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한 은행원이 너무 유능함 15
주말은 힐링의 시간이었다.
한 차장의 일로 받은 그간의 피로와 스트레스가 한 방에 다 씻겨나간 느낌.
아버지는 차를 만지고 또 만지고, 잠깐새 먼지라도 묻을라치면 닦고 또 닦고, 새벽에는 가만히 서서 차를 한참을 뿌듯하게 바라보고 계시기도 했다.
명품백에도, 같이 내민 제법 두둑한 용돈 봉투에도 ‘이런 걸 왜? 난 이런 거 필요 없어. 그리고 이런 큰돈 내가 쓸 일이 어딨다고, 너 써.’라며 극구 사양하시는 어머니였지만, 그래도 그게 내 일이 잘 풀리고 있다는 신호라 생각하셨는지 늘 나만 보면 걱정을 숨기지 못하시던 어머니도 이번엔 마음을 좀 놓으시는 것 같았다.
물론, 애인은 아직 없니? 장가는 언제 가려고? 등등의 불편한 걱정은 빼먹지 않으셨지만.
여러 가지 의미로 충만했던 하루.
오랜만에 둘러앉아 즐기는 바비큐 파티도 좋았고, 좋아하는 딸기도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그렇게 본가에서 하루를 보낸 후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 길.
주은이 칭찬하듯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다.
“뭐냐?”
“잘했다고. 아빠가 그렇게 좋아하시는 모습 나 처음 본 거 같애.”
“두 번째거든.”
“두 번째? 그럼 첫 번째는?”
“너 대학 합격하셨을 때. 화장실에 몰래 가셔서 펑펑 우셨어.”
“정말? 근데 난 왜 몰랐지?”
“그저 저 합격한 거 좋아서 사방팔방 뛰어다니느라 아버지 얼굴 살필 겨를이나 있었어야지.”
“그랬나? 히.”
내 말을 들으니 또 찡해오는지 코끝을 매만진다.
“암튼 우리 오빠, 참 잘했어요.”
“······.”
동생에게 칭찬을 받으니 뭔가 약간 굴욕적이면서도 그게 또 왠지 좋다.
아무튼 그렇게 보람찼던 주말이 끝나고 나는 일상으로 복귀했다.
다시 대부계로 돌아온 내 일과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미모의 텔러분들에게 둘러싸인 화사하고 향기로운 일상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외근을 편하게 할 수 있었다.
늘 퇴근 후에 변동정보를 확인하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니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기 일쑤였는데, 이젠 일과 시간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어서 하루가 좀 편했다.
게다가 이젠 내 외근을 뭐라 할 사람도 없다.
한 차장은 증거인멸 및 도주 우려로 인한 구속기소 처리되어 구치소에 들어가 있으니까.
예상치 못했던 것은 공현수 과장이다.
느닷없이 공항 환전소로 좌천당했다.
거의 출셋길은 끝났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징계.
한 차장이 셀프대출 서류심사를 넣는 과정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다 넣기가 불안했는지 공현수 과장에게 몇 건의 사인을 맡긴 것이었다.
그야말로 그냥 딱 사인만 맡긴 것이었고, 공현수 과장은 그저 한 차장이 시키니까 별생각 없이 사인만 대신해준 것뿐이었지만, 워낙에 큰 사건이다 보니 철퇴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현재 대부계는 두 개의 자리가 빈 상태.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침 3개월간의 해외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지상준 부지점장이 인원 충원이 될 때까지는 대부계를 맡으면서 업무 공백은 막을 수 있었다.
한 차장도 없고, 한 차장 눈치를 보며 일부러라도 내게 딴죽을 걸어대던 공현수 과장도 없다. 거기다가 지점장이 부지점장에게 따로 언급을 주었는지 부지점장도 딱히 내 외근에 대해서는 뭐라 하지 않는다.
덕분에 난 지금도 이렇게 마원섬유로 외근을 와서 재무재표를 확인하고 있었다.
[판정보류]
[등급하락요건 발생]
[등급하락요건: 가지급금 관리 소홀]
[기업신용평가등급 B→C 확정날짜: 202X년 6월 25일]
마원섬유의 대출진행중인 서류에서 발견한 변동정보다.
1단계 하락. 하락요인은 가지급금 관리 소홀.
가지급금이란 쉽게 말해 대표가 임의로 회사 돈을 사용한 것을 말한다.
보통은 사업적인 용도로 급히 처리할 때 쓰게 되는 것이지만, 대표의 사사로운 일에 쓰이는 경우도 더러 있다.
물론 결산 전까지 메꾸기만 하면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쓰이는 돈이란 것이 쓰기는 쉽지만 처리는 늘 뒷전이 되기 마련이고, 그것이 누적되면 기업 신용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킬 수도 있다.
내가 재무재표를 확인하는 동안 재무과장은 시종일관 떨떠름한 표정이다.
“사이트에 들어가서 확인하면 될 걸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서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저희도 업무가 바쁜 사람들입니다.”
투덜거림.
하지만 재무재표 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회사의 분위기, 내가 이걸 요구했을 때 재무과장의 반응 등등. 그리고 궁금한 것이 생기면 바로바로 질문도 할 수 있고.
난 신경 쓰지 않고 분기별 재무재표를 꼼꼼히 확인했다.
재무재표에는 가지급금 항목은 없었다.
당연히 없을 수밖에. 가지급금을 가지급금으로 명시하는 멍청한 회사는 없을 테니.
“여기 단기대여금, 이거 뭡니까?”
“그건······.”
“가지급금이죠?”
흔한 패턴이다.
단기대여금, 주임종단기채권 등등 이름만 바꿔 적는.
“액수가 상당하네요.”
“그건······ 의류제조라는 게 급하게 땡처리 원단을 구매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원재료 구입에 썼다? 증빙할 만한 자료는요?”
“대리님이 모르셔서 그러시는데, 이 바닥 생리라는 게 다 단골장사고 현금 박치기라······.”
“결국 증빙할 자료는 없다는 거네요?”
“······.”
어느 순간부터 이재신이란 이름의 재무과장이 내 눈을 피하고 저자세가 되어 있다.
켕기는 구석이 있다는 뜻.
물론 정당한 목적으로 썼을 수도 있다.
사실 그건 내게 중요한 건 아니다.
회사 돈을 어디에다 어떻게 썼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랴.
난 세무사가 아니라 은행원일 뿐인데.
문제는 분기별 가지급금 금액이 제대로 처리도 되지 않은 채 복리 이자만 더해져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는 거다.
이 정도면 세무조사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이지경이 될 때까지 당연히 재무과장이 가만히 있었을 리 없다.
들어먹지 않은 것이다.
처리도 안 되고 처리할 생각도 없고, 가지급금이 계속 불어나고 있는 걸 보면 대표란 자가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회사 돈이 곧 내 돈이라는 구시대적이고 시대착오적인 마인드.
‘아! 그럼 혹시 그 확정날짜가 세무조사 일을 뜻하는 건가?’
십중팔구 그럴 것 같다.
비교적 쉽게 퍼즐이 맞춰졌다.
저번 성우실업 건은 동문회를 찾아내는 데만 해도 3일이 거렸으니까.
더 볼 것도 없다.
난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리며 재무과장에게 한마디 했다.
“대표님에게 말씀드리세요. 더 늦기 전에 집이든 땅이든 뭐든 다 팔아서 가지급금부터 메꾸라고. 뭐, 들어먹을 리는 없을 것 같지만.”
‘들어먹힐 거였다면 애초에 변동정보가 그렇게 뜨지도 않았겠지.’
대표가 그런 마인드라면 우리 지점도 서둘러 대출금 조정에 들어가야 한다.
지점으로 돌아온 나는 마원섬유의 일을 보고하기 위해 지점장실을 찾았다.
그런데, 지점장실로 들어가니 손님이 있었다.
알이 큰 선글라스에 챙이 큰 모자. 그 아래로 보이는 수려한 턱선.
순간 난 정말이지 살면서 이렇게 놀란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놀랐다.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 넘어질 뻔 했다.
“어. 잘왔어. 그렇잖아도 하 대리를 부르려던 참인데, 하 대리도 알지? 배우 김사나씨.”
어디 알다 뿐인가.
내 청춘의 아이콘.
배우 김사나
걸그룹 전성시대라 불리웠던 그 시절에도 내 군대 관물대만은 김사나로 도배가 되었을 만큼 난 그녀의 열성 팬이었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이렇게 실물을 영접하게 되다니?
이런 걸 두고 성덕이라고 하는 걸까? 별로 성공한 인생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김사나씨. 이 친구가 좀 전에 제가 말한 하성운 대리입니다. 나머지 얘기는 이 친구랑 나누시면 됩니다.”
김사나가 자리에서 일어서 내게 가볍게 목례를 하며 손을 내민다.
“김사나라고 해요.”
어쩜 자태도 이렇게 우아한지.
“아, 저는 대리 하성운입니다.”
자리가 자리니 만큼 최대한 점잔을 빼려고 하는데도 내 허리는 이미 90도로 넙죽이다.
김강철 전무한테도 이렇게까지 굽신거리진 않았는데.
부드럽고 가녀린 손의 감촉.
실물 영접만으로도 영광인데 악수까지.
크흐! 일주일은 손을 안 씻어야겠다.
박순호 지점장이 그런 날 지점장실 밖으로 조용히 부른다.
“대출 받으러 오신 거니까 응접실로 모시고 가서 상담해 드려. 연예인이라고 들떠서 막 퍼줄 생각 말고.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대출에는 연예인 DC같은 건 없으니까. 알지? 하긴, 연예인 대출이 한두 번도 아니고,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
연예인 대출. 그래 한두 번 아니다.
기억하는 것만 대강 일곱 번.
하지만 김사나는 처음이란 말이지!
그러니까······ 정신차리자.
지금부터는 팬이 아니라 은행원이니까.
그렇게 들뜬 마음을 추스른 후 김사나씨를 모시고 응접실로 들어갔다.
단둘만이 있는 공간.
자꾸 감격이 밀려드는 걸 억지로 누르고는 물었다.
“대출을 신청하러 오셨다구요?”
“예.”
“팬입니다.”
“예?”
“그냥 그렇다구요. 하하.”
냉정해야 하는데 참 그게 쉽지가 않다.
근데 괜히 말했나 보다.
입가가 미세하게 꿈틀하는 것이 결코 반가움은 아니다.
대출이라는 게 연예인에겐 창피하다면 창피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물며 한때 국민 여동생이라고까지 불렀던 그녀에겐 이렇게 대출 상담을 받는 행위 자체가 수치스러울 수도 있다.
이럴 때는 친근함보다는 사무적인 게 낫다.
“대출 신청 서류는 준비해 오셨습니까?”
내말에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어 내민다.
난 서류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빠진 건 없군요. 대출 금액은 얼마가 필요하십니까?”
“최대한 많이요.”
“어떤 용도로 쓰실 건지 알 수 있을까요?”
“······.”
잠깐의 망설임.
“연예인 대출은 절대적으로 비밀 유지가 원칙입니다.”
그제야 입을 연다.
“이번에 영화를 하나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런데 제작비 충당이 어려운 상황이에요.”
“그래서 대출을 받아서 직접 제작비를 지원하시겠다는 말씀이시군요.”
“저는 이게 제 배우로서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배우로서의 마지막 기회.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잘 알고 있다.
한해 TV 광고만 20개를 넘게 찍었던 그녀지만 전성기는 짧았다.
갑자기 터진 모친의 빚투 때문이었다.
무려 80억.
처음에는 동정 여론도 있었지만 그 80억 사기 행각에 김사나도 공모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며 이미지는 급격히 추락했고, 검찰 조사 결과 무고함이 밝혀졌지만, 그때는 이미 회복 불능 수준으로 이미지가 망가진 다음이었다. 게다가 촬영장마다 들이닥쳐 행패를 부려대는 빚쟁이들까지.
그렇게 그녀는 연예계에서 강제 퇴출당하다시피 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워낙에 착하고 싹싹했던 성격 덕에 친분 있는 PD들이 예능에도 불러주고 아침드라마 주연을 맡겨주기도 했지만 성적은 고만고만. 그렇게 잊힌 배우가 되어가고 있었다.
심지어 아직까지도 모친의 빚을 대신 갚아나가고 있다는 소문까지 들렸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대출도 크게 기대할 수 없을지 모른다.
“혹시 부족한 제작비가 얼마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총제작비 50억 중에 지금까지 확보한 게 30억 정도예요.”
20억이 부족하다.
웬만큼 잘나가는 연예인도 담보 없이는 쉽게 받을 수 없는 거액.
“물론 그걸 다 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해요. 제 처지를 저도 잘 아니까요. 그저 할 수 있는 만큼은 다 해보고 싶은 것뿐이에요.”
“그만큼 이번 영화에 자신이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군요.”
순간 김사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괜히 또 심쿵.
“잘할 자신은 있어요. 잘해야 하고요. 스토리도 좋고 성시훈 감독님 역량도 충분하시고······ 제작 상황이 어렵게 된 건 순전히 저 때문이에요. 저 말고 다른 배우가 맡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수월하게 제작비를 맞출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도 주변 만류 다 뿌리치시고 저랑만 하겠대요. 제가 그 역할을 맡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러니까 분명 성공할 거예요. 전 저보다 성 감독님을 더 믿거든요.”
호기심이 생긴다.
“혹시 영화 대본을 하나 얻을 수 있을까요? 물론 외부에는 절대로 노출시키지 않을 겁니다. 어디까지나 대출 심사에 참고하려는 것뿐이니까, 확인하고 바로 돌려드리겠습니다.”
“음······ 이거라도 괜찮으시면······.”
가방에서 두툼한 종이 뭉치 하나를 꺼내어 내민다.
손때 묻은 대본에는 다섯 자의 제목이 적혀 있었다.
[나는 킬러다]
당장 내용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지만, 난 대출 신청 서류와 대본을 잘 챙긴 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최대한 빠르게 심사 진행하겠습니다.”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다.
“잘 부탁드려요.”
“예. 심사 결과 나오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신청서류에 적힌 번호로 연락드리면 될까요?”
“예.”
그렇게 김사나와의 심장 떨리는 면담은 무사히 끝이 났다.
마음 같다면야 조금이라도 더 붙들어 두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녀에겐 그저 불편한 자리일 뿐이고, 모름지기 덕질이란 나를 위해가 아니라 님을 위해가 기본이니까.
< 아! 내 청춘의 아이콘 > 끝