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21
작달막한 키, 동네 할아버지 같은 친숙하고 후덕한 인상, 선한 눈, 사람 좋은 웃음, 시원하게 벗겨진 민머리마저 친근하게 다가온다.
SC종합건설 대표 박성동.
지점장마저 속아넘어간 게 이해가 된다.
저런 인상으로 진정을 호소하면 누군들 믿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흔히 사기꾼들이 말하는 탈이 좋은 얼굴.
그렇게 새삼스러운 눈으로 박성동을 살피는 중에도 난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기업회생절차 진행.
그 단편적인 정보만으로는 이 작자가 뭘 원하는 건지, 어떤 상황인지, 기업회생절차가 왜 진행되는지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협의회의 승인까지 떨어진 이 대환 대출을 막을 명분도 없다.
“그럼 박 지점장님. 잘 부탁합니다.”
박성동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지점장에게 악수를 청한다.
“예. 상환은 내일 중으로 이루어질 겁니다.”
“그래요. 그래. 그간 박 지점장님이 수고가 많았습니다.”
그 손을 꽉 맞잡는 것으로 계약의 마침표가 찍혔다.
“서 대리. 서 대리도 참 고생이 많았어. 나 마음 안 바꾼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을 해도 내가 화장실 가는 것까지 따라오더라니까. 하여튼 일 하나는 똑 부러지게 하는 친구야.”
“그동안 본의 아니게 귀찮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아냐. 그 정도 책임감은 당연히 있어야지. 나중에 은행일 지겨워지면 우리 SC로 와. 내가 좋은 자리 하나 마련해줄 테니까. 하긴, 한성이 이런 인재를 쉽게 놓아줄 리가 없나? 허허허.”
그렇게 웃으며 서 대리의 어깨를 토닥여주자, 가뜩이나 잔뜩 기가 살아 있던 서후남의 어깨 뽕이 아예 천정을 뚫어 버릴 기세다.
서후남 인생에서 어쩌면 오늘이 가장 기억될 날이 될지도 모르겠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물론 나쁜 쪽으로 기억될 가능성이 다분히 더 높지만 말이다.
난 계약을 마치고 돌아가려는 박성동을 붙잡았다.
“대표님.”
“응?”
“저희랑 이렇게 큰 계약도 맺으신 김에 가계 대출하나 더 하시는 건 어떤가 해서요. 심사도 딱히 필요 없고, 서류만 준비해오시면 저금리로 한도 최대한으로 뽑아드리겠습니다.”
내 그 말에 대부계 팀원들이 어이없어한다.
지점장도 황당한 표정을 하고 있고, 한껏 우월감에 젖어있는 서후남도 이 와중에 영업질이냐며 한심한 듯 핀잔을 준다.
“하 과장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우리 박 대표님 불편하게······.”
“아냐. 나는 괜찮네. 좋은 계약도 하게 된 만큼 나도 뭐라도 도움을 주고 싶기도 하고. 저금리로 돈 빌려준다는데 나한테도 나쁠 거야 없잖아?”
“그럼요. 요즘 가계 대출 규제가 심하긴 하지만, 제가 어떻게든 최고의 조건으로 한 번 만들어보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 그렇게 하자고. 서후남 대리만 일 잘하는 줄 알았더니 하 과장도 일을 참 잘하는구먼. 허허허허.”
미끼를 물었다.
그럴 줄 알았다.
1200억 대출이라고 해봤자 그 돈은 신라은행으로 고스란히 들어간다.
실제로 박성동에겐 떨어지는 돈은 제로라는 뜻.
정확한 사유야 모르지만, 기업회생절차가 진행되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안 좋다면, 분명 당장 수중에 챙길 수 있는 돈을 마다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제대로 적중한 것이다.
서후남은 ‘실적에 미친 새끼’라는 눈으로 날 한심하게 보고 있지만, 당연히 실적에 미쳐서가 아니다.
기업회생절차에 들어가는 좀 더 구체적인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서 박성동 개인의 대출 신청 자료가 필요할 뿐이다.
※※※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거야? 앞뒤 없이 그렇게 실적 욕심내고 그럴 사람 아니잖아?”
박성동 대표가 떠나고 지점장이 지점장실로 날 불러서 하는 말이었다.
“아니면 정말 대출 하나 더 끼워팔려고 그런 거야?”
“아닙니다.”
“그래. 아니겠지. 그럼 대체 왜 그런가야? 내가 다 민망했다고.”
“확인할 게 좀 있었습니다.”
“확인? 뭘?”
“그보다······ 1200억 말입니다. 그거 지급을 좀 미루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뭐?”
그게 무슨 말같잖은 소리냐는 표정.
“대체 왜?”
“지금으로서는 딱히 말씀드릴 게 없습니다만 느낌이 좋지가 않습니다.”
“느낌?”
더욱 가당찮다는 눈빛.
“고작 느낌 따위로 이 중요한 계약을 미루자고?”
“고작 느낌 따위는 아니겠죠. 사실 이창동 대표한테서 들은 게 좀 있습니다. 아직은 딱 이거다라는 게 없긴 하지만······ 제 짐작이 맞는다면 분명 SC에 문제가 있습니다.”
약간의 거짓말.
지금은 어떻게든 지점장을 설득하는 게 먼저다.
한 달 동안 고생하며 성사시킨 일이다.
이제 손만 뻗으면 과실을 따 먹을 수가 있는데, 그걸 눈앞에 두고 참으라기엔 말의 근거가 너무 빈약하다.
하지만 그동안 족집게처럼 심사 오류들을 잡아낸 내 말이다. 그리고 마냥 무시해버리기엔 1200억이라는 돈이 너무 크다.
깊은 고민이 이어진다.
“그래서?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데?”
“3일 안에 뭐라도 건져보겠습니다.”
3일 정도면 이런저런 이유로 지급 연기를 둘러대기에 크게 무리가 안 되는 시간이다.
“좋아. 딱 3일이야. 내가 어떻게든 3일은 미뤄볼 테니까, 뭐라도 건져와 봐. 아니면 이대로 진행하는 수밖에 없어. 괜히 미적대다 다 잡은 고기 놓치게 되면 그것도 문제가 심각해지는 거니까.”
“예.”
일단 지점장은 그렇게 설득하고 나왔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서후남이 한껏 기고만장해져서는 비웃음으로 날 반긴다.
“이햐! 정말 대단하십니다. 하 과장님 실적이 왜 그렇게 좋은가 했더니, 그런 상황에서도 자기 실적을 챙기는 모습, 오늘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박수까지 치며 제대로 비꼰다.
“그런데 그거 아세요? 소탐대실이라는 말. 작은 걸 탐하다 큰 걸 잃는다는 뜻이죠. 한 달 동안 어렵게 교감을 쌓아온 분인데, 그렇게 대놓고 실적 욕심부터 드러내다 박 대표님 빈정이라도 상하게 했으면 어쩔 뻔 했습니까? 그나마 박 대표님 성정이 유하고 아량도 넓으신 분이기에 망정이지······ 아무리 실적이 중요하다지만 때와 장소는 좀 가리자구요. 이젠 과장도 되셨잖습니까?”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지가 상관인줄 알겠다.
하여튼 한 치 앞도 못보는 게 사람이다.
한 마디 해주려다가 참았다.
내가 이번 대출을 막든 막지 못하든 간에, 이미 지옥행 확정인 놈한테 무슨 말을 더 하랴.
그리고 다음 날, 박성동 대표의 개인 대출 서류가 내 손에 들어왔다.
기본적인 심사는 해야한다.
그 동안 수차례 테스트를 해본 결과, 심의 과정 없이 내 임의로 매긴 등급에는 변동정보가 뜨지 않았다.
그렇게 정식 절차를 밟아 나온 결과는 당연히 A.
‘설마 아무것도 안 뜨는 건 아니겠지?’
서류 봉투에 등급을 적기 전 밀려드는 불안감.
만일 아무것도 뜨지 않는다면 조사할 것이 너무 광범위해진다.
3일이란 기한을 맞추기가 그만큼 어려워진다는 뜻이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후 서류 봉투 위에 빨간색 매직펜으로 등급 A를 적었다.
타닥 타닥
“휴우······.”
안도의 한숨.
타닥 타닥 타닥 타닥······.
[판정보류]
[등급하락요건 발생]
[등급하락요건: 업무상 횡령. 조세포탈. 주택법 위반.]
[개인신용평가등급 A→D 확정날짜: 202X년 8월 12일]
업무상 횡령.
회사 자금을 빼돌렸다는 뜻이다.
당연히 횡령으로 만든 비자금을 세금으로 신고하진 않았을 테니 조세포탈까지는 자연스러운 수순.
‘근데 주택법 위반은 또 뭐야?’
순간, 내 머릿속에선 건설시행사 대표가 흔히 회사 자금을 횡령하는데 쓰는 방법들 몇 가지가 스쳐 지나갔다.
흔하게는 분양대금 횡령부터 허위 용역 계약을 통한 공사대금 횡령까지······.
이창진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또 무슨 일이야? 이번엔 진짜 승진턱 쏘는 거야?”
지난 한 달 동안 나만 보면 레퍼토리처럼 반복되는 말.
어떻게든 계속 피하고 있는 중이다.
“그게 아니라 부탁드릴 게 좀 있어서요.”
“부탁? 무슨 부탁?”
“혹시 SC종합건설 하도급 업체들 좀 아십니까?”
“또 SC 얘기야? 하도급 업체는 왜?”
“좀 의심 가는 부분이 있어서요.”
“······ 의심이 가다니? 박성동이 공사대금에 수작질이라도 하고 있다는 말이야?”
“예. 아직은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입니다만······.”
여러 횡령 방법들 중 내가 가장 먼저 조사하기로 한 것은 공사대금 쪽이었다.
수작질하기도 용이할 뿐 더러 감추기도 수월하기 때문이다. 분양대금의 경우는 수백, 수천 명의 분양자들 입을 막아야 하지만, 공사대금은 하도급 업체 몇 곳만 입 단속하면 되니까. 더구나 슈퍼갑의 입장이기에 입막음이 훨씬 더 수월하기도 하다.
다시 물었다.
“SC쪽 하도급 업체들 좀 아십니까?”
“당연히 알지. 다 돌려 쓰는 거니까.”
“그럼 좀 알아봐 주세요. SC와의 계약에 무슨 문제가 없는지. 그리고 혹시 동문회 분들 중에 신라은행이랑 거래하시는 분들 계시면. 신라은행 쪽도요. 왜 그렇게 금리 인하를 거부했는지······ 정확한 사유까지 알아내는 게 어렵다면 적어도 분위기 만이라도요.”
처음에는 그저 예대마진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대출금리에서 예금금리를 뺀 금리 차이.
예대마진이 은행 수익의 70%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실질적인 은행의 주 수입원인 만큼, 모든 은행이 이 예대마진 방어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신라은행도 그래서 결국 SC종합건설을 포기한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봐, 하 과장. 내가 그래도 고객인데, 고객을 너무 부려먹는 거 아냐?”
“이번 일만 마무리 되면, 바로 승진 턱 쏘겠습니다. 아니, 앞으로 한 달간은 대표님의 종이 되겠습니다!”
“호오! 그 말 정말이지?”
“대신 3일밖에 시간이 없습니다. 최대한 빨리 알아봐 주셔야합니다.”
“좋아. 내가 동원할 수 있는 인맥은 죄다 동원해서 알아보지. 어차피 이 바닥이야 내 손바닥 안이니까 뒤지다 보면 뭐라도 나올 거야.”
“감사합니다. 대표님.”
“감사는 뭐······ 하 과장 말대로 하도급 업체들 데리고 장난질을 친 거라면 나로서도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렇게 이창진 대표에게 부탁을 한 후 나도 나름의 조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었다.
하긴, 아무리 요즘 심각한 가계 대출 규제로 인해 모든 은행이 기업 고객 유치에 혈안이 되어있다고 해도, 내 선에서 알아낼 수 있을 정도라면 본점 여신협의회에서 잡아내지 못했을 리 없다.
결국 나로서는 이창진 대표와 그 동문회의 인맥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3일이 지나고 정해진 기한에 이르렀을 때, 이창진 대표에게서 늦지 않게 연락이 왔다.
“하 과장. 박성동이 이거 완전 미쳤는데?”
“찾아내신 겁니까?”
“이거 공사대금 부풀리기야.”
공사대금 부풀리기.
하도급 업체에 공사대금을 정해진 액수보다 부풀려서 지급한 다음에 차액을 다시 돌려받아 챙기는 행위다.
“꽤 오랫동안 해 먹어왔더만. 게다가 돌아가는 꼴을 보니 허위 용역 계약도 한 것 같고. 심지어 죽통 작업까지. 아주 돈 되는 거라면 안 한 게 없어.”
죽통 작업은 1순위 가짜 청약통장을 만들어 분양권을 얻은 다음, 그걸 프리미엄을 얹어 되파는 불법 투기 방법이다.
아마도 주택법 위반은 이 죽통 작업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게 들키지 않고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여기저기 뇌물 좀 먹이고 리베이트도 좀 주고 하면. 더구나 담당자였던 신라은행 과장까지 포섭한 모양이더라고. 그 담당 과장이 얼마 전에 승진을 하면서, 인수인계 과정에서 꼬리가 밟힌 거고.”
우리 측에 보내준 그간의 자료들도 그렇게 조작된 가짜였다는 뜻이다.
"거기 지금 상황은요?"
"신라은행 쪽에서도 피해 규모를 줄이기 위해 내부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쉬쉬하는 중이고, 그 과장이란 놈도 입을 틀어 막고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래봤자 규모가 규모니까, 조만간 터지지 않겠어?"
“그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데요?”
“대강 따져봐도 최소 300억 이상? 땅이며 집이며, 심지어 호화요트까지 아주 지랄을 해댔더라고. 근데 문제는 그렇게 몰래 사 모은 것들을 최근 급하게 처분하고 있다는 거지. 정상적인 루트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이쪽 업계 사장들한테 은밀히 헐값에. 확인은 할 수 없었지만 아마 사금융 쪽도 기웃거렸을 걸? 그게 무슨 뜻인지는 말 안 해도 알지?”
알고 있다.
해외 도피.
이로써 모든 게 정리가 된다.
그러니까 한성으로 옮기려 한 게 금리 때문이 아니라, 들켜버린 불법행위들로 인해 대출금 회수까지 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걸 무마하는 차원에서, 아니, 해외 도피를 위해 최대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 돌려막기를 하려고 했다는 뜻이다.
자칫했으면 1200억, 고스란히 다 날릴 뻔했다.
“이런 미친!”
진짜 ‘이런 미친’이었다.
< 이런 미친!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