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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23화 (23/50)

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23

“하하하하. 행장님과 독대라니, 나도 아직 못 해본 걸 하 과장이 다 하는구만.”

지점장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자기 일처럼 좋아한다.

요즘 지점장은 텐션이 꽤 업이 된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SC 대출 건 관련해서 사전에 미리 걸러내지 못한 것에 대해 책임 추궁이 있을 수도 있었다.

사건이 다 마무리 된 다음에도 그래서 늘 한숨을 달고 살며 노심초사하던 지점장이다.

그런데 막상 임원 회의에서는 지점장에 대한 책임을 묻기는커녕, 적절한 대처로 지급일을 미룬 것에 대한 칭찬과 찬사만 이어졌다고 한다.

건의한 건 나였다고 해도 결국 판단과 결정은 지점장의 몫이었기에 마땅히 받을 만한 찬사다.

물론 그렇게 분위기가 급전환된 대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당연하게도 김강철 전무의 입김.

하지만 임원 회의의 분위기를 가장 크게 좌우한 것은 지점장의 그 적절한 대처로 인해 수백억에 이르는 똥을 피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리딩뱅크를 자처하는 업계 1위 신라은행에게 빅엿을 먹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신라에서 한성으로 갈아타는 고객들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한성은행은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이런 기세라면 드디어 신라은행과의 리딩뱅크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역사적인 희망이 전반적으로 임원 회의의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이끌었던 것이다.

“근데 무슨 일로 저를 부르시는 걸까요?”

“당연한 거 아냐? 이번 일에 대한 포상이지.”

“포상이라면요?”

“특진도 충분히 가능한 공로긴 하지만, 특진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데다 연차도 연차니 그건 아닐 테고······ 금일봉 정도 주시지 않겠어?”

“금일봉이요? 금일봉이면 얼마나?”

“······ 하하. 돈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돈이. 행장님께 직접 받는다는 게 중요한 거지. 이번 임기만 끝나면 정부든 금융그룹이든 주요 요직으로 영전하실 텐데, 그런 분한테 눈도장 제대로 찍어 놓으면 그깟 포상금이 문제가 아니라고.”

음······ 얼버무리는 걸 보니 회식비 정도 주나 보다.

‘하긴, 은행이란 데가 다 그렇지 뭐.’

어차피 기대도 안 했다.

돈다발 기대할 거였으면 증권사를 갔을 테니까.

물론 내 학력에 돈다발 주는 증권사가 가당키나 하랴마는.

“아무튼 너무 긴장하지 말고. 평소 하던 대로. 응? 평소 하던 대로만 해. 그럼 돼.”

누가 보면 맞선이라도 보러 가는 줄 알겠다.

약간 긴장이 되긴 한다.

“후우······.”

숨을 길게 내쉬며 긴장을 털어냈다.

지점장실을 나왔다.

그런 내 눈에 예금 창구에서 보험 설명을 하고 있는 서후남의 뒷모습이 보였다.

생기가 다 빠져나간 듯 축 쳐진 어깨.

신라를 잡을 수 있다는 희망에 한껏 고무되어 있는 한성이지만, 그 희망들은 서후남과는 완전히 별개의 것이었다.

그에겐 지점장처럼 그를 비호 해 줄 라인도 없거니와, 과를 상쇄시켜 줄 만한 공을 세운 것도 없으니까.

오히려 1200억 대출을 진행시키는 과정에서 박성동과 공모를 하거나 뒷돈을 받은 건 없는지 현재 내사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무죄로 밝혀지더라도 의심과 꼬리표는 사라지지 않는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지점장에게 듣기로는 강원도 쪽이 될 거라고 했다.

어느 곳으로 좌천이 되든 사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입맛이 살짝 씁쓸하긴 했지만, 어차피 자업자득.

난 이내 걸음을 돌려 지점을 나섰다.

※※※

“어서 오게. 자네가 하성운 과장이로구만. 우리 한성을 살린 그 소문의 주인공!”

그렇게 격하게 나를 반기는 사람.

반백의 머리에 안경을 꼈고, 호리호리한 체격에 키는 178정도.

한성은행 행장 유종원이다.

이쪽 계통에선 그야말로 전설적인 인물이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세 번의 사시 실패 후, 집안의 생계를 위해 조화은행에 입사. IMF여파로 은행이 합병을 거치는 과정에서도 승승장구하며 기업금융 실무부터 영업, 여신심사, 경영기획 등, 은행의 거의 모든 분야를 두루두루 섭렵한, 간단히 말해 김강철 전무의 최종진화형 같은 사람이다.

특히 영업 쪽으로는 자타공인 첫 손에 꼽힐 정도의 수완가로 알려져 있었다.

“장원지점 하성운 과장입니다!”

은행장실이 주는 위압감 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몸이 경직되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그래그래. 워낙에 요즘 활약이 대단하다길래 그렇잖아도 한 번 불러서 얼굴이나 볼까 했더니, 그런 엄청난 사고까지 막아 내고······ 대체 어떻게 안 거야? 여신협의회에서도 못 찾아낸 걸······.”

조금은 호들갑스럽기까지 한 유종원 행장의 말은, 마침 들어온 여비서로 인해 더 이어지지 못했다.

“차는 뭘로 준비할까요?”

“아, 그렇지.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하 과장. 일단 앉게.”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느낌.

순하면서도 어딘지 묵직한 느낌을 주던 김강철 전무와는 달리 마냥 가벼운 느낌.

당연히 그게 다는 아닐 것이다.

그야말로 한 시대를 풍미해온 사내가 아닌가.

업계 3위도 간당간당하던 한성을 임기 4년 만에 업계 1위인 신라은행의 턱밑까지 끌어올린 것도 바로 이 사람이었다.

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로 소파에 앉았다.

“차는 뭐로 할 텐가?”

“그냥 믹스커피면 됩니다.”

“그래? 하하. 나랑 커피 취향도 똑같고. 암! 커피 하면 당연히 믹스커피지.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 맛을 모른다니까.”

그렇게 커피를 준비하러 비서가 나가고, 유 행장이 다시 묻는다.

“횡령 사실은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건가?”

마치 영웅의 무용담을 듣길 바라는 어린아이 같은 눈빛.

좀 부담스럽다.

“그냥 거래처 사장님들이 도움을 주셨습니다.”

“인맥을 동원한 거다?”

“예.”

“하긴, 서류 백날 파봤자 사람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말보다 못한 경우가 태반이지. 근데 그 전에 돌려막기일 거라는 건 어떻게 알고 지급을 미루라고 한 건가?”

“그건······ 거래처 사장님을 통해 박성동 대표란 사람이 좀 문제가 있다는 얘기도 들었고, 무엇보다 감이 안 좋았습니다.”

“감?”

“그날 본 박성동 대표의 표정이나 말투, 반응 같은 게 좀 미심쩍게 보여서······.”

“고작 그런 걸로 1200억짜리 계약을 미루게 했다고?”

“예.”

“허! 사람이 무모한 건지 배포가 큰 건지······.”

“1200억짜리 계약이었으니까요. 찝찝함 같은 걸 남겨두고 진행할 만한 계약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 찝찝함이 420억을 지킨 거로군. 아니지. 앞으로 신라은행이 치러야 할 대가와 그로 인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기대 수익을 생각하면, 자네의 감은 그보다 훨씬 비싼 값이겠군.”

갑자기 목소리가 뜨거워졌다.

분위기도 사뭇 진지해졌다.

“어디 그뿐인가. 그 감이 한성의 명예를 지켜 냈고, 한성에게 신라를 이길 수 있는 기회까지 만들어 줬어. 자네의 그 감이 말이지. 참 대단한 감이 아닌가 말이야.”

나야 그저 둘러댄 말일 뿐이지만, 유 행장은 연신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조금 과할 정도의 감탄사를 연발한다.

그 사이 믹스커피 두 잔이, 나와 유 행장 앞에 놓여졌다.

그때, 유 행장이 자리에서 일어서 자신의 책상 서랍을 뒤지더니 하얀 봉투 하나를 꺼낸다.

“자네가 지켜 낸 것들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이게 내가 한성을 대표해서 자네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이고 마음이네.”

포상금이다.

봉투를 건네받았다.

“확인해 보게.”

여기서 바로 확인하랄 줄은 몰라서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개의치 않고 봉투를 열었다.

지점장에게 들은 게 있던 터라, 별 기대 없었다.

상품권 몇 장?

아니면 5만 원짜리 몇 장?

봉투도 가볍다.

그런데, 막상 그걸 열어본 나는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딱 한 장이지만 5만 원짜리가 아니었다.

[₩100,000,000 (금일억원정)]

공이 여덟 개가 있는 일억원 짜리 수표였다.

‘1억······ 이라고?’

그 생각지도 못했던 액수에 얼떨떨해 있는 사이 유 행장이 말을 이었다.

“마음은 이걸로도 부족하다 싶지만, 은행 규정상 포상금은 최대가 1억이라서 말이지. 아무튼 이번 일로 내가 깨달은 게 참 많아. 지난 4년 동안 나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이 한성에는 내가 손 봐야 할 곳이 많더란 말이지. 일단 타성에 젖어서 서류만 뒤적대고 있는 여신협의회부터 손을 봐야겠고······ 그래서 말인데, 한 번 더 연임을 해야겠어.”

1억이란 돈에 잠시 얼이 빠져 있던 난, 유 행장의 마지막 말에 거의 시간이 멈춘 듯이 굳어버렸다.

연임이라니?

부임 후 2년, 그리고 1년씩 두 차례의 재신임으로 총 4년.

그렇게 이미 3연임이다.

시중은행이 대게 그렇듯 행장 연임 횟수에 제한이 없긴 하지만, 또한 3연임 이상은 하지 않는 게 관례였다. 특히 한성은행의 경우 지금껏 4연임은 아예 전례가 없었다.

당연히 유 행장도 이번이 마지막 임기일 거라고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4연임에 도전하겠다니?

김강철 전무는? 조성환 상무는?

그들이랑은 이미 얘기가 된 건가?

아니면, 이 엄청난 얘기를 나한테 처음하는 거? 아니, 왜?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좀 도와줄 일이 있네.”

“제가요?”

“현재 신라은행에 대한 여론이 시들해지고 있는 건 자네도 알지?”

“예. 여론이라는 게 당장 자기한테 손해나는 일 아니면 빨리 식기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다시 불을 지펴야겠어. 그러자면 자네 인터뷰가 좀 필요해.”

“······?”

“대중들이 신라은행에 가장 크게 분노하는 건 부실 대출이 아니라 돌려막기를 방조한 혐의거든. 정직, 신뢰, 책임······ 은행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들을 철저하게 외면한 사건이니까.”

부실 대출이야 개인의 일탈일 뿐이지만, 돌려막기는 다분히 고의적인, 그야말로 양아치 짓이다. 대중이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닌 것이다.

“1억의 포상금으로 여론의 시선을 모은 다음 돌려막기를 막은 영웅의 인터뷰라면 꽤 효과가 있지 않겠나?”

1억이라는 돈 자체로는 대중의 시선을 끌기는 어렵다.

하지만 포상금이란 타이틀의 1억은 충분히 세간의 관심을 모을 만한 금액이다. 거기에 업계 1위 시중은행을 엿 먹인 은행원의 영웅담까지 더해진다면?

거기에 또 MSG까지 팍팍 쳐서 나올 테고.

적어도 누리꾼들의 관심이 다시 모아지긴 할 것 같다.

“뭐, 인터뷰를 하는 김에 나와 사진도 찍고, 내 연임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해주면 더 고맙겠고.”

히죽 장난스럽게 웃으며 농담처럼 던지는 한 마디.

물론 전혀 농담이 아니겠지.

그제야 나는 유 행장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었다

더불어 회식비 정도로 끝났어야 할 포상금이 1억으로 부풀려진 이유도.

물론 신라은행에 대한 여론 불지피기가 가장 큰 목적이었을 것이다.

1억이라는 돈도 여론의 이목을 끌기 위한 수단인 것도 맞다. 단지 겸사겸사 다른 목적이 더해진 것일 뿐.

즉, 1억이라는 파격적인 포상금으로 자신은 그 전의 고리타분한 행장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어필하고, 동시에 지금 한성은행 내에서 가장 핫한 인물인 나를 통해 4연임 발표를 함으로써 홍보 효과까지 톡톡히 보겠다는 의도.

‘금융계 최고의 수완가라더니······.’

그 말이 조금 이해가 가기도 한다.

“어쩌겠나? 물론 강요는 아니네만, 난 자네가 우리 한성을, 그리고 나를 좀 도와줬으면 싶군.”

강요다.

완전 강요다.

행장의 말인데 일개 행원이 무슨 수로 거절을 하겠는가.

까라면 까야지.

“······ 예. 제가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하! 고맙네. 내가 하 과장이라면 그렇게 화끈하게 허락할 줄 알았다니까.”

나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게다가 ‘화끈하게 허락’까지는 아니지 않나?

“들어와.”

내 그 화끈한 허락이 떨어지자 마자 유 행장이 밖을 향해 외쳤고,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일단의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 들어왔다.

순간, 내 눈을 사로잡는 카메라, 마이크, 그리고 스포츠 올스타전 같은 데서 MVP선수들이나 받아들 것 같은, 1억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는 커다란 피켓까지.

“이게 무슨······.”

인터뷰라고 했지만 이렇게 거창하게 하는 건 줄은 생각도 못했다.

“우리 홍보팀이네. 일단 사진부터 찍지.”

그러고는 성큼 벽으로 가서 선다.

“하 과장도 어서 이리로 와. 주인공이 가운데서 상금 피켓을 딱 들고 있어야 그림이 나오지.”

“······.”

“어서 오라니까. 인터뷰도 따려면 바빠요. 바빠.”

“······.”

“이번에 행장님께서 4연임에 도전하시기로 하셨는데, 하성운 과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짜여진 멘트.

난 유 행장을 보았다.

함박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무언의 압박.

하아······.

“······ 지난 4년 동안 행장님이 우리 한성을 잘 이끌어주신 덕분에 지금의 한성이 있는 거라 생각합니다. 행장님이 조금 더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면 모두의 염원대로 분명 한성은 리딩뱅크로의 도약이 가능할 거라 믿습니다.”

내 대답에 행장이 아주 흡족한 미소를 얼굴에 띄운다.

하아······.

까라면 까야지.

그나저나 이거 이러다 김강철 전무한테 밉보이는 거 아냐?

아니, 그런 거야 상관 없지만······ 당장 전국에 얼굴 팔리는 건 어쩔 거냐고!

< 까라면 까야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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