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18
예상대로 그날 내 위장은 찢어졌다.
소주에 맥주, 소주잔 대신 맥주잔, 꼼장어와 어묵.
400억짜리 술자리치고는 소박했지만, 그 양까지 소박한 것은 아니었다.
소주 총 열네 병에 맥주 열아홉 병.
그걸 세 명이서 다 마셨다.
그래도 맨정신일 때는 나름 점잖았던 이창진 대표였지만, 술이 들어가기 시작하니 공사판 짬바가 그대로 나왔다.
부어라 마셔라. 어느 순간부턴 아예 병나발이다.
그 바람에 팔자에도 없던 형제가 생길 뻔했다.
-이봐. 하 대리! 회장님 회장님이 뭐야! 앞으로 형이라 불러!
-그건 좀······ 저희 아버지보다 연배가 높으신데요.
-그래? 그럼 앞으로 아버지라 불러!
조금만 정신을 더 놓고 있었으면 일구이언도 안 했는데 이부지자가 될 뻔했다.
그렇게 자칫 두 아버지를 모실 뻔했던 위기의 술자리가 끝나고, 난 밤새 변기통을 붙들고 씨름을 해야 했다.
정말이지 죽는 줄 알았다.
게워내고 또 게워내고, 이러다 딱 죽겠다 싶을 정도인데도 도무지 끝나지가 않는다.
거기다 누군가 내 내장을 빨래 짜듯 짜내고 있는 것 같은 극악한 고통까지.
은행원이 천직이라고?
천직은 개뿔, 그 말 당장 취소다.
다시 태어난다면 은행원 따위 내가 다신 하나 봐라!
아무튼 그렇게 밤새 생고생을 하고 나서 출근을 하니 다들 내 얼굴에 놀란다.
“어머! 하 대리님, 얼굴이 왜 그래요?”
“또 접대 뛰신 거예요? 어휴! 술도 잘 못 하시면서······ 대체 이번엔 얼마나 달리신 거예요?”
“얼굴이 어쩜 좋아. 숙취해소제라도 사다 드려요?”
숙취해소제는 이미 세 병째 들이킨 상태.
이럴 땐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싶지만, 지점장에게 어제의 성과에 대한 보고는 올려야 한다.
난 지점장이 출근하길 기다렸다가 보고를 올렸다. 그러자 예상대로 지점장의 입도 찢어졌다.
“뭐? 400억? 그게 정말이야?”
아주 찢어지다 못해 입이 귀에 걸리겠다.
아직 봉합이 안 되고 있는 내 위장을 생각하면 마냥 좋아죽는 지점장이 좀 얄밉다.
“근데 그거 괜찮은 거야?”
“예?”
“상대 은행들에서 가만있겠냐는 말이야.”
당연히 대응을 해 올 것이다.
그러나,
“400억이 큰 액수이긴 하지만 여섯 곳에서 십시일반 해서 모은 돈인 만큼 상대 은행들에서도 사활을 걸고 달려들진 않을 겁니다. 어느 정도의 금리 인하를 약속하긴 하겠지만, 그 동문회의 성향이나, 회장인 이창진 대표의 성격을 고려하면 번복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생각합니다.”
“음······ 하긴, 성우실업 사장은 동문회 도움 안 받겠다고 난리, 그 동문회에선 도움을 주겠다고 난리, 그런 사람들이 이런 일로 말을 바꾸지는 않겠지. 거참, 어떻게 그런 동문회가 다 있는지······ 우리 동문회는 잘나가는 놈 거들먹거리느라 난리에 못난 놈 꼽주느라 난린데······ 좋아. 이 건은 내가 본점 가서 최대한 빠르게 승인을 받아오지.”
400억이면 지점장의 재량 밖의 금액이다. 본점 여신협의회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그나저나, 하 대리 얼굴이 말이 아니로군.”
“말도 마십시오. 아주 죽다 살았습니다. 400억 아니었으면 바로 도망쳤을 겁니다. 이런 접대는 정말······ 제 능력 밖입니다.”
“약한 소리 말아. 내가 말했잖아. 은행은 정치라고. 정치의 기본은 뭐다? 접대지. 하 대리 자네가 직급이 조금 더 오르면 나랑 같이 전직 장관이며 고위 공직자며, 행세깨나 하는 사람들 모시고 갖은 술판을 다 다녀야 할 텐데 고작 이 정도에 앓는 소리 하면 어떡해?”
“이제 저 6년 찹니다. 그런 날이 오기나 하겠습니까?”
지점장이 그런 자리에 주로 데리고 가는 건 부지점장이다. 부지점장이 연수로 자리를 비웠을 때는 한 차장을 데리고 갔었다. 그만큼 어느 정도 직급은 되어야 그 자리에 급이 맞는다는 거다.
“아냐. 그렇게 오래 안 걸릴 거야. 요즘 자네 활약이 오죽 대단해야 말이지. 오늘은 또 이런 대박 건수까지 물어오고. 게다가······ 이건 그냥 알고만 있으라고 하는 말인데, 곧 특진이 있을 거야.”
“특진이요? 누구요?”
“누구긴 누구야? 하 대리지. 이미 결정이 난 사안이고, 곧 과장 승진 인사발령도 내려올 거야.”
“예? 그게 무슨······ 저 아직 6년 차라니까요.”
한성은행의 경우 과장은 평균 8, 9년 차에 달게 된다.
공무원 만큼이나 직급 체계가 보수적인 곳이 은행이고, 특히나 한성은행의 경우 특진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반갑기보다는 당혹스럽다.
“혹시 전무님이 힘을 써주신 겁니까?”
“전무님이 힘써주신 건 맞아.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지. 이번 셀프대출 건, 하 대리가 늦지 않게 발견했으니 망정이지, 자칫 아무 대비도 안 되어 있는 상태에서 터졌더라면 우리 한성이 받았을 데미지는 지금보다 훨씬 심각했을 거야. 그걸 행장님도 숙지하셨고, 거기에 전무님이 몇 마디 더 보탠 거지. 다시 말해 특진을 하기에 충분한 공을 세웠다는 말이야.”
“······.”
“물론 이번 승진에는 그간의 자네 실적도 고려가 되었고, 갑자기 두 자리가 비어버린 대부계 책임자들 공석을 둘 다 외부인사로 채우기에는 업무 안정화 차원에서 효율적이지 않다는 내 의견도 충분히 반영이 되었겠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전무 라인이 손을 썼다는 말이다.
그날 김강철 전무가 내밀었던 손이, 그 손을 잡았던 내 선택이 이렇게까지 즉각적으로 효과가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내가 과장이라고?’
얼떨떨한 기분.
지점장실을 나와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서도 난 잠시 멍한 채로 있었다.
솔직히 좀 두근거린다.
남들보다 빠른 승진, 출세, 그런 것들에 대한 미련은 놓은 지 오래건만 막상 이렇게 현실로 다가오니 꽤나 기분이 좋다.
‘요즘 나 너무 잘나가는 거 아냐?’
실적에 승진에, 이젠 주머니까지 두둑하다.
연말에 들어올 투자 수익을 생각하면 그 기대만으로도 벌써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다.
그러고 있는데,
지이이잉― 지이이잉―
이관우한테서 전화가 왔다.
통화 버튼을 누르며 밖으로 나갔다.
순간, 빼액 질러 대는 고함.
“야! 어떻게 된 거야? 왜 하씨 네가 특진인데?”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방금 인사부에 들렀다가 부장한테 들었지.”
내가 승진을 하긴 하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대체 어떻게 된 건데?”
“이번 한정훈 차장 셀프대출 사건 너도 알지?”
“당연히 알지. 그거 무마하느라 내가 언론사에 전화를 하루에 삼백 통씩 했었는데.”
“그거 이 형님이 밝혀낸 거다.”
“뭐? 진짜?”
“그래. 회사에 아주 지대한 공을 세운 거지. 그래서 특진을 하게 된 거고.”
“뭐야? 내가 들은 거랑은 다른데?”
“네가 들은 거는 뭔데?”
“너 전무 라인 탔다던데?”
“그건 또 어디서 들었냐?”
“어디서 듣긴, 지금 우리 동기 단톡방이 온통 그 얘기로 도배 중인데.”
단톡방 지우고 산 지 오래다.
“벌써 거기까지 소문이 난 거냐?”
“뭐야? 진짜 전무 라인 탄 거야? 그래서 특진도 한 거고?”
“셀프대출 건으로 공도 세웠고, 전무 덕도 본 거지.”
“와! 세상 졸라 불공평하네. 누군 승진 빠르다는 거 하나 보고 이 지랄 맞은 팀에서 매일 전쟁을 치르고 있는데, 누군 줄 하나 잘 잡아서 입행 6년 차에 과장이라니······.”
“그러니까 줄 하나 잘 잡아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공도 있고 실적도 다 괜찮고 하니까······.”
“젠장! 우리 딸내미들한테는 이런 불공평한 세상을 안 물려줘야 하는데······.”
“······.”
들을 생각이 없다.
그러더니 또 버럭 소리친다.
“야!”
“왜?”
“나도 그 줄 좀 같이 태워주면 안 되냐?”
“······ 방금 10초 전에 너네 딸내미들한테는 이런 불공평한 세상 안 물려주겠다며?”
“그러니까 전무 라인 타고 출세해서 우리 딸내미들한테 꽃길만 걷게 해줘야 할 거 아냐?”
음······ 그건 그러네.
“그러니까 하씨야. 내 친구 하씨야. 나도 좀 껴 줘라. 우리가 남이가?”
“응. 남이지. 완전 남이지. 이보다 더 남일 수가 없을 만큼 남이지. 심지어 넌 겨드랑이털도 빨간색이잖아? 내가 볼 때 우린 종족 자체가 달라.”
“······.”
“게다가 이 시국에 줄은 무슨 줄이야? 줄 잘못 탔다간 순식간에 골로 갈 수 있으니까, 개소리하지 말고 다음 주 주말에 술이나 한잔해. 나도 간만에 공주님들 얼굴도 보고. 그 새 또 많이 컸겠네.”
아니, 술 말고 밥을 먹어야겠다. 지금 기분 같아서는 적어도 한 달은 아예 술 근처는 가고 싶지도 않을 것 같으니까.
※※※
그렇게 이관우와 통화를 끊고 나니 문득 궁금해졌다.
단톡방에서 무슨 대화들이 오가고 있는지.
그래서 한 번 들어가 볼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이내 관뒀다. 괜히 발목 잡히면 여러 가지로 피곤해질 것 같았다.
‘내가 좀 들뜨긴 했나 보네. 단톡방엘 다 들어가 볼 생각을 하고.’
어쨌든 숙취가 여전히 괴롭다는 것 말고는 꽤 괜찮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안부 전화에 반갑게 반기는 임현욱 사장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도 좋았고, 어제는 컨디션이 안 좋았다며, 다음에는 제대로 한 잔 더 하자는 이창진 대표의 말에 식은땀이 다 나긴 했지만, 그래도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대부계 사무실까지 와서 숙취 해소제를 두고 가는 김승혜 계장의 자상한 배려도 내 하루를 기분 좋게 했다.
그런데, 그렇게 좋던 기분이 그 하루의 마지막에 완전히 잡쳐버렸다.
“하 대리님. 진짜 너무 하는 거 아닙니까?”
입행 5년 차의 서후남 대리였다.
그 짜증 가득한 목소리에 내가 어리둥절해 있자, 쏘아붙이듯 말한다.
“성우실업 건 말입니다. 그거 제 담당이었습니다. 하 대리님이 그걸 가로채지만 않았어도 이번 400억 대출 건도 제 실적이었을 거구요. 아무리 지점장님이 하 대리님을 편애하신다고 해도 남의 밥그릇까지 빼앗아 가는 건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냔 말입니다.”
난 그제야 서후남 대리가 이렇게 화를 내는 이유를 알았다.
아무래도 지점장에게서 동문회 대출 건에 대해 듣고는 성질이 난 모양이다.
“뭐야? 서 대리, 무슨 일이야?"
그 소란에 차장 자리에 앉아 있던 부지점장이 고개를 쭉 내밀고는 의아히 묻는다.
옆자리의 이은섭 행원도 무슨 일인가 싶어 나와 서후남 대리를 번갈아 본다.
그런 시선들 속에서 난 좀 어이가 없다.
이유를 알고 나니 열이 확 뻗친다.
“이봐. 서후남 대리. 말을 하려면 똑바로나 하던가. 누가 뭘 가로챘다는 거야? 성우실업 부결 낸 건 서 대리 아냐? 그럼 이미 성우실업에선 손을 뗀 거고, 더 이상 담당자도 아닌 건데, 그때는 아무 말도 안 하더니 지금 와서 이러는 이유가 뭐야? 400억이라니까 새삼 아까워? 그럼 애초에 조사라도 똑바로 하던가? 동문회에 대해서는 있는지도 몰랐으면서 이게 무슨 가당찮은 생떼야!”
게다가 뭐? 지점장의 편애?
한 차장의 총애로 그간 대부계 에이스 노릇 하면서 내가 담당하던 거래처 가로채 간 것만 해도 무려 여섯 곳이다.
그런 주제에 나더러 남의 밥그릇 빼앗는 게 너무하다고?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리고 지금 이렇게 성질 내는 것도 단지 400억 때문이 아니다.
눈꼴 시렸던 거다.
1년 선배긴 해도 한참을 눈 아래로 보던 내가 하루가 멀다 하고 성과를 올리며 대부계를 휘젓고 다니는 것이.
납득이 안 되는 것이다.
대부계에서는 거의 내놓다시피 한 내가 지점장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는 것이.
그런 것들이 쌓이다 결국 400억이 발작 버튼이 되어 가당치도 않은 생떼를 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싸움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저기······ 지점장님이 다들 객장으로 모이시래요.”
텔러 하나가 우리를 부른 것이다.
“자자. 둘 다 그만들 하고, 일단 객장으로 가 보자고.”
부지점장이 내 어깨를 톡톡 두들기고는 앞장서서 사무실을 나섰다.
아직 짜증이 다 안 풀렸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나도 더 이상 싸움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건 서후남 대리도 마찬가지여서 그렇게 다들 객장으로 모였다.
모두를 모은 지점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로 흘깃 나를 한 번 쳐다본다.
그러고는 ‘크흠’ 한 차례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좀 전에 본점에 들렀다가 인사부장에게 들었는데 말이야. 내일 우리 지점에 특진 발령이 있을 거라는군. 특진 대상자는 하성운 대리. 내일부터는 대리가 아니고 대부계 과장이니까 호칭들 신경들 써주고. 하 대리, 아니, 하 과장. 소감 한마디 해야지?”
순간, 난 서후남 대리의 얼굴이 더 구겨질 수 없을 정도로 구겨지는 걸 보았다.
<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