 거금을 하성운 과장에게 맡겨버렸다.
"······."
그의 안에서 뭔가가 부서지는 느낌.
0.1프로를 만들기 위해 골머리를 싸맸던 지난 날들이 허탈하다.
0.01프로에 환호하며 숫자에만 매몰되었던 지난 날의 자신이 바보 같다.
조부님이 왜 한국은행이 아닌, 시중은행에서 먼저 경험을 쌓으라 했는지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현장에는, 영업점에는 은행원으로서 아직 배워야 할 것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뭐해? 안 갈 거야?”
하 과장이 성큼 앞서가며 그를 부른다.
이 순간, 그 등이 왠지 더 커 보이는 건 착각일까?
"아직 들를 데 많아. 얼른 와."
“갑니다! 가요!”
이창주가 그 등을 힘차게 쫓았다.
※※※
“음······.”
잠시 거래처에 들렀다 출근하는 길.
그런 내 눈에 이창주의 책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커피들이 보였다.
예상은 했지만, 확인 사살 당한 기분.
‘그래. 이제 진짜 내 시대는 끝난 거야.’
밀려 드는 서운함.
하지만 기운 빠진 걸음으로 터벅터벅 걸어 내 자리에 도착한 나는 순간 헤벌쭉 웃었다.
정성스레 내려진 드립 커피가 오늘도 어김없이 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래. 나 아직 안 죽었어!’
그런데······.
“어? 과장님. 이제 출근하셨어요? 커피 드세요. 방금 내린 거라 아직 따뜻할 겁니다.”
“······.”
이창주였다.
“왜 그러세요? 과장님 표정이······ 어디 불편하세요?”
“······.”
< 나 아직 안 죽었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