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17
김사나가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며 나를 본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리는 모양이다.
15억.
일개 은행원의 입에서 나올만한 단위의 금액이 아닌 것이다.
“진심······ 이세요?”
“예. 진심이 아닐 게 없죠. 충분히 가능성 있는 영화라 판단했고, 그래서 투자를 하기로 결심한 겁니다. 20억 다는 아니지만 일단 15억이면 바로 제작에 들어갈 수 있겠죠?”
“예. 그렇긴 할 텐데······.”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
하지만 실망과 수치스러움으로 물들었던 눈에는 그 순간 안도와 기대가 채워진다.
“제작사 측과 대화를 좀 하고 싶은데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 그럼요. 대리님이 시간만 알려 주시면 바로 약속 잡아 볼게요.”
상기된 얼굴.
혹시라도 내 마음이 바뀌지나 않을까 불안하고 조급한 마음.
그런 한편으로 여전히 내 재력에 대한 놓을 수 없는 의심.
이대로 뒀다가는 조마조마 밤잠까지 설칠 것 같다.
“가능하면 시간 끌 것 없이 지금 바로 투자 계약 진행했으면 하는데, 가능할까요?”
“지금 바로요? 아, 아뇨. 제가 대표님께 말씀드려볼게요.”
그러고는 급히 밖으로 나가 통화를 하더니 이내 다시 들어와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 사무실에 계시다고, 바로 오시면 된다고 하세요. 아니면 대표님께서 여기로 오셔도 된다고······.”
“아닙니다. 우리가 제작사로 가죠. 계약서 준비해서 오시려면 괜히 시간만 더 낭비되니까요.”
업무시간에 개인 용무를 보러 가는 거라 될수록 빨리 해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그렇게 나와 김사나는 용산에 있는 영화팩토리라는 제작사를 찾아갔다.
김사나로부터 금액까지 들었는지 도착했을 때부터 제작사 대표가 거의 버선발로 나와 있다.
“어이쿠! 하 선생님!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래도 명색이 영화 제작사의 대표인데도 완전한 저자세.
그것만 봐도 이번 영화가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인지 짐작이 된다.
그나저나 선생님이라니? 영광은 또 뭔지······ 하 대리, 야, 인마, 등등의 하대가 익숙하다 보니 좀 오글거린다.
역시 돈이란 게 참 요물이긴 하다.
아무튼 투자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계약서를 살피는 일이야 워낙에 내 전문분야기도 하니까.
그렇게 계약을 마치고 나오는 길,
“하 선생님 덕분에 좋은 영화가 사장되지 않고 무사히 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영화제작사 대표가 처음 마중나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건물 입구까지 배웅을 나와 허리를 굽신거린다.
하 선생님이라는 호칭도 몇 번 들으니 좀 무감각해지는 느낌.
“뭘요. 저야 돈 될 영화에 남는 돈 조금 넣는 것뿐인데요.”
남는 돈 조금은 아니지만 이럴 때 아니면 언제 허세를 부리랴.
그걸 무려 내 청춘의 아이콘 김사나 앞에서 부리고 있으니 이젠 진짜 성공한 덕후가 된 기분.
그 사이 김사나의 얼굴도 많이 달라졌다.
내 재력에 대한 의심도, 제작비에 대한 걱정도 모두 사라진 지금은 그 시절 그 환했던 얼굴이 꽤 돌아와 있었다.
‘이런 분위기면 밥 한 끼 정도의 영광은 누릴 수 있을지도······.’
하지만 그런 사심 가득한 기대는 그 순간 걸려 온 전화에 와장창 부서지고 말았다.
“어. 하 대리. 지금 뭐해? 바빠?”
성우실업 임현욱 사장이다.
“아, 아닙니다. 근데 무슨 일로······?”
“전에 말했던 우리 동문회 회장 말이야. 그 친구가 지금 여기로 온다니까 한번 만나보라고.”
순간 귀가 번쩍 뜨였다.
그동안 그렇게 임현욱 사장의 옆구리를 찔러대도 좀처럼 다리를 놔주지 않았었는데, 이제야 그 결실을 보게 되려나 보다.
“예!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내 반응이 좀 격했는지, 전화를 끊자 김사나가 의아히 묻는다.
“무슨 일이세요?”
“아, 별일 아닙니다. 거래처 사장님이 좀 보자 하셔서. 일단 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바쁘신 것 같은데 전 그냥 택시 타고 가면 돼요.”
“아닙니다. 어차피 가는 길이라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난 김사나를 태우고 그녀의 집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감사해요.”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길, 그녀가 말했다.
“여러 방면으로 방법을 찾아봤는데 제작비 마련이 너무 힘들었거든요. 너무 막막했는데······ 대리님 덕분에 살았어요. 정말 감사해요.”
“제가 그렇게 고마우시면 부탁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슨 부탁인데요?”
“앞으로 배우님이 엄청 성공해서 돈을 또 엄청나게 벌게 되면 말입니다. 관리를 저희 은행에 맡겨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는데 말입니다.”
농담 반 진담 반.
그런 내 말에 아무 대꾸 없이 지그시 나를 보는 김사나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그렇게 대단한 재력을 가지신 분이 은행 일에 너무 열심히신게 신기해서요.”
대단한 재력.
단지 15억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15억이라고 해봤자 강남에 아파트 한 채 값밖에 안 되니까.
그녀는 오해하고 있었다.
그 15억이 정말 남아도는 돈이라고.
그도 그럴 것이, 송강호 하정우 영화라고 해도 전 재산을 투자하기가 쉽지 않은 일인데 하물며 저예산에 한물간 B급 배우가 타이틀 롤인 영화에 전 재산을 꼬라박았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는 것이다.
조금 전 제작사 대표도 그런 오해들로 그렇게 저자세였다.
난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
굳이 내 재력에 대해 자세히 밝힐 이유도 없거니와, 또 예상대로 영화가 대박이 나면 15억이 정말 남아도는 돈 정도가 될 수도 있으니까.
“요즘 들어 부쩍 그런 생각이 들긴 합니다.”
“무슨 생각인데요?”
“은행원이 천직은 아닐까 하는······ 은행원이 천직이라니······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인데. 그때 저 은행원 하기 싫다고 사표까지 던졌었거든요. 하하.”
“사표까지 냈다구요?”
“예. 그랬었죠. 지점장님이 그 자리에서 박박 찢어버리긴 했지만.”
“그럼 은행원이 천직이셔서 다행인 거네요. 그때 그만두셨으면 우리 영화도 어떻게 됐을지 모르니까요. 좋아요! 은행원이 천직이신 분이 계신데 제가 누구한테 돈을 맡기겠어요? 제가 나중에 정말 엄청 엄청 성공해서 돈도 왕창왕창 벌게 되면, 전부 한성은행, 아니, 대리님에게 다 맡길게요.”
“그거 진짜죠? 나중에 딴말 하기 없깁니다? 하하!”
기분 좋다.
이로써 나중에 영화가 대박났을 때, 이번 대출 부결에 대한 지점장의 잔소리를 원천 차단할 수 있는 무기 하나를 확보한 것이다.
※※※
그렇게 기분 좋게 김사나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도착한 성우실업의 사장실.
“어! 하 대리 어서 와.”
작지만 다부진 몸에 희끗희끗한 밤톨머리의 임현욱 사장이 날 반겼다. 그런 그의 맞은편에는 건장한 풍채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누군지 안다.
임현욱 사장과는 죽마고우이자 내가 부지런히 그 문을 두들겨 대고 있는 동문회의 회장이며, 그리고 청명건설이라는 상당한 규모의 건설 시행사를 맡고 있는 이창진 대표다.
“이쪽은 한성은행 하성운 대리. 그리고 이 친구는, 알지? 우리 동문회 회장 이창진이.”
임현욱 사장의 소개에 이창진 대표가 소파에 묻었던 몸을 일으킨다.
막상 일어선 모습을 보니 약간 기가 눌리는 느낌이다.
‘185는 되겠는데?’
체구도 상당해서 김강철 전무보다 체격이 훨씬 더 커 보인다. 거기다 평생을 노가다 판을 휘젓고 다닌 거칠고 드센 아우라까지.
“자네로구만. 이 똥고집쟁이 고집을 꺾어놓은 게. 나 청명건설 이창진이야.”
내미는 손도 완전 솥뚜껑 같다.
공손히 그 손을 잡았다.
“한성은행 대리 하성운입니다. 임 사장님으로부터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내 인사에 ‘그래그래’ 하며 흡족한 미소를 얼굴에 띄운다.
그리고 내 손을 잡은 채 거칠게 흔들어 댄다.
아프다.
‘무슨 놈의 노인네가 아귀힘이······.’
방심하다 악 소리까지 지를 뻔한 걸 겨우 참고 물었다.
“근데, 고집을 꺾어놓다뇨?”
“못 들었나? 이 친구가 드디어 우리 동문회의 도움을 받기로 했는데?”
“아!”
난 급히 임현욱 사장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정말입니까?”
“그래. 하 대리 잔소리 듣기 싫어서 그냥 받기로 했어. 오죽 쪼아 대야 말이지.”
“잘됐네요. 잘 됐어요. 그럼 이제 부채도 많이 줄어들겠네요?”
그러고 보면 오늘이 변동정보에 나와 있던 부채 비율 감소 확정날짜인 6월 5일이다.
“뭐, 이제 이자 센 놈부터 차례로 정리해 나가야지. 아, 그렇다고 하 대리는 걱정할 거 없어. 한성은행 건은 그대로 둘 테니까. 최대한 정리하고 남는 대출도 한성으로 다 넘길 테니까 자네는 그냥 실적만 챙기면 돼.”
어려울 때 내밀어준 손이 이렇게 깊은 신뢰로 다가온다.
어쨌든 이로써 위태롭기만 하던 성우실업의 재정은 건전 상태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리고······ 이 친구도 오늘 자네한테 줄 선물을 하나 가져왔지.”
“······?”
내가 의아히 이창진 대표를 바라보자 그가 짐짓 곤란한 표정을 한다.
“이거 참 어이가 없구만. 도움을 준 건 우린데 왜 감사 표시를 또 우리가 해야 하는 거냔 말이지.”
“이제 와 딴소리 할 거면 이거 도로 가져가든가.”
임현욱 사장이 동문회로부터 받은 것 같은 통장을 내민다.
그걸 보며 잘래잘래 고개를 저은 이창진 대표가 하소연하듯 내게 말한다.
“이보라고, 하 대리. 이 답 없는 친구가 글쎄, 동문회의 도움을 받아줄 테니, 대신 자네한테 감사 표시를 하라지 뭔가? 이게 말인지 방군지······ 이런 억지가 어딨냔 말이야. 50년을 붙어 다녔지만 난 아직도 내가 왜 이 웬수 옆에 붙어 있는 건지 이유를 모르겠다니까.”
다른 말은 하나도 귀에 안 들어온다.
“감사 표시라뇨?”
“자네 은행에 거래 좀 트라는 거지.”
“아!”
바로 상황 파악 끝났다.
임현욱 사장이 은혜 갚는 제비가 되어 박씨를 물어다 준 것이다.
거울을 보진 않았지만 아마 내 눈은 지금 그야말로 순정만화의 여주인공처럼 반짝반짝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순정만화의 주인공이 아니다.
먹이를 발견한 늑대, 아니, 하이에나의 눈이다.
동문회의 규모를 알기에 도저히 이 탐욕을 숨길 수가 없다.
“감사 표시라면 얼마나······?”
내게서 동조까지는 아니라도 이 황당한 상황에 대한 공감 정도는 해 줄 거라 기대했던 이창진 대표가, 공감은커녕 잿밥에만 관심을 두자 잠시 말문이 막힌다는 듯 ‘끙’ 앓는 소리를 낸다.
그러다 이내 체념하듯 한숨을 푹 내쉬고는 내게 줄 먹잇감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 동문회에서 사업 좀 한다는 친구들 여섯 명이 기존 대출금 중 일부를 한성은행 쪽으로 옮기기로 했네. 물론 같은 금리로 해 준다는 조건은 달려야겠지.”
금리 인하도 아니고, 같은 금리라면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그래서 얼마인데요?”
“모두 합하면 400억 정도 될 거야.”
“와우!”
순간, 난 나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그 자리에서 ‘와우!’를 외쳤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임현욱 사장과 이창진 대표가 벙찐 표정을 할 정도.
정말이지 예상치 못한 상황이고 예상치 못한 금액이다.
'내일 우리 지점장님, 입 찢어지시겠네'
대신 오늘은 이 백전노장의 술꾼들에게 400억짜리 술친구가 되어 주느라 내 위장이 먼저 찢어지겠지만.
< 400억짜리 술친구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