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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24화 (24/50)

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24

“예. 지점장님. 그럼 오늘은 여기서 바로 퇴근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인터뷰가 길어지는 바람에 벌써 퇴근 시간이 다 되었다.

그렇게 행장실을 나오는 길.

‘오늘의 이 신세는 내 꼭 갚겠네.’

조금 전 행장이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쳐 지난다.

그냥 하는 빈말일 테지만, 그래도 언젠가 그 약속 꼭 받아내고 싶다.

하긴, 그게 아니더라도, 얼굴 좀 팔리고 1억이면 수지맞은 장사긴 하다.

혹시, 도깨비라도 왔다 간 걸까?

부신이 씐 건지, 요즘 뻑하면 1억이다.

예전 같았으면 포상금이 1억인 걸 확인하는 순간 눈이 돌아갔을 텐데, 행장 연임 선언에 더 충격을 받은 걸 보면 내가 요즘 배가 부르긴 불렀나 보다.

아무튼 그렇게 행장실을 나온 나는 문득 이관우가 생각나서 리스크관리팀을 찾아갔다.

“네가 여긴 무슨 일이야?”

내 전화를 받고 관리팀 사무실을 나온 이관우가 의아히 묻는다.

“무슨 일이긴, 너 보려고 왔지.”

“아니, 본점엔 무슨 일이냐고.”

“행장님 만나러.”

“뭐?”

“행장님이 이 몸을 하도 보고 싶어 하셔서 독대 좀 해드리고 왔지.”

“······ 이번 돌려막기 막은 거, 포상이라도 하신 거냐?”

리스크관리팀이니 이미 이 사건에 대해선 빠삭하다.

“흐흐흐흐.”

“······ 그 재수 없는 웃음은 뭔데? 또 특진은 아니겠지? 에이, 그건 아니겠지. 아무리 큰 공을 세웠다고 해도 그렇지, 연차가 있는데······ 설마······ 진짜냐?”

“당연히 아니지.”

“휴우······.”

“그 안도는 뭐냐? 친구 잘되는 게 그렇게 배 아프냐?”

“그럼 배 안 아프겠냐? 내가 똥 귀저기 갈아주며 키운 녀석이 내 머리 꼭대기 위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그래? 뭐, 네가 그렇게 우정 따위 밥 말아 드시겠다면, 나도 그에 걸맞게 에티튜드를 수정할 수밖에. 먼저 호칭 정리부터 하자고. 어이, 이 대리.”

“······.”

“상관이 부르는데 대답 안 해?”

“······ 우와! 내 친구 하씨! 행장님과 독대도 다 하고! 우와 출세했네. 출세했어. 우리 하씨, 이 엉아는 진심으로 기뻐. 기뻐서 막 눈물이 다 날라 그래. 역시 이래서 친구가 좋은가 봐. 어떻게 이렇게 하나도 질투가 안 나고 막 내 일처럼 기쁜지 참······.”

“태세 전환 너무 빠른 거 아냐?”

“두 딸의 아빠니까.”

“그동안 꽤 고달팠나보군.”

“고달프긴! 천상의 행복이 따로 없지.”

“근데 왜 질질 짜고 있냐?”

“질질 짜다니? 내가 언제······ 어? 왜 눈물이······ 아, 이건 방금도 말했다시피 내 친구 하씨의 승승장구가 내 일처럼 기뻐서······.”

“그래. 그래. 뭐, 그렇다 치고. 곧 퇴근이지?”

“왜? 아, 잠깐! 특진이 아니면 포상금? 행장님께 포상금 받은 거야? 얼만데?”

어차피 곧 기사를 통해 알게 될 일이니 숨길 필요도 없다.

“1억.”

“뭐?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인마! 우리 한성에서 포상금 1억이 지급된 역사가 없는······.”

농담 같지도 않다며 버럭 하던 이관우가 순간 감전이라도 된 듯이 뚝 멈췄다.

내가 1억 원짜리 수표를 꺼내 들어 녀석의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어 댔기 때문이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는 급히 수표를 빼앗아 든다.

“이, 이거······ 진짜야? 위조 아니고?”

“인마. 여기 은행이거든?”

“그럼 이게 진짜라고? 포상금으로 진짜 1억을 받은 거라고?”

“그렇다니까.”

“······.”

1억짜리 수표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는 이관우의 표정은 수시로 변했다. 그러다 버럭 소리쳤다.

“젠장! 내가 당장 내일 전출 신청하고 만다! 나도 영업점에서 뛸 거라고!”

전세대출금에 애들 분유값에, 처가 친가 부모님들 용돈까지, 아주 등골이 휘는 이관우에겐 어쩌면 당장 눈앞에 이 1억은 특진보다도 더 부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 이런 반응이 정상이지.’

직장인에게 1억이라면 이 정도 리액션은 나와줘야 하는 돈인데, 역시 이제 평범한 직장인은 될 수 없나 보다. 하긴, 은행장 앞에서도 별로 꿀리는 마음이 안 드는 것부터가 이미 평범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포상금 받았다고, 한턱 쏘려고 온 거야?”

한참을 광분하던 이관우가 뭔가 배알이 꼴린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그렇게 묻는다. 아니, 그건 차라리 먹이를 발견한 사흘 굶은 맹수의 그것과 비슷했다.

이글거리는 눈빛만 보면 오늘 아주 1억을 다 뽑아먹을 기세다.

※※※

안타깝게도 이관우의 바람은 실현되지 않았다.

난 한턱을 쏜 게 아니라 오히려 녀석의 집으로 쳐들어가 밥 한 상을 거하게 얻어먹었으니까.

물론 밥값은 했다.

분유며 기저귀며 들어올 때 이미 바리바리 싸 들고 들어온 데다, 제수씨, 그러니까 내 대학 후배이기도 한 선아에게 상품권도 몇 장 쥐여줬으니까.

‘선배. 뭘 이런 걸 다······.’라고 하면서도 그야말로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냉큼 주머니에 챙겨 넣으며 호호호호 거리던 선아의 모습이 조금 공포스럽기도 했고, 그래서인지, ‘나 전출 신청 내면 선아가 나 죽일 거래.’라며 너무도 간단히 꿈을 접어버린 이관우의 태도가 바로 납득이 되기도 했다.

어쨌든 그렇게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고 이틀이 더 지났을 때였다.

유종원 행장의 옆에서 1억 원 포상금 피켓을 든 내 사진이 떡하니 국내 최대 포탈의 메인 화면에 떴다.

[1200억 사기 대출 피해, 어떻게 막았나? 1억원 포상금의 주인공 한성은행 하성운 과장, 1200억 사기 대출 사건의 전말을 공개하다!]

어그로 끌기 딱 좋은 타이틀.

내용도 사실에 기반하긴 했지만, 크게 문제가 안 될 정도의 MSG와 신라은행을 거대악이라고 표현하는 등, 상당히 공격적인 단어 선택으로 누리꾼들을 자극시켰다.

아니나 다를까, 유 행장의 의도는 정확히 적중해 신라은행은 다시금 여론의 포화를 맞아야 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내 전화는 아주 불이 났다.

“어이, 하 과장. 방금 기사 봤어. 자네 이번에 아주 큰일을 해냈더구만. 나도 뉴스는 봤었는데 그게 하 과장 작품이었다니, 대단하구만. 대단해. 하 과장이 뭘 해도 할 사람인 거, 내가 딱 알아봤다니까. 하하.”

그렇게 1200억 사기 대출을 막은 것에 대해 자기 일처럼 뿌듯해하는 거래처 사장님들부터 1억 포상금에 한턱 쏘라는 전화.

개중에는 이런 인터뷰까지 했을 줄은 몰랐던 이관우의 짓궂은 놀림도 있었고, 동생 주은이도 기사를 보고 신기해 했다.

듣기 좋은 말도 한두 번이랬다고, 이젠 폰 진동 소리만 들어도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

그래도······ 그런 와중에도 인터뷰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전화가 있었다.

“성운아. 이게 다 무슨 일이래니? 주은이가 말해줘서 이제야 알았어. 어휴, 잘했다. 잘했어. 네가 큰일을 했네.”

어머니의 전화.

“아버지는요?”

“말도 마. 그 기사 보고 나서 동네방네 자랑하러 다니느라 바빠. 저번에 네가 사준 차도 그렇게 온 동네에 자랑을 하더니······ 요즘은 네 자랑하는 게 낙인 양반이라니까.”

“아버지도 참······ 조만간 주은이랑 같이 한번 내려갈게요. 멀지도 않은데 시간 내는 게 잘 안 되네요.”

“아냐. 그러지 마. 둘 다 회사일 하느라 바쁜데 뭐하러. 추석에 내려오면 되지. 아무튼, 잘했어. 우리 아들 장해. 누구 아들인지, 어쩜 이렇게 인물도 훤한지.”

“누구 아들은요. 엄마 아들이지. 다 우리 김화리 여사께서 잘 낳아주신 덕분입니다.”

“그렇지? 내가 생각해도 쫌 그런 거 같아.”

이젠 걱정을 완전히 놓으시고 이렇게 편하게 농담도 하신다.

그렇게 어머니와 통화를 끝냈다.

어머니의 뿌듯해하시는 목소리.

동네방네 내 자랑으로 바쁘시다는 아버지.

그것만으로도 마지못해 한 인터뷰가, 그로 인해 내가 치러야 하는 번거로움들이 전혀 아무렇지 않은 것이 된다.

마음이 몽글몽글.

부모님의 목소리에는 참 신기한 힘이 있다.

그리고 인터뷰하길 잘했다는 정도는 아니지만, 같은 내용인데도 그저 반가운 전화도 있다.

“하 과장님? 저 장서연이에요.”

“서연씨. 무슨 일이세요?”

“엄마랑 같이 병원에 외래 갔다가 이제 기사를 봤어요.”

“아······ 사모님은 좀 어떠세요?”

“다 괜찮대요. 잘 회복되고 있대요.”

“다행이네요.”

“근데 기사 보고 정말 놀랐어요. 그런 일이 있었으면서 왜 아무 말도 안 하셨어요? 하여튼, 가만 보면 은근 의뭉스러운 데가 있으시다니까.”

“제가 그런가요?”

“예! 완전요! 근데 포상금이 엄청나던데요? 한턱 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놈의 한턱 소리 참 지겹기도 하건만 장서연이 하는 한턱은 왜 이리 기분이 유쾌한지 모르겠다.

“당연히 한턱 쏴야죠. 뭐 드시고 싶으세요?”

“고기요.”

“또요?”

“떼 낸 콩팥을 한우 투뿔로 꽉꽉 채워주신 댔잖아요. 그거 다 안 찼나 봐요. 아직 많이 허해요.”

“하하. 알겠습니다. 이번엔 정말 제대로 알차게 가득가득 채워드리겠습니다. 언제 시간 되세요?”

“전 오늘도 괜찮아요.”

“그럼 저녁에 댁으로 모시러 가겠습니다.”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끊고 나서도 남아있는 여운.

가슴을 맴도는 기분 좋은 설렘.

서로 간에 이런저런 사정으로 자주 만나지도 못했고, 통화도 그렇게 빈번히 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가끔 듣게 되는 목소리가 나를 들뜨게 한다.

오랜만에 가져보는 호감 이상의 감정.

난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바로 차를 몰아 장서연의 집으로 갔다.

장서연이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스가 달린 하얀색 블라우스에 금빛 꽃자수가 수놓아진 치마.

러블리한 오피스 룩 차림이다.

워낙에 늘씬한 체형이라 뭘 입어도 잘 어울리지만, 자신이 뭘 입어야 더욱 잘 어울리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거기에 과하지 않은 화장, 은은하게 풍겨오는 체취, 그리고 살포시 그어 올라가는 시원한 입매와 그윽하게 들어오는 시선까지.

‘이러다 남 신장 채워주기 전에 내 심장이 먼저 터지겠네.’

나는 애써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차 문을 열었다.

“타세요. 이번엔 소갈비집으로 모시겠습니다. 그 집 양념이 아주 일품이랍니다.”

“오늘은 그런데 말고 다른 데 가요.”

“다른데요?”

“우리 그냥 돼지고기 먹어요.”

“왜요? 혹시 부담스러워서 그러신 거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 상금 빵빵하게 받은 거 아시잖아요.”

“그런데는 좀 접대 느낌이 들어서요. 성운씨는 은행원이시고 전 거래처 사장 딸이고······ 그래서 이젠 그냥 편한 자리에서 편하게 먹고 싶어요. 그편이 좀 더 데이트하는 기분도 들 것 같고. 우리 데이트 하는 거잖아요?”

“······.”

빤히 던져오는 눈빛에 또 한 번 심쿵.

어느새 호칭도 하 과장님이 아닌 성운씨로 바뀌었다.

그러고 보면 항상 이렇게 훅 들어오는 건 장서연이다.

수술 후 면회 갔을 때 먼저 밥 사달라고 한 것도, 오늘 한턱 쏘라고 한 것도, 그리고 지금 우리의 애매한 관계를 간단히 정리해버린 것도.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데이트죠. 당연히 데이트입니다. 그럼 우리 가까운 실내포차나 찾아볼까요?”

“좋아요!”

그렇게 우리의 첫 데이트 장소는 실내포차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마침내 우리 대부계로 두 명의 인원이 충원되었다.

< 우리 그냥 돼지고기 먹어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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