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20
SC종합건설 대표 박성동.
내가 직접 그 자리에 참석하진 않았지만, 지점장도 이 바닥에선 20년 경력이다.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나봤을 테고, 그만큼 사람 보는 눈도 있을 텐데, 그런데도 진정성을 느꼈다는 건 그야말로 작정하고 혼이 담긴 구라를 시전했다는 뜻이다.
까놓고 말해 은행과 거래처의 관계는 의리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라 이해로 맺어진 관계다.
그러니 거기에서 도의나 신의를 찾는 건 순진한 생각일 수 있다.
물론 그럼에도 많은 거래처 사장들이 고맙게도 우리에게 깊은 유대감과 신뢰를 보여주곤 한다. 그리고 그렇게 쌓아가는 낭만적인 관계가 장기적으로 보면 거래처에도 더 큰 이득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자 한 푼 아끼려고 은행을 속이고, 은행원을 기만하고, 사람을 농락한다고 해서 그걸 탓할 수는 없다.
보험금 1억에 배우자의 등에 칼을 꽂기도 하는 세상인데, 하물며 1%만 깎아도 연간 이자 12억을 아낄 수 있다.
결국 당하는 게 바보다.
박성동 대표에겐 단돈 한 푼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권리가 있듯이, 은행원에겐 당하지 않아야 할 의무가 있다.
물론 1200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유혹과 작정하고 펼치는 혼이 담긴 구라에 속지 않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이제 어쩐다······.”
고민이 된다.
애매한 문제다.
모든 건 신라은행 쪽의 결정에 달렸다.
만일 신라은행이 박성동 대표가 원하는 금리가 은행정책 상 불가하다는 기조를 계속 유지하거나, 지저분한 선례를 남기지 않기 위해 그 농간에 동조하지 않기로 한다면, 장원 지점은 대박 실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신라은행이 결국 박성동 대표에게 백기투항을 하게 된다면, 장원 지점은 재주 넘는 곰 신세가 되어 남 좋은 일만 시키게 된다.
지금으로서는 어느 쪽도 장담할 수 없는 확률.
말리자니 괜히 좋은 기회를 나 때문에 망치게 될 것 같고, 그냥 내버려 두자니 실패 시에 지점장이 받게 될 불이익이 걱정된다.
‘괜히 전화했나?’
모르면 모르는 대로 넘어가면 되는 것을, 괜히 들쑤셔서 골치만 아프다.
그렇게 괜한 고민만 떠안은 채 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신라은행의 최근 대출 기조를 알아볼 요량으로 신라은행의 여러 기사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불현듯 느껴지는 시선에 슬쩍 고개를 돌리니 서후남의 날 선 눈초리가 나를 노려보고 있다.
“또 왜? 무슨 일인데?”
“신라은행은 왜 검색하고 계시는데요? SC 건은 신경 끄시죠?”
“뭐?”
“이번에 또 제 실적 가로채 가시면 저 진짜 가만 안 있습니다!”
“······.”
이 순간 내 고민은 끝났다.
서후남의 말대로 신경 끄기로.
이창진 대표와의 통화 내용을 지점장에게는 그래도 알려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접었다.
1200억이면 지점에서 연간 얻을 수 있는 수익이 무려 66억이다.
괜히 티끌만큼의 부정적인 영향도 주고 싶지 않던 차에, 서후남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지금까지의 고민과 걱정들이 다 바보 같다.
‘하긴, 일이 틀어진다고 해도, 그 엄청난 횡령 사건에서도 고작 감봉 3개월로 끝낸 지점장인데, 은행 체신 좀 깎아 먹은 정도로 뭐 별일이야 있으려고. 알아서 몸보신 잘하시겠지.’
꼴이 좀 우스워지고, 한 달간의 개고생이 그냥 개고생으로 끝나고, 박성동 대표한테 놀아난 사실에 빡이 제대로 돌긴 하겠지만.
‘서 대리 이 자식이야 대박을 치든 쪽박을 차든 내 알 바 아니고.’
에라이! 나도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
예상대로 지점장은 1200억 대출 건을 진행하기로 결정하고 본점 협의회의 승인을 얻기 위해 그날부터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후남 대리는 혹시 모를 변심을 우려해 아예 출근까지 SC종합건설로 하며 박성동 대표를 케어했다.
그 덕분에 대부계가 아주 바빠지긴 했지만, 관록의 부지점장이 신속하면서도 유연하게 대처를 잘해준 덕분에 그래도 큰 무리 없이 돌아갔다.
그런 와중에 두 가지 소식이 들려왔다.
하나는 한 차장에 대한 수사가 끝나고 재판에 넘겨졌다는 것이다.
즉, 피의자 신분에서 이젠 피고인의 신분이 되었다는 뜻이다.
6월 20일.
변동 정보에 적혀 있던 확정날짜였다.
그리고 다른 소식 하나는 가람필방의 사모님과 딸 장서연의 신장이식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는 것이었다.
장서연으로부터 이번 달에 수술을 할 거라는 말을 듣긴 했었지만, 수술 일정은 따로 연락받지 못했다.
그 후로도 몇 차례 더 사모님 병문안을 갔었고, 장서연과도 몇 번 더 마주치기도 했지만 그때도 그런 말은 없었었다. 그래서 장한실 사장이 전해주는 그 소식이 내겐 너무 갑작스러웠다.
“미리 좀 알려 주시지 그러셨어요?”
“뭐하러. 번거롭기만 하지.”
“수술은 잘 되셨구요?”
“응. 다 잘됐어. 이제 4일 됐는데 생생해. 별다른 징후도 없고.”
다행이었다.
난 그날 저녁 퇴근을 마치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아직 준중환자실에 계신 사모님은 면회가 불가해 나는 곧바로 장서연이 입원 중인 병실로 찾아갔다.
드르르륵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생각보다도 훨씬 건강한 모습의 장서연이 차분한 미소로 날 반긴다.
“굳이 이렇게 오지 않으셔도 되는데······ 고마워요.”
“무슨······ 당연히 와야죠. 몸은 좀 어떠세요?”
“좋아요. 너무 좋아서 속상해요.”
“예?”
“큰 수술이고 신장까지 하나 떼서 살도 좀 빠지고 예뻐질 줄 알았거든요. 근데 완전 병원 체질인지 오히려 2킬로나 쪘지 뭐예요. 아휴, 속상해. 저 못나졌죠?”
장난기 다분한 얼굴로 짐짓 울상을 짓는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병원 체질이 맞는 것 같은데요? 그새 너무 예뻐지셔서 아까는 병실 잘못 찾아온 줄 알았다니까요. 하하.”
그렇게 실없는 소리를 할 만큼 장서연의 건강한 모습이 다행이었다.
전날 장서연이 다녀가고, 그날 바로 사모님이 계신 병실을 찾았었다.
하지만 들어가지 못했다.
‘내가 우리 딸 신장을 어떻게 받아? 어떻게 받아······ 학교는 또 어쩌고······.’ 라며 울고 계시던 사모님과, 그런 사모님의 손을 꼭 붙들고 ‘그런 말 마.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 고쳐놓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는 내가 고칠 테니까, 그러니까 엄마는 건강해질 생각만 해.’라며 몇 번이고 그런 사모님을 다독이던 장서연.
차마 그 사이에 끼어들 수가 없어 걸음을 돌렸었다.
그 후로 더 마음이 쓰였다.
괜히 더 걱정도 되었다.
아직 사모님을 뵙지는 못했지만, 장서연이라도 이렇게 건강한 모습을 보게 되니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저 3일 후에 퇴원이거든요.”
“그렇게나 빨리요?”
“공여자는 금방 퇴원하더라구요. 그래서 말인데, 저 퇴원하고 몸을 좀 더 회복하고 나면······ 밥 좀 사주세요.”
“밥이요?”
“병원 밥 먹고 2킬로나 찐 주제에 이런 말하긴 좀 민망하긴 한데, 병원 밥 너무 맛없어요. 살덩이를 떼내서 그런가, 살코기가 막 더 땡겨요. 저 고기 좀 사주세요.”
민망한 듯 부끄러운 듯 얼굴에 옅은 홍조를 띄며 내 대답을 기다리는 모습이 귀엽다.
처음 만났을 때의 조금은 딱딱해 보였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병원복을 입어서 그런가?’
측은함도 있다.
‘근데, 나 왜 설레지?’
하긴, 미모의 여인이 밥 사달라며 저렇게 귀여운 얼굴로 쳐다보는데 설레지 않으면 그게 어디 사람일까. 목석이지.
“알겠습니다. 사례금도 두둑이 받았는데 그깟 고기 하나 못 사드리겠습니까? 떼어낸 신장을 아주 한우 투뿔로 꽉꽉 채워드리겠습니다. 하하.”
※※※
그렇게 약간의 불안함과 조금은 설레는 일상이 또한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7월의 무더위가 시작될 무렵, 박순호 지점장도 드디어 한 달간의 고생을 끝냈다.
“후우! 이제 진짜 다 끝났네. 이봐. 서 대리. 이제 승인장이 떨어지는 대로 신라은행 대출만 갚아버리면 끝이니까 내일 박성동 대표한테 서류 들고 오라고 해.”
본점에 들렀다가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야 돌아온 지점장이 대부계 사무실로 들어오며 그렇게 말하자 서후남 대리의 입이 귀에 걸린다.
“예! 지금 바로 연락 넣겠습니다!”
그 와중에 나를 보며 득의한 미소를 씨익 말아 올리는 건 또 뭔지.
어쨌든 이런저런 우려들과는 달리 1200억짜리 대출이 성사가 되긴 되려나 보다.
‘결국 신라에서는 포기한 건가?’
괜히 나서지 않길 잘했다.
물론 결과론이긴 하지만, 이렇게 잘 마무리 될 1200억짜리 계약을 괜한 오지랖으로 자칫했으면 망칠 뻔했다.
역시 불확실한 일에는 끼지 않는 게 처세술의 기본인 모양이다.
“서류는 가져 오셨습니까?”
“물론이지.”
워낙에 큰 건이다 보니 대부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박성동 대표가 서류 봉투를 지점장에게 내민다.
이 순간 모두가 긴장이다.
장원 지점 역사상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대박 계약.
꿀꺽
누군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만큼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봉투 안의 서류들을 훑어보던 지점장이 이내 고개를 끄덕인 후 서후남에게 넘겼다.
이미 여신협의회의 승인이 떨어진 일이다.
이 역사적인 순간의 주인공이 된 서후남이 함박웃음을 지어 보인 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뽐내듯 서류 봉투 위에 A를 휘갈긴다.
그런데,
타닥 타닥
'응?'
타닥 타닥 타닥
'이 시점에서?'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변동정보가 떠버린 것이다.
타닥 타닥 타닥 타닥······.
[판정보류]
[등급하락요건 발생]
[등급하락요건: 기업회생절차 진행]
[기업신용평가등급 A→D 확정날짜: 202X년 11월 5일]
‘기업회생절차라고?’
그 말인즉슨, 앞으로 넉 달 뒤, SC종합건설이 파산 위기에 몰려 법정관리에 들어간다는 뜻이었다.
‘이게 무슨······.'
난 박성동 대표의 번들번들한 민 머리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확 구겼다.
다 속았다.
완전히 잘못 짚었다.
애초에 이건 이자 몇 푼 깎아보자는 판이 아니었다.
'이 인간 대체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거야?'
< 대체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거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