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19
“하 대리님! 아니, 하 과장님, 승진 축하드려요!”
“지점장님도 너무 해요. 미리 말씀 좀 해주셨으면 꽃다발이라도 준비했죠.”
“꽃다발 대신 돈다발도 받아줄 용의가 있습니다. 그래도 여기가 은행 아닙니까? 하하.”
‘아주 살판나셨구만.’
멀찍이 떨어져서 그 축하의 현장을 눈꼴시럽게 보고 있던 서후남은 이내 몸을 돌려 객장을 빠져나갔다.
‘과장? 특진? 흥! 관심 사원 취급이나 받던 주제에 지가 무슨!’
불과 두 달 전만 하더라도 대부계 구박대기 신세였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순간 자신을 밀어내고 대부계의 에이스가 되어 있다.
‘내가 저딴 새끼한테 밀렸다는 게 말이 되냐고!’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한 차장이 짤려서?
‘병신같은 새끼!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딴 짓을 벌인 거야?’
한 차장만 대부계에 남아 있었어도 하성운 저 인간이 이렇게 나댈 일도 없었을 텐데.
‘아니, 저 새끼가 그냥 운 좋게 줄을 잘 탄 거지. 지점장이 그렇게 팍팍 밀어주는데 아무리 모지리라도 잘나가는 게 당연하잖아?’
애초에 한 차장이 아니라 지점장 줄을 탔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지금 저기서 승진 축하를 받고 있는 건 나였겠지.’
생각하면 할수록 배알이 뒤틀린다.
그렇게 홀로 대부계 사무실로 돌아온 직후였다.
거래처 김태술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잠시 망설였다.
지금 기분으로는 누구 전화도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한편으로 누구라도 붙들고 지금의 이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고 싶은 심정.
“예. 서후남입니다.”
전화를 받았다.
“어. 서 대리. 나 김태술인데······ 근데 서 대리 목소리가 왜 그래? 또 그 하 대린가 뭔가 하는 놈이 우리 서 대리 짜증나게 한 거야?”
요즘은 거래처 사장들만 만나면 푸념이고 하소연이라 그의 속사정을 빤히 다 안다.
“근데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무슨 일이긴, 요즘 서 대리가 하도 풀 죽어 있는 것 같아서 내가 누굴 좀 소개해 주려고 그러지.”
거래처 소개다.
평소 같았으면 귀가 번쩍 뜨였겠지만, 방금 전에 400억짜리 대출 소식을 듣고 난 뒤라 별 감흥이 없다.
“소개라면 누구······?”
“전에 내가 건설 시행사 운영하고 있는 친구 하나 있다고 한 거 기억나?”
기억난다.
SC종합건설이라는 아파트 건설 시행사로 현재는 일산 쪽에 상당한 규모의 아파트부지를 매입해 준공 중이라고 들었다.
“그런데요?”
“그 친구가 지금 거래하는 은행이랑 완전히 틀어졌거든. 금리가 높아서 좀 깎아달라는데도 도무지 들어 쳐먹질 않는다고, 나한테 무슨 방법이 없겠냐고 자꾸 물어보길래 내가 서 대리 한번 만나보라고 한 거지.”
“음······ 저기 혹시, 대출 규모는 얼마나 되는지 아세요?”
“1200억 정도라던데?”
“······!”
순간 서후남의 닫혀있던 귀는 물론이고 눈까지 번쩍 뜨였다.
“1200억······ 이라고요?”
“어. 관심 있으면 7시까지 여기로 와. 그 친구도 그때 오기로 했으니까.”
“관심 있죠! 관심 있고 말고요! 당연히 관심 있습니다. 제가 지금 바로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서후남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1200억이다.
그걸 그가 끌어올 수만 있다면, 지금 객장에서 한껏 거들먹거리고 있는 저 재수 없는 자식을 한방에 눌러버릴 수가 있다.
‘한 차장 있을 때는 그냥 찐따 새끼였는데······ 내가 저딴 찐따 새끼한테 밀린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
“하 대리가 승진을 했다고?”
“예. 방금 정식 발령을 받았습니다.”
“오! 축하해. 축하해! 그럼 이제 하 과장이라 불러야 하나?”
“다 사장님 덕분입니다.”
“무슨! 다 하 대리, 아니, 하 과장이 열심히 해서 그런 거지. 우리 일진이 자네 덕을 본 게 얼만데······ 설마 과장 달았다고 담당자 바뀌는 건 아니지?”
“예. 사장님. 당연히 제가 계속 담당합니다. 과장됐다고 뭐 달라질 게 있나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아무튼 하 과장! 승진 정말 축하해!”
“하하.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럼 조만간 찾아뵙고 정식으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아니지 아니야. 내가 더 잘 부탁드려야지. 이제 과장님 아닌가 과장님! 하하하하.”
이제 일진기업의 사장 직함을 달게 된 권오종 사장의 기분 좋은 웃음을 끝으로 나는 수화기를 놓았다.
오늘 아침, 인사부로부터 정식으로 승진 통보를 받은 후 담당 거래처들에 승진 소식을 알리는 중이다.
하나 같이 제 일처럼 반기고 축하해준다.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과장 자리보다, 이렇게 전화를 돌리며 축하를 받으니 승진을 한 것이 더 실감이 된다.
그렇게 거래처에 승진 소식을 전하던 중, 의도치 않게 내 시선이 서후남 대리의 자리에 닿았다.
비어 있다.
현재 시각 10시.
아직 어제의 불쾌함이 남아 있어 오늘 출근하는 대로 좀 더 따져 볼 작정이었는데, 여태 출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은섭 씨.”
“예. 과장님.”
음, 실감은 되는데 아직 호칭은 좀 낯설다.
“서 대리한테 연락 해봤어?”
“예. 해봤는데 아직 안 받아요.”
‘접대라도 했던 건가?’
어제 급하게 퇴근하며 외근 간다고 했으니 접대를 하다 뻗었을 가능성도 있다.
“거참, 곧 회의 들어가야 되는데 뭐 하고 있는 건지······.”
금요일이다.
30분 후면 지점 정례 회의가 있다.
“은섭 씨 회의 준비는?”
“수익 진척 데이터랑 신규 거래 리스트, 종료된 대출 건도 정리해서 뽑아놨습니다.”
“고생했어.”
“과장님이 다 만들어 놓은 거 저야 정리만 한 건데요 뭐.”
그러고 있을 때였다.
정례 회의를 10분 남겨두고 서후남 대리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아니나 다를까, 숙취에 찌든 모습이다.
이젠 과장이 되었으니 부하직원의 지각에 대해 한마디 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그 모습을 보니 어제의 내 모습이 떠올라 차마 뭐라 할 수가 없다.
대신 부지점장이 한마디 했다.
“이봐. 서 대리. 왜 이렇게 늦었어?”
“아, 어제 중요한 접대 자리가 있었어요. 새벽 다섯 시까지 달리는 통에······ 꺼억!”
순간, 토해내는 트림에서 술 냄새가 진동한다.
굳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말 안 해도 알만하다.
그런데, 그렇게 말한 후 털썩 의자에 몸을 묻는 와중에 슬쩍 내게 던져오는 저 의미심장한 눈빛은 뭘까?
괜히 기분 나쁘다.
‘어제는 질투 폭발이더니······ 뭐 좋은 거래처라도 하나 잡았나?’
“서 대리도 출근했으니 다들 회의실로 가자고.”
부지점장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회의실로 이동했다.
회의실에 도착하니 수신계 심은정 차장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지점장이 들어오고, 회의가 시작되었다.
정례 회의라고 해봤자 특별한 건 없다.
수신계 쪽은 한 주간 신용카드를 몇 장 팔았고 청약저축 계좌를 몇 구좌 개설했으며 펀드, 신탁, 보험, 폰뱅킹 신규 가입자는 몇 명인지 보고하고, 대부계는 내가 은섭 씨에게 지시한 자료들을 그대로 읊어대는 수준.
한 주간의 실적이 목표치에 못 미치면 거기에 대한 개선방안이나 대책 회의로까지 이어지기도 하지만, 장원 지점 수신계야 워낙에 일 잘하기로 소문난 데다, 대부계도 내 덕에 이미 목표 수익은 초과 달성한 상태라 회의는 빠르게 끝났다.
아니, 빠르게 끝나기 직전 서후남이 손을 들었다.
“지점장님. 제가 보고드릴 게 하나 더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서후남이 좌중을 쓰윽 한 번 둘러본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는 내가 있었다.
어딘지 자신감이 넘치는 눈빛. 어깨도 당당하고 고개도 뻣뻣하다.
“보고?”
“예. 제가 어제 SC종합건설이라고, 아파트 건설 시행사 대표를 만나고 왔는데요.”
“SC종합건설? 거긴 나도 알지. 근데 거긴 신라은행이랑 꽤 오래 거래 중인 걸로 아는데?”
“그게 금리 문제로 다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박성동 대표는 금리가 너무 높다고 계속해서 인하를 요청했는데 신라 쪽에선 아예 들은 척도 안 한다고 빈정이 많이 상해 있는 상태입니다. 아니, 어제 제가 만나 보니 빈정이 상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이가 틀어진 걸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쪽으로 옮겨올 생각이 있다는 거야?”
“예.”
“규모는?”
순간, 서후남이 잠시 대답을 미루고는 다시 쓰윽 좌중을 둘러본다. 물론 그 시선의 끝에도 내가 있다.
아까보다도 더 오만해진 시선.
아니, 그건 차라리 전장에서 돌아온 개선장군의 의기양양함에 더 가깝다.
그리고 이내 뱉어내는 한마디.
“1200억입니다!”
순간 그 액수에 나마저 뜨악했다.
그러니 지점장이야 오죽할까.
“1200억이라고?”
“예!”
“그걸 다 우리 쪽으로 옮기겠다는 거야?”
“예!”
“신라 쪽 금리는 얼마야?”
“6%였습니다.”
고금리 시대다.
건설 준공 대출도 폭등을 하긴 마찬가지다.
그런 상황에 6%면 신라 쪽에서도 해 줄 만큼은 해 준 거다.
“우리한테는 얼마를 원하는 건데?”
“예. 0.5%만 인하해줘도 당장 옮길 의사가 있다고 했습니다.”
지점장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간다.
그러다 신중하게 묻는다.
“확실한 거야?”
“예?”
“0.5%면 옮겨 오는 게 확실한 거냐고. 도중에 마음이 바뀌거나 말이 바뀌거나 하진 않겠냔 말이야.”
“제 생각엔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신라에서 대응을 해와도? 0.5%보다 더 낮은 금리를 제시한다고 해도?”
“······ 신라와는 거래를 끊겠다는 박성동 대표의 의지가 확고합니다. 그런 걱정이라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흠······ 좋아. 일단 그쪽 대표와 자리를 한 번 만들어봐. 내가 직접 한번 확인을 해야겠으니까.”
“예! 바로 약속 잡겠습니다!”
그렇게 회의는 끝이 났다.
그리고 그날 저녁, 지점장과 SC종합건설 박성동 대표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
다음날, 난 출근한 지점장을 따라 지점장실로 따라 들어가며 물었다.
“SC종합건설 대표, 직접 만나보시니 어떠셨습니까?”
지점장이 슈트를 옷걸이에 건 후 자신의 의자에 앉으며 대답했다.
“서 대리 말대로 옮길 의지가 워낙 강해 보이긴 했어. 나중에 절대로 배신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몇 번이나 받았고. 진정성도 느껴지긴 했는데······ 그래봤자 진정성 따위 돈 앞에서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너무 잘 아니까.”
“그래서요?”
“하 과장 생각은 어때?”
“이번 일엔 일절 관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서 대리 때문에?”
부지점장으로부터 전날의 일을 전해 들은 모양이다.
“예. 가뜩이나 저한테 원망이 많은 것 같은데, 이번 일에 괜히 제가 끼어들었다가 일이 틀어지기라도 하면, 또 그 원망 다 어떻게 감당하라구요. 어휴! 저는 싫습니다.”
“그러지 말고 언제 날 잡아서 마음을 풀어 주든, 군기를 확실히 잡아서 서열정리를 하든 해봐. 언제까지 그럴 순 없잖아. 사무실 분위기도 그렇고.”
“예. 그래야죠. 그렇잖아도 한번 빡시게 군기를 잡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근데 이 건은 정말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무려 1200억이야. 지레 겁먹고 포기하긴 너무 아깝지. 서 대리도 박 대표 마음 못 바꾸게 자기가 철저히 케어 하겠다고 하고 있고. 일단 실현 가능한지부터 검토해본 다음에 가능하다 판단되면······ 한번 달려들어 봐야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추진한다고 해도 이 정도 규모에 그 정도 금리면 여신협의회의 승인장을 받기까지 지점장이 한 달 정도는 매달려야 가능한 일이다.
당연히 지점 전체에 그 부담은 가중된다.
하지만 대강 짐작했던 결론이다.
지점장의 말대로 1200억이면 못 먹어도 고는 한 번 때려 봐야 하는 돈이니까.
하지만······ 이 뭔지 모를 찝찝함.
그리고 문득 떠오르는 얼굴 하나.
‘이번일엔 진짜 관여하고 싶지 않은데······.’
그래도 궁금한 건 못 참겠다.
지점장실을 나온 나는 곧바로 청명건설 이창진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어! 하 과장! 어제 전화해놓고 또 무슨 일이야? 벌써 승진턱 쏘려고?”
“승진턱은 좀 나중으로 미루면 안 될까요? 아직 술병이 다 안 나아서요.”
“뭐야? 체격은 딱 노가다 체격인데, 의외로 약골이구만. 그럼 무슨 일로 나한테 전화를 다했어?”
“혹시 SC종합건설 박성동 대표라고 아십니까?”
“박성동이? 알지. 이 바닥이 다 그 바닥인데 당연히 알다마다. 근데 왜?”
“이번에 저희 은행 쪽으로 거래 은행을 바꾸고 싶다는 제의를 해와서요. 금리를 좀 인하해주는 조건으로.”
“자네한테 직접?”
“아뇨. 제 부하직원을 통해서요.”
“그 인간 아직도 그러고 있나 보네.”
“예?”
“그 인간 상습범이야. 실적에 급급한 은행원 하나 꼬셔다가 은행들 경쟁 붙여서 제 실속 챙겨 먹는 거. 저번 공사 때도 은행 하나 바보 만들고, 금리를 1.2%나 깎았지 아마?”
“······.”
진정성이 돈 앞에 쉽게 무너지는 걸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SC종합건설 박성동 대표는 애초에 진정성 따위가 없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 그 인간 상습범이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