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16화 (16/50)

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16

김사나가 돌아간 후 난 그녀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꽤 오랫동안 끊었던 덕질을 새로 시작한 건 아니었고, 연예인 대출은 일반인 대출과는 상당 부분 다르게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

4대 보험 가입이 안 되어 있고, 수익도 불규칙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대출로 진행했다가는 터무니없이 한도가 적게 잡히거나 금리가 높게 책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도와 금리를 책정함에 있어 실물 가치만이 아니라 이미지, 인기, 광고계의 브랜드평가 등등 많은 부분을 고려해야 한다.

연예인 대출은 그래서 담당자의 평가가 그만큼 중요하고, 많은 부분을 꼼꼼히 살펴 진행해야 하는 것이다.

‘소속사는 없나?’

소속사가 있다면 조금 더 유리한 조건으로 진행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소속 없이 활동한 지가 3년이 넘었다.

소문대로 아직 옥살이 하고 있는 모친의 빚도 여전히 갚아나가고 있다.

이제 남은 빚은 17억 정도.

피하고자 하면 방법이야 많을 텐데도, 80억이나 되는 돈을 그만큼이나 갚은 것이 대단하다.

그런 한편으로 누군가에겐 부모의 존재가 때로는 이렇게 못내 끊어내지 못하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는 걸 생각하니 새삼 내 부모님의 자애와 헌신이 감사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자료를 꼼꼼히 살폈지만, 대출에 대한 긍정적인 요소는 찾기가 어려웠다. 부정적인 요소만 한가득하다.

“20억은커녕 2천도 받기가 어려워 보이는데······.”

그나마 긍정적인 부분은 한창 잘나갈 때 냈던 이벤트 앨범 하나로 밤무대 행사까지 마다하지 않고 뛰어, 적게라도 수익은 일정하게 벌고 있다는 것.

그렇게 김사나에 대한 자료를 살피는 사이 퇴근 시간이 되었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아까 받은 영화 대본부터 펼쳤다.

이건 업무의 연장이기도 했지만 개인적인 호기심이기도 했다.

[나는 킬러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대사마다 그어져 있는 밑줄과 대본 여백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분석 글이다. 이런 대사에서는 어떤 톤으로 할 것인지, 저런 지문에서는 어떤 감정으로 표현할지 세세하게도 적혀 있다. 거기다 몇 번이나 본 건지 너덜너덜해진 책장까지.

그녀가 이 영화에 얼마나 진심인지, 그 마음이 얼마나 절박한지 느껴져 짠하기도 하고 무겁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마음들은 대본을 읽기 시작하고 채 5분도 안 돼서 사라져버렸다.

나는 킬러입니다.

나는 킬러지만 총을 쓰지 않습니다.

내겐 아주 극심한 화약 알레르기가 있기 때문이죠. 콜록콜록.

나는 칼도 쓰지 않습니다.

선단공포증이 있기 때문이죠. 커터칼도 못 잡는데 사시미는 당연히 무리입니다.

그렇게 시작되는 어느 모자란 여성 킬러와, 오기가 발동해 그런 그녀를 최고의 킬러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전설적인 킬러의 달콤살벌한 로맨스를 그린 좌충우돌 코믹멜로액션 활극.

완전히 몰입했다.

정말이지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대본 형식의 글이 생소할 수밖에 없는데도 장면 장면마다 어찌나 웃긴지 미친놈처럼 꺼이꺼이 거렸다.

웃긴 것도 웃긴 거지만, 무엇보다 여성 킬러의 캐릭터가 좋았다.

귀엽고, 섹시하고, 약간의 허당미에 넘치는 에너지까지. 그게 또 김사나와 싱크로율이 너무 좋아서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나도 모르는 사이 김사나를 대입해서 읽고 있었다.

성시훈 감독이 왜 김사나가 아니면 안 된다고 했는지 십분 이해가 되었다.

그렇게 대본을 단숨에 독파한 나는 이번 영화에 대한 내 의견을 추가하기 위해 노트북을 열어 신용평가서를 띄웠다.

하지만 막상 적으려니 선뜻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다.

문득 지점장의 말이 떠오른 때문이다.

-연예인이라고 들떠서 막 퍼줄 생각 말고.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대출에는 연예인 DC같은 건 없으니까.

혹시 내가 김사나에 대한 팬심으로 객관성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대본이 그렇게 재미있었던 것도 결국 이 넘치는 팬심의 발로가 아닐까?

그래서 지금 내가 눈에 콩깍지가 씌어 연예인 DC를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마음을 가라앉혔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5분 정도 그렇게 여유를 가진 후 최대한 객관적으로 자판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

다음날 아침.

난 지점장이 출근하길 기다렸다가 바로 지점장실로 쫓아 들어갔다.

“김사나씨의 신용평가서입니다.”

“빨리 끝냈네? 사연 많은 여배우라 좀 늦어질 줄 알았더니.”

신용평가서를 들어 쓰윽 훑어 내려간다.

그리고 의외라는 눈으로 나를 본다.

“대출······ 불가라고?”

그랬다.

내 결론은 부결이었다.

“아직 갚아야 하는 모친의 빚이 17억입니다. 현재 수익을 생각하면 신용대출은 사실상 힘듭니다.”

물론 대본은 좋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냉정하게 생각해봐도 재밌다라는 생각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

하지만 불확실성이 너무 높은 영화계이고, 팬데믹 이후 넷플릭스 등 OTT 플랫폼이 대세로 떠오르며 스크린 산업은 하향 산업화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50억 저예산 영화로는 성공을 거두기도 힘들뿐더러, 거둔다고 해도 과연 얼마나 성공을 할 것이며, 그 성공이 과연 한물간 배우의 이미지를 단숨에 바꿔놓을 수 있을 만큼의 파급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면 사실상 확률 낮은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냉정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내가 내린 결론은 차기 영화는 아예 배제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안타깝지만······.”

내 청춘의 아이콘에겐 정말 미안한 노릇이지만, 이대로 제작비가 채워지지 않으면 영화는 크랭크 인도 못 해보고 엎어져 버릴 수도 있지만,

“이번 대출 건은 부결로 처리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음······.”

잠시 평가서를 더 읽어 보던 지점장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하 대리가 어련히 알아서 잘 판단했겠지. 그럼 이 건은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자고.”

결국 김사나의 대출 건은 대출 불가로 최종결정 났다.

그리고 지금 내 손에는 김사나의 대출 신청 서류가 들려 있었다.

과연 내 판단이 옳은 것이었을까를 몇 번이고 더 생각하게 된다. 그래. 이건 확실히 사심이다.

하지만 그런 사심에도 불구하고 내 결론은 대출 불가가 맞았다.

딸각

매직펜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서류 봉투 위에 신용등급 D를 휘갈기듯 적었다.

‘이럴 때 딱 변동정보가 떠주면 좋겠는데······.’

그야말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의 한 가닥 기대.

그런데 내가 D를 휘갈겨 쓴 그 직후였다.

타닥 타닥

변동정보가 떴다.

타닥 타닥 타닥 타닥······.

[판정보류]

[등급상승요건 발생]

[등급상승요건: 잠재적 불안 요소 해소. 이미지 개선. 수익 개선]

[개인신용평가등급 D→A 확정날짜: 202X년 12월 21일]

정말로 변동정보가 떠버린 것이다.

순간 터지려는 환호를 겨우 눌러 담고는 내용부터 확인했다.

‘잠재적 불안 요소 해소?’

선뜻 떠오르는 것이 없다.

아니, 너무 많아서 오히려 이거다 싶은 걸 못 찾겠다.

‘이미지 개선, 수익 개선이라고 할 만한 건 하나 뿐이잖아?’

현재 김사나의 상황에서 여기에 부합될 만한 조건을 가진 것은 딱 하나밖에 없다.

영화 대박.

‘확정날짜도 12월 21일이면 영화 개봉 시기랑 거의 맞아떨어지는데······.’

혹시 다른 가능성이 있나 김사나에 대한 자료를 다시 찬찬히 살펴봤지만 확신만 더해질 뿐이다.

‘이미지도 이미지지만, 빚이 17억인데 신용등급이 최고등급을 찍는다는 건······ 이건 영화가 완전 초대박이 난다는 거잖아?’

지금이라도 지점장한테 말해서 대출심사를 다시 수정해야 하나?

아니, 그러기에는 근거가 너무 부족하다.

‘지점장님! 우리 김사나 배우 차기작 완전 초대박 날 거 같으니까 대출 팍팍 땡겨줍시다!’라고 했다간 정신 나간 놈 취급이나 당할 게 뻔하니까.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김사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사나씨. 저 한성은행 하성운 대리입니다. 대출 심사 결과가 나왔는데, 지금 좀 뵐 수 있을까요?”

※※※

김사나를 만난 장소는 김사나의 집 근처 어느 한적한 카페였다.

직원 전용 통로를 이용해 외부 사람과 마주칠 일은 없는데도 은행은 불편하다며 여기로 나를 불렀다.

은행으로 찾아왔을 때와는 달리 편한 차림.

집업 후드를 푹 눌러쓴 것 말고는 딱히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좀 그렇다.

예전 같았으면 마스크까지 써도 금세 사람들이 알아보고 달려들었을 텐데.

이런 자유로움에 익숙해진 모습이 그간의 고단했던 삶을 여실히 느끼게 하는 것이다.

“대출은 어떻게······.”

조심스레 건네오는 눈빛이 불안으로 흔들린다.

“대출은······ 부결되었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한성은행이 처음도 아닌 걸요.”

한성은행이 처음도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실망과 수치스러움도 처음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감정들이 익숙해지고 무뎌지는 것은 아니다. 이 순간 파르르 떨리고 있는 그녀의 입술만 보아도 그것이 무뎌짐이 아니라 더해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겨우 그런 말이나 하러 여기까지 왔냐며 원망이라도 할 수 있건만, 그녀는 그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이 견딜 수 없는 창피함을 벗어나려고 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붙잡았다.

“대출 건과는 별개로 제가 좀 드릴 말씀이 있는데 시간을 좀 더 주실 수 있을까요? 사실 이 말씀을 드리려고 이렇게 뵙고자 한 거였습니다.”

“······?”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려던 김사나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본다.

그러다 이내 다시 자리에 앉으며 묻는다.

“무슨 말씀을······?”

“여기 대본, 잘 읽었습니다.”

난 그제야 그녀에게 어제 본 대본을 돌려주었다.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김사나씨가 왜 그렇게 자신했는지도 충분히 납득이 가더군요. 물론 아쉽게도 그런 제 개인적인 감상만으로는 대출 심사에 별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

“제가 개인적으로 그 영화에 투자를 좀 하고 싶어서요.”

“예?”

“물론 20억 전부는 아닙니다. 아직 그런 능력도 안 되고.”

“소액투자라면 펀딩쪽으로 알아보시는 게 좋을 거예요. 저흰 지금 펀딩도 열어놓고 있거든요.”

“펀딩에 넣기에는 좀 큰 액수입니다.”

“······?”

그래도 여배우 앞이라고 허세라도 부리는 건가 하는 표정.

하지만,

“15억입니다.”

“······예?”

순간, 그녀의 크고 동그란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휘둥그레진다.

“부족한 제작비 20억 중 15억, 제가 투자하겠습니다.”

< 나는 킬러다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